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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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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박남준

등록 2003-11-14 00:00 수정 2020-05-03 04:23

오랫동안 너무 떠돌다 집에 돌아와 제일 먼저 살펴본 것이 텃밭이었다. 마당 앞 무가 팔뚝만큼 굵어졌다. 돌보아주지도 않았는데 너무 고마워서 그 깜깜한 밤중에 흠뻑 물을 뿌려주며 생각했다. 햇볕과 바람이 돌봐주었구나. 홀로 이른 새벽과 저녁을 맞이했을 빈집이 돌봐주었을 게야. 달빛이 별빛이 지켜주었을 게야.

쥐와 함께 보낸 사흘

노독인가. 그렇겠지. 보름여를 객지로 나돌며 시달렸으니 몸에 무리가 없는 것이 이상하지. 아궁이에 평소보다는 조금 더 불을 지피고 방으로 들어오니 으슬으슬 몸살기운이 든다. 가끔은 그랬다. 나 이렇게 고단한 몸이었을 때 세상을 떠돌며 지친 몸을 끌고 찾아가 위안을 받을 벗은 몇이나 있을까. 내 메마른 영혼의 곁에 기름 젖은 심지를 당겨 불 밝혀줄 스승과도 같은 벗에 대하여.

이런저런 이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누가 왔었나 마루로 통하는 부엌문이 삐끗이 열려 있다. 아는 선배가 왔다갔다고 그랬는데 이 양반이 방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고 가서 큰 쥐가 한 마리 방에 들어왔었나 보다. 여기저기 꽤 굵은 쥐똥이 눈에 띄었다. 쥐가 들어왔다 나갔겠지 하며 한 사흘 그냥 보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오늘 새벽녘이 돼서야 잠에 들려고 불을 껐는데 바드득바드득 무언가 갉아대는 소리에 잠이 달아나고 말았다. 슬그머니 일어나 불을 확 켰더니 정말 통통하게도 살찐 쥐가 책상 밑으로 숨는 게 보이는 것이 아닌가.

우당탕탕 책상을 치우고 책장을 들어내고 오기가 발동했다. 밤새 숨바꼭질을 하다 다듬이 방망이로 결국 원 퍼치, 아직 바둥거리는 것을 종이로 꾹 눌러 잡고 마당으로 나가 퍽- 분이 풀리지 않아 다시 또 퍽퍽.

날이 훤히 새버렸다. 덕분에 방안 청소를 깨끗이 했다. 쥐와 함께 한방에서 3박4일을 보내다니. 으으. 죽은 쥐는 주로 남의 것만 훔쳐먹었으므로 뒤뜰 앵두나무 밑에 묻어주었다. 죽어서나마 누군가를 살찌울 거름으로 돌아가거라.

내년에 하얀 앵두꽃이 피고 앵두가 붉게 익어가면 나는 그 앵두를 바라보며 죽은 쥐를 생각할까. 쥐가 몸을 바꿔 거듭난 그 붉은 앵두를 먹으며 생각해봐야겠다. 내가 거름으로 돌아갈 날들에 대해, 내 몸을 바꿔 거듭날 무엇에 대해.

그러고 보면 내 한 몸에도 수많은 생명의 몸들이 거름이 되어 나를 이루고 있겠지. 다만 서로 드러내지 않아 보이지 않는 수많은 몸 말이야. 웃고 떠들고 화내며 슬퍼하는 내 안의 성정들도 혹여 그 보이지 않은 내 몸 속의 몸들이 지닌 정서들일지도 모르지.

한두끼 혼자 먹는 밥이 낯설었는데 이제 괜찮아졌다. 식은땀이 나던 몸살기운도 사라지고 다시 눈을 뜨는 아침이 상쾌하다. 집에 돌아오니 몸과 마음이 다시 생기를 찾는다. 늘 그랬다. 집이 내게 위안을 주며 평안케 했고 내 문학의 정신을 키워주었다. 벗이었으며 스승이었으며 어머니였다.

헤세의 , 젊은 날의 방황 속에서 때때로 나는 나르치스와 골드문트를 꿈꾸고는 했다. 내가 절망에 사로잡혀 있을 때 나르치스의 사랑을, 구원과도 같은 스승의 손길을 갈망했으며, 안일과 나태에 빠졌을 때 골드문트의 치열한 예술혼에 몸부림치는 방랑으로 나는 왜 스스로를 내몰아가지 않고 있는가 반문하고는 했다.

벗이며 스승이며 어머니였던…

집과 함께 자라왔으며 집으로부터 떠나 세상 속으로 나갔다. 집은 바로 내게 있어서 나르치스 안의 골드문트였으며 골드문트 안의 나르치스였다. 집을 떠나 길에 나서며 쉬지 않는 길의 구원과 방랑자가 되고자 하며 그 길의 오랜 여정으로부터 집으로 돌아와 세상을 정리하고 눈감을 수 있다면 행복한 삶이리라.

어딘들 어떠리. 그와 같은 영혼의 소유자라면 구도와 예술의 그 먼 길 어디쯤 지친 몸을 누인들 또한 어떠리. 거기 꽃과 나무와 바람과 대지의 노래가 고요히 눈 감겨주지 않겠는가. 붉고 노란 단풍은 산 위로부터 물들어왔다. 여기는 남쪽, 섬진강의 끝자락 하동의 악양 땅, 내 그리운 이들의 소식도 북쪽으로부터 올 것이다. 겨울 철새들이 저녁 하늘로 돌아온다. 누군가 길을 떠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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