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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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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류의 즐거움/ 김해자

등록 2004-02-05 00:00 수정 2020-05-03 04:23

“개선문의 주인공 라비크가 잘 마시던 술 이름과 색깔은?”
“칼바도스, 초록색.”
“데미안에 나오는 선과 악을 다 포용한다는 신의 이름은?”
“아프락사스.”
이것이 아직도 기억하는 여고시절 국어 시험문제와 그 답이다. 음악 필기시험이라는 것 또한 가관이었으니, 전교생 모두 방송으로 음악을 듣고 작곡가와 곡명 및 특색을 적어내는 것이다. 그러니 음악 듣는 한참 동안 누가 답을 못 쓸 것인가. 첫 악장만 듣고 이미 답을 쓴 수제자들이 중간중간 다 배치되어 있는데. 늘어지는 여름날 오후면 음악 선생님은 강당의 긴 의자를 침대 삼아 눕게 한 다음 그랜드피아노를 쳐주셨다. 2학년 땐가는 그 선생님이 라는 영화의 여주인공에 반한 적이 있었는데, 비나 눈이나 하여튼 하늘에서 뭐라도 내리는 날이면 베토벤의 를 특별보너스로 쳐주며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의 멜랑콜리를 우리에게 전염시키곤 했다.

일류고를 부러워할 필요 없었네

내가 다닌 학교는 대학 갈 형편과 능력을 갖춘 학생이 잘해야 서른명 안팎인 이른바 삼류학교였다. 그러니 입시지옥에 전 학생을 끌어넣을 필요가 없다는 게 학교의 방침이었던 것 같다. 졸아도 크게 혼내키거나 때리는 일 또한 없었으니, 몸이 좀 약한 축으로 알려진 나 같은 경우는 심지어 쉬는 시간에 엎어져 있다 잠이 폭 들어 수업이 시작되었는지 모르는데도 깨우지 말고 오버나 잘 덮어주라고 한 분도 계셨다.

인근 섬에서 자취하는 아이들이 많아 수업하는 중에도 철따라 삶은 수수며 옥수수며 쌀튀밥이 맨 뒷줄부터 손에 손을 거쳐 앞으로 전달되곤 하니 교실인지 시골 마당인지 구별이 안 가던 여고시절. 봄이면 벚꽃동산에 들어가 도시락을 까먹고 누워 깔깔거리며 수다를 떨었고, 여름이면 무화과 그늘 아래서 더위를 식히며 책을 읽었으며, 가을엔 호두나무 밑에서 낙엽의 우수와 호두의 실익을 다 건지며 놀았다. 선교사가 살았다던 숲속의 빨간 벽돌 건물은 도서관으로 쓰였는데, 그 근처에 귀신이 나온다는 썰이 돌더니 급기야 ‘밤에 머리 없는 귀신을 보았다더라’ 하는 흉문으로 번졌다. 하지만 시험 끝나면 미션스쿨답게 꼬박꼬박 보여주는 라든가 이라든가 하는 영화 덕에 십자가 하나만 있으면 무서울 게 없었다. 공부한다고 도서관에 자리를 잡긴 했으나 이 핑계 저 핑계로 숲속에서 수다를 떠는 일이 많았는데, 아무래도 압도적인 화제는 소설 속의 만져지지 않는 사랑이었다. 누구는 의 사랑 로체스터가 이상형이라 했고, 누구는 의 레트 바틀러 같은 남자랑 연애한다고 했고, 누구는 의 라비크처럼 우수에 젖은 남자가 좋다고 하면서 나중엔 돈키호테에서 산초까지 모든 종류의 남성상들이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내가 사는 도시에 일류고가 없었던 건 아니다. 우리 도시 이름을 붙인 여고나 이름만 들어도 제일이라는 것을 알게 하는 또래들에게 열등감 한번 안 느꼈겠는가? 게다가 그 아이들은 어느 모로 보나 모범생 티가 잘잘 흘렀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우리가 마음 밑바닥까지 그들을 부러워한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우리에게 삼류의 존재 이유와 자긍심을 가르쳐준 애인 같고 언니 같은 선생님들이 드글거렸으니 공부 좀 떨어지는 거 정도야 젊은 영혼을 아프게 할 치명적 상처가 되랴. 우리 학교 출신이라 어떻게든 후배들에게 잘해주려고 하는 열성파 선생님에다, 스물 중·후반의 패기만만한 외지인 선생님도 많았다. 자취나 하숙을 하면서 낯선 도시에 와 긴긴 밤을 함께 보낼 사람이 없던 그들 중 국어선생님이 많았는데, 그들은 어떻게든 건수를 만들어 빵이나 만두를 사주며 함께 놀다 헤어질 적엔 이니 니 하는 책들을 한 보따리 빌려주곤 하셨다.

그들과의 연애가 세상을 바꾸다

중·고등학교 6년을 삼류로 다닌 덕에 나는 그때 볼 만한 책은 다 읽었던 셈이다. 그리고 그 나이에 읽었기 때문에 이름도 길고 별칭도 많은 도스토예프스키나 톨스토이의 주인공들 이름이며 그때 맡았던 향취와 분위기까지 고스란히 기억하는 것이리라. 사흘 밤 새워 책을 읽느라 학교에서 졸아도 혼내키는 척만 한 선생님들 덕에 사복 입고 남학생과 빵만 먹어도 근신 처분을 받던 그 엄혹한 시절에 책 속의 주인공들과 원 없이 연애에 빠지고도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초록색 술을 한번도 먹어본 적이 없다. 아, 더 늦기 전에 어느 낯선 이방의 골목길 끝에서 바에 들어가 봐야지. 그리고 조용히 말해야지.

“여기 칼바도스 두잔. 그리고 초록색 롤랑 한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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