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씨! 올 11월을 나는 강원도 원주의 토지문화관 창작실에서 보냈습니다. 창문 밖에는 황금빛으로 기품있게 물든 잎갈나무 숲이 저 멀리 아득하게 보이고, 비 내리는 새벽이면 슬프디 슬픈 노루 울음소리가 들리고, 풀밭을 지나칠 때면 비단끈처럼 가느다란 어여쁜 꽃뱀이 고개를 바짝 치켜들고 나를 바라보곤 했지요. 그 낙원 같은 공간 속에서 모든 것을 잊고 글을 쓰면서, 나는 새삼 원주와 박경리 선생과 책과 내 삶의 인연을 생각했습니다.

원주, 그리고 박경리 선생
광고
정확히 9년 전 늦가을, 11월의 스산한 날씨 속에 원주 구석에 작은 사글세 방 하나를 얻어 원주와의 첫 인연을 맺었던 내 모습이 떠올랐지요. 그것은 그토록 오랫동안 찾아 헤매던 나만의 ‘골방’이었습니다. 늦서리 맞은 배추들이 파랗게 얼어붙은 밭이랑을 지나 골목을 돌아들면 있는 귀퉁이 방이었습니다. 그 방의 첫 밤, 나는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나의 모든 방황과 갈등은 결국 나만의 ‘골방’을 찾는 과정이 아니었을지…. 허술한 창틈으론 황소바람이 몰아쳤고, 외눈박이 가로등은 어둠 속에 홀로 서서 내 작은 창을 노랗게 물들이고 있었습니다.
그 밤, 내가 꺼낸 책이 바로 박경리 선생의 였습니다. 원주로 가면서 가장 먼저 챙겨넣은 책이었지요. 아무리 방값이 싸고, 서울에서 멀지 않은 곳이라 할지라도 선생이 아니었다면 원주가 나를 그만큼 끌어당길 수는 없었을 테니까요. 그 책은 맨 처음, ‘Q씨’라는 이름의 연유를 밝히기 위해 ‘아큐정전’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그때 ‘아큐정전’을 동화로 고쳐쓰는 작업을 하고 있던 나는 첫줄부터 눈이 번쩍 뜨일 수밖에 없었지요. 빨려들 듯이 그 글을 읽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몇번이고 책을 내려놓고 생각에 잠겨야 했고, 죽창처럼 심장을 파고드는 그 구절들에 연방 밑줄을 그어대야만 했습니다. ‘쉰에 죽으면 앞으로 십년, 예순에 죽으면 앞으로 이십년, 누워서 손을 꼽으며 세어봅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아직 할 말을 못하고 살아왔기 때문에 초조한 것입니다. 약속은 없지만 언어의 마성에 걸린 나는 허우적거려봐야겠어요. 한치를 나갈 수 있는가고. 그 가능성에 매달려보는 거죠. 그렇다면 내게 남은 시간은 지극히 촉박한 것 아니겠습니까.’
나 또한 그랬습니다. 삶에 치여 지내면서 내 생의 남은 날들을 꼽아보느라 늘 초조했지요. 하고 싶은 말들을 가슴에만 품은 채 어느 날 가뭇없이 사라져버린다면! 사실 어느 날의 쓰러짐이 없었다면 아마 그렇게 모든 것 떨치고 떠날 용기도 내지 못했겠지요. ‘앗!’ 하는 소리조차 못 낸 채 그대로 사라져버릴 수 있다는 깨달음은 내겐 너무도 큰 충격이었습니다.
다음날, 나는 버스를 타고 선생의 댁이 있다는 단구동을 찾았습니다. 까치 한 마리가 빈 들판에서 꼬리를 까딱거리고 있었지요. 언덕 위로 깔끔히 정돈된 밭과 집이 보였습니다. 나는 가만히 그 집 앞으로 다가갔습니다. 문살 사이로 넓적한 바위들이 징검다리처럼 놓여 있는 게 보였지요. 문득 기척이 있는 것 같아 나는 화들짝 놀라 얼른 자리를 떴습니다. 흠모해 마지않는 분이기에 또한 만나는 일이 두렵기도 했으니까요.
그 뒤로 세월은 또 여러 사연을 품은 채 말 없이 흘러갔습니다. 그새 선생은 를 마무리 지었고, 단구동 집을 떠나 매지리에 토지문화관을 세웠고, 나는 다시 여러 곳을 떠돌다 결국은 다시 방을 잃고 말았습니다. ‘골방’이 없어진 나는 숨쉬기가 힘들었지만 문학하고는 전혀 다른 길에서 오직 ‘삶’만을 위해 한 몇년을 또 벅차게 살았습니다. 그러다 가슴앓이처럼 통증이 밀려들면 생각했지요. ‘이번 삶은 여기까지야. 글은, 다음 삶에나 쓰자.’
모든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그때 내 눈에 신문 귀퉁이의 기사가 띄었습니다. 토지문화관 창작실 무료 대여…. 내 눈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당장 떨리는 마음으로 신청서를 썼고, 그 여름 그곳에서 다시 글쓰는 사람으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2년 뒤인 올 가을에도 또 그곳 신세를 진 것이고요.
선생의 댁은 바로 옆에 있어서 나는 내 방에서도 밭일 하는 선생의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바위에 앉아 먼 산을 보며 담배를 무는 선생의 모습도 몰래 훔쳐보았지요. 글 쓸 방을 내줄 뿐 일절 간섭하지 않는 선생은 기실 바로 옆에 있어도 아득하게 먼 분이었지만, 그래도 나는 모든 것이 꿈만 같았습니다. 를 읽던 9년 전의 그 밤과 오늘은 어떤 인연의 고리에 묶여 있는 것일까요? Q씨, 당신이 이 인연을 묶어준 것인가요?

광고
한겨레21 인기기사
광고
한겨레 인기기사
윤석열, 파면 이틀째 ‘관저정치’ 중…“대통령 아니라 집단 보스”
‘윤석열 파면’에 길에서 오열한 김상욱 “4월4일을 국경일로”
‘탄핵 불복’ 이장우 대전시장, 윤석열 파면 뒤 “시민 보호 최선” 돌변
“토하고 또 토했다…그래도 큐를 놓을 수 없었다”
이재명, ‘대장동 증인 불출석’ 과태료 처분에 이의 신청
“주가폭락에 퇴직연금 증발 중…트럼프는 골프 중” 부글대는 미국
윤석열, 오늘은 나경원 1시간가량 독대 “고맙다, 수고했다”
윤석열 파면 직후 대선 승리 다짐한 국힘…“뻔뻔” “해산해야”
윤석열, 박근혜보다 관저퇴거 늦어질 듯…“이번 주말은 넘겨야”
“이제 전광훈 처벌을”…탄핵 기각 대비 유서 썼던 목사님의 일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