걸어다니는 책들/ 김해자 지하철은 길고 네모난 책이다. 그 네모 속에는 참으로 다양한 책들을 집필 중인 길쭉하고 넓적하고 동글동글하고 크고 작은 액자소설책들이 흔들리며 서 있거나 졸며 앉아 있다. 저마다 주인공일 생의 책이 진행 중인 밀실들이 스쳐가는 광장. 지금 바로 이곳에서 쓰여지는 책을...2004-02-27 00:00
진흙탕과 연꽃/ 김해자 어린 시절 나는 화장실에 있는 언니들의 일기장이든 신문이든 닥치는 대로 읽는 문자중독중 환자였다. 방학이면 내 것은 이미 독파하고 언니 오빠들이 타온 교과서까지 기웃거리다 별로 재미없어 보이는 승공통일의 길이니 뭐니 하던 반공책까지 읽었으니 마르크스 레닌을 그때 다 ...2004-02-20 00:00
세번 사는 인생/ 김해자시험 준비한다고 큰소리치고 들어간 딸아이의 웃음소리가 들려 들여다보면 국어 자습서를 읽으며 웃고 있다. 물론 시험준비에 필수인 문제풀이는 안 하고 지문 밖의 자투리 글들을 보며 키득거리는 것이다. 그러니 성적은 그저 그럴 수밖에. 올해 중3이 되는 이 딸은 한번 책에 ...2004-02-13 00:00
삼류의 즐거움/ 김해자“개선문의 주인공 라비크가 잘 마시던 술 이름과 색깔은?” “칼바도스, 초록색.” “데미안에 나오는 선과 악을 다 포용한다는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이것이 아직도 기억하는 여고시절 국어 시험문제와 그 답이다. 음악 필기시험이라는 것 또한 가관이었으니, 전교생 ...2004-02-05 00:00
여수를 떠나며/ 김수열악양에 있는 박남준 시인의 집에서 차를 마시며 늑장을 부린 탓일까? 구례까지 나가 버스를 타고 여수 가면 이미 제주행 비행기는 떠나고, 저만치 멀어지는 비행기의 뒷모습만 망연하게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구례로 향하는 차 안에서 티는 낼 수 없지만 속마음은 그게 아니다...2004-01-29 00:00
버림 받은 책/ 김수열이사를 자주 다녀본 사람은 안다. 책이라는 것이 얼마나 애물단지라는 것을 말이다. 지금은 자주 눈에 띄지 않지만, 한 20년 전만 해도 학교 교무실을 찾아오는 단골손님 중에 월부 책을 팔러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늘 ‘병신 같은 놈’이었다 초임 교사 시절 나는 ...2004-01-16 00:00
책 읽지 맙시다/ 김수열제주 지역의 방송국에서 일주일에 한번씩 책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맡아 진행한 적이 있다. 4년 넘게 하다가 얼마 전에 프로가 개편되면서 그만두게 되었는데, 처음 그 방송을 제안받았을 때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하루치 분량이 7분가량이어서 책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고 ...2004-01-10 00:00
숨어사는 외로움/ 김수열그러니까 보길도를 찾은 게 언제였더라. 그렇지. 그곳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소식을 접했으니 지난 2월 말 즈음이었지. 고산 윤선도가 음풍농월했다는 세연정이나 낙서재도 좋고, 보길도의 산과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옥소대도 좋고, 공룡알처럼 동글동글한 먹돌이 지천...2004-01-02 00:00
일기책/ 이경혜지난 12월14일은 내가 혼자만의 비밀일기를 써온 지 정확히 31년이 되는 날이었다. 31년 전, 초등학교 6학년이었던 나는, 미래의 내 딸을 위해 일기를 쓰기 시작했다. 나는 그 애가 열세살이 되면 열세살의 일기를, 스무살이 되면 스무살의 일기를 읽게 해주리라는 원대...2003-12-26 00:00
Q씨와의 인연/ 이경혜Q씨! 올 11월을 나는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 창작실에서 보냈습니다. 창문 밖에는 황금빛으로 기품있게 물든 잎갈나무 숲이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고, 비 내리는 새벽이면 슬프디 슬픈 노루 울음소리가 들리고, 풀밭을 지나칠 때면 비단끈처럼 가느다란 어여쁜 꽃뱀이 고개를...2003-12-18 00:00
야수의 영혼/ 이경혜‘할리우드 키드’란 게 있다면, 이를테면 나는 ‘북 키드’(book kid)였다. 책 내용만이 아니라 책 자체를 사랑하는 나는 지금도 책만 보면 가슴이 떨린다. 책은 나에게 아편이고, 니코틴이고, 카페인이다. 가방 속에 책이 들어 있지 않으면 나는 한치도 움직일 수 없...2003-12-11 00:00
내 사랑 골방/ 이경혜어둡고 작은 골방이 하나 있었다. 어머니의 기억할 수 없는 자궁 같은 방, 그 어둡고 작은 골방 안에서 내 삶을 관통하는 깊고 강렬한 사랑이 싹텄다.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을 때까지 결코 시들지 않을 사랑. 그 방은 먼지와 책의 방이었다. 같은 주간지부터 한자로 가득 ...2003-12-04 00:00
동자/ 박남준입동이 지났다. 눈 나리는 소설이며 대설도 머지않았다. 그간 꽁꽁 첫 얼음이 얼기도 했으며, 집집마다 이크, 저런 하며 김장김치를 서두르기도 했다. 겨울에 들었다지만 소나기처럼 한바탕 겨울비를 뿌린다. 구양수와 송두율 비가 그치고 이는 바람에 구르는 낙엽들, 봄날 연...2003-11-29 00:00
산 그리고 시/ 박남준산에 오르고서야 비로소 산을 내려올 수 있다. 물론 오르지 않고서도 능히 그 산의 높고 깊어 험준함을, 낮으나 그윽하여 평화로움을 알 수는 있겠지만 그 차이는 실로 큰 바위와 모래알처럼 다를 것이다. 산을 오르지 않고 그 산을 오르며 온몸을 적시는 땀을 흘려볼 수 있...2003-11-21 00:00
집/ 박남준오랫동안 너무 떠돌다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살펴본 것이 텃밭이었다. 마당 앞 무가 팔뚝만큼 굵어졌다. 돌보아주지도 않았는데 너무 고마워서 그 깜깜한 밤중에 흠뻑 물을 뿌려주며 생각했다. 햇볕과 바람이 돌봐주었구나. 홀로 이른 새벽과 저녁을 맞이했을 빈집이 돌봐주었을 ...2003-11-14 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