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바로가기

한겨레21

기사 공유 및 설정

숨어사는 외로움/ 김수열

등록 2004-01-02 00:00 수정 2020-05-03 04:23

그러니까 보길도를 찾은 게 언제였더라. 그렇지. 그곳에서 대구 지하철 참사 소식을 접했으니 지난 2월 말 즈음이었지. 고산 윤선도가 음풍농월했다는 세연정이나 낙서재도 좋고, 보길도의 산과 바다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옥소대도 좋고, 공룡알처럼 동글동글한 먹돌이 지천으로 깔려 있는 ‘뽀리기’ 해안도 그만이지만, 거기 사람 하나 있어 꼭 가보고 싶었지. 언젠가 시 쓰는 이원규로부터 이야기를 듣고 그 사람 사는 모습이 늘 궁금했었다. 그의 글 를 받아 읽고는 전화를 걸어 한번 찾아가겠노라고 했지. 그와 함께 사는 봉순이도 보고 싶고 부용이도 보고 싶었지. 검은 새끼염소도 물론 보고 싶었어.

싸늘히 누워 있던 백로 한 마리

돌이켜보면 나는 숨어살기 위해 섬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섬도 숨어살 곳은 아니었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기지만 세간을 떠나 사람 몸 숨길 곳이 지상에는 없습니다.
세상 속에, 사람들 속에 숨어살며 또 한 시절 건너왔습니다.

그날이 제사날이었지 아마? 두 부부가 정성으로 마련한 음식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치 오랜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처럼 흉허물 없이 술잔이 오갔지. 세상살이에 대해 말을 건네면서 잔도 함께 건네고, 사람살이에 대해 얘기를 들으면서 잔도 함께 받았지. 노화도라 했던가? 그곳에 산다는 친구들이 찾아와 합석을 하면서 우리는 굴양식·전복양식·김양식에 대해, 보길도에 들어설 예정인 댐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게 이야기꽃을 피웠지. “뱃길이 이미 끊겼을 텐데 비좁지만 새우잠이라도 같이 잡시다” 하는 말에 택시만 콜이 있는 게 아니라 배도 콜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그제서야 알았어. 지금도 입안에 군침이 도는데, 그때 먹었던 텃밭에서 캐온 겨울배추며 굴전이며 김치찌개의 맛이라니!

다음날 아침, 쓰린 속을 달랠 겸 아무도 없는 찻집에 들어갔는데 우와, 벽을 가득 메운 책들과 음반 CD들. 잔잔한 음악을 틀어놓고 찻물을 끓이는데, 보글보글 끓고 있는 물소리가 점점 커지면서 이명처럼 들려오는 거 있지? ‘바보 같은 놈, 바보 같은 놈, 바보 같은 놈…’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뒤따라오는 삐걱 소리를 뒤로 하고 찻집에서 나와 세연정 가는 숲길을 걸었지. 나를 저만치 놔두고 나 아닌 나만 데리고 쫓기듯 살아온 지난날을 세차게 후려치면서 말이야. 이렇게 살다간 나를 영영 잃어버리는 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아침 찬바람보다 먼저 나를 휘감더군. 가다가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지. 세연정이 저만치 보이는 숲길 한가운데 백로로 보이는 새 한 마리가 싸늘하게 누워 있더군. 어제 저녁 이 길을 걸었을 때만 해도 보이지 않던 죽음 하나가 지금 내 앞에 너무도 선명하게 드러누워 있는 게 아닌가. 그날 보길도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는데 기억 속에 남아 있는 건 오직 하나. 그 새의 죽음, 그뿐이었지.

나는 왔던 길을 되짚어 내가 사는 섬의 일상으로 돌아왔고 새의 죽음과 함께 그 섬도 잊고 지내다가 언젠가 신문에서 그 섬을 다시 만났지. 숨어살기 위해 그 섬에 들어왔다는 그가 그 섬에 세워질 댐을 온몸으로 막기 위해 죽음에 직면한 단식을 스무날이 넘게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야. 신문을 보는 순간, 한동안 잊고 지냈던 새의 죽음이 다시 떠오르는 거야. 그 무렵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고작 그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그 외로운 싸움을 지켜보는 것 외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

가난하게 사는 건 가장 큰 나눔

내가 다시 그를 만난 건 그가 온몸으로 댐 건설을 저지하고 요양하러 갔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야. 그가 전화를 받은 곳은 다름 아닌 내가 사는 섬이었지. 아무도 몰래 여기 왔다는 거야. 술 대신 깨죽과 차 한잔을 가운데 두고 몇 마디 하지 못하고 우리는 헤어졌지. 그리고 그를 다시 만난 건 보길도에서 보내온 두 번째 편지를 통해서야. 그 책갈피에 이런 글이 실려 있더군.

가난하게 사는 것이야말로 나눔 이전의 나눔이며, 가장 큰 나눔의 실천입니다.
나눔이 무소유의 소극적 실천이라면 자발적 가난은 적극적 실천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모두가 가난해지려고 노력할 때, 이 세계의 모든 가난은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한겨레는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진실을 응원해 주세요
맨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