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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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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 박남준

등록 2003-11-29 00:00 수정 2020-05-03 04:23

입동이 지났다. 눈 나리는 소설이며 대설도 머지않았다. 그간 꽁꽁 첫 얼음이 얼기도 했으며, 집집마다 이크, 저런 하며 김장김치를 서두르기도 했다. 겨울에 들었다지만 소나기처럼 한바탕 겨울비를 뿌린다.

구양수와 송두율

비가 그치고 이는 바람에 구르는 낙엽들, 봄날 연둣빛 새순으로 움을 틔우고 크고 푸르게 자라나 한여름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며 지친 발길을 불러 쉬게 하고 더운 땀을 씻게 하던 나뭇잎.

또한 부지런히 햇빛을 모아서 열매의 속살을 살찌우며 뿌리를 튼튼하고 깊게 하던 잎새들이 저마다 색동으로 지나온 날을 물들이다 이제 때가 되어 다시 거름으로 돌아가려 저렇게 떨어져 내리는구나.

다 내어주고, 진실로 아낌없이 다 내어주고 가벼워져서야 부는 바람처럼 흐를 수 있는 것이구나. 바람보다 가벼워질 수 있는 것이구나.

이곳 지리산 악양으로 이사 오기 전 전주에 살 때는 비록 일주일에 하루밖에 되지는 않지만 한문공부를 하고 있었다. 멀리 떨어져 있기는 하지만 한달에 한번이나마 나가 공부도 하고 사부님도 뵈어야 할 텐데 했지만 이런저런 사정으로 자꾸 일이 틀어지기만 했다.

며칠 전 전주에 나가 사부님을 뵈었다. 반가운 마음으로 소주잔을 기울이며 그간의 사정과 곱지 않은 세상과 흐르는 계절의 안부를 묻고 나누었다. 문득 내가 “청명한 가을밤에 듣기 좋은 소리로 낭랑하게 들려오는 선비의 글 읽는 소리라는 말도 있지요” 하고 묻자 사부님이 한문공부를 할 때 배우던 의 하권에 나오는 구양수의 ‘추성부’에 대한 말씀을 하셨다.

송나라 초기의 뛰어난 문장가였던 구양수의 ‘추성부’는 그가 어느 날 문득 방 안에서 가을바람 소리를 듣고 일어나는 마음을 읊은 글인데 대략의 내용은 이러하다.

구양수가 책을 읽는데 문득 방 밖에서 부는 바람소리가 처음에는 바스락거리며 낙엽이 지고 쓸쓸한 바람이 부는 것 같더니 파도가 일고 비바람이 몰아치고 전쟁터에서 적진을 향해 사람과 말이 달리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그가 동자에게 나가서 보고 오라고 했다. 동자가 돌아와 사방에 인적은 없고 나무들 사이에서 소리가 나더라고 말하자, 거기 미루어 가을바람의 쓸쓸하고 적막함을 알고 때가 되어 우주만물의 기운들도 노쇠하여 기울어가는 모습을 보며 서로 앞을 다투는 인생 또한 덧없음을 탄식한다는 내용의 글이다.

이처럼 장황하게 ‘추성부’의 대강을 말하는 까닭은 다름 아니라 구양수가 그와 같은 깨달음을 이야기하는데 그 앞에 앉아 있는 동자는 아무런 대답도 없이 꾸벅꾸벅 자고 있었다는 대목 때문이다. 사부님의 말씀이 여기에 이를 때 뺨을 때리듯 내 머리 속을 관통하는 생각이 있었다.

왜 그랬을까. 황당하게도 나는 송두율 선생이 떠올랐다. 혹자는 그가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경계인’이라고도 말한다. 경계란 무엇일까. 강의 이쪽과 저쪽, 이를테면 그 이쪽과 저쪽을 건너기 위해서는 모든 강의 경계에 다리가 있다. 다리를 건너지 않고 어찌 우리가 강을 건널 수 있을까.

경계란 이쪽과 저쪽 사이에 결코 오갈 수 없는 장벽을 여는 문이 아닐까. 문제는 그를 구속한 남쪽의 후안무치, 무지몽매한 자들뿐만이 아니다. 북쪽도 하나 다를 바 없다.

진리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꾸벅꾸벅 잠을 자는 동자를 남쪽과 북쪽의 위정가들에게 비유한다면 너무 과분한 미사여구가 되겠지만 송두율 선생은 이 동자와 같은 어린아이들의 사고밖에 할 수 없는 남쪽과 북쪽, 두곳 모두 잘못 가고 잘못 돌아왔다.

쓸쓸함도 잘 대접하라

아이는 더 커야 어른이 될 수 있다. 어찌 그리도 서둘러 어리석고 속 좁으며 제 주장, 제 욕심만 채우려는 아이들의 품을 찾으셨는가.

이아무개라는 목사의 글 중에 ‘하루종일 쓸쓸했지만 진리의 말씀에 귀기울이니 네게 찾아온 쓸쓸한 마음도 손님이다. 그러니 그 쓸쓸함도 잘 대접해라. 손님은 머지않아 떠날 것’이라는 말이 있다.

구속된 송두율 선생께 마음속으로 그런 말씀이나마 드리고 싶다. 당신의 조국은 아직 코흘리개 어린아이들입니다. 그러니 당신이 코도 닦아주고 바른 길로 가도록 잘 가르쳐야 할 것입니다.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의 아이들에게 글도 깨우치게 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세상을 바로 볼 수 있는 참다운 진리의 책을 읽을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그 말씀들에 귀기울일 수 있으니까 말입니다.

* 박남준씨의 책에세이는 이번호로 마칩니다. 다음호부터는 소설가 이경혜씨의 칼럼이 4주 동안 연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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