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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입견을 법의학자가 뒷받침” vs “법의학자가 현장에 갈 수 있어야”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과학적 증거 반박해 무죄 이끈 김형태 대표변호사 vs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최영식 법의학부장
등록 2013-03-30 13:15 수정 2020-05-03 04:27
과학적 증거는 결정적 한 방이다. 수사 과정과 재판 결과에 미치는 영향력이 강력하다. 그러나 과학적 증거가 ‘무결점 증거’의 다른 말은 아니다. 과학적 증거에도 오류는 존재하며 그로 인해 피의자의 운명이 엇갈리는 일도 종종 발생한다. 수사기관의 의뢰를 받아 범죄와 관련된 과학적 증거를 분석해온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최영식 법의학부장과 강력사건 피의자의 무죄를 증명하기 위해 수사기관이 제시한 과학적 증거를 반박해온 김형태 ‘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는 그동안 국내 과학수사가 범죄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 한계를 보여왔다는 데 뜻을 같이한다. 그러나 그 원인과 대안에 대해선 의견이 엇갈렸다. 양쪽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_편집자
“법의학 감정은 원래 수사의 초동 단계에서 선입견 없이 수사의 단서를 잡을 때 필요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거꾸로 수사기관이 이미 선입견으로 수사 결론을 내놓은 다음 법의학자에게 그 결과를 뒷받침시키라는 식이다.” -김형태
지금도 과학적 증거의 오류로 법정에서 피의자의 유무죄가 뒤바뀌는 일이 벌어진다고 보나.
954호 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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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형태 ‘법무법인 덕수’ 대표변호사(이하 김) 과거 대표적 사례가 1995년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이었다. 굵직한 (과학적) 쟁점만 10가지가 넘었다. 결국 재판부가 (검찰이 제시한) 과학적 증거를 터무니없는 것으로 판단해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이후 그런 사례는 굉장히 많다. 한 예가 있다. 남편이 부인을 밀어뜨리는 바람에 부인이 욕조에 머리를 부딪혀 사망했다며 검찰이 남편을 기소한 사건이 있었다. 그런데 (검찰이 주장하는) 남편의 행위와 사망한 아내의 머리에 난 상처가 제대로 일치하지 않았다. 그 부분을 집중적으로 파고들어 남편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최영식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법의학부장(이하 최) 국내 사법 체계에서는 그런 사례가 적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나는 법률 전문가가 아니어서 그 부분에 대해선 판단을 하기 어렵다. 다만 법의학자 입장에서는 아쉬운게 있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에서도 (수사기관의) 초동수사에 문제가 있었다. 그런데 대법원 판결을 보면 ‘현장에도 가지 않은 법의학자가 폴라로이드 사진만으로 판단한 것은 믿기 어렵다’는 부분이 나온다. 우리가 (제도상 사건 현장에) 갈 수 없었던 것인데, 재판부가 이를 무죄의 판단 근거로 삼은 것이다. 우리에겐 아픈 부분이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1995년 치과의사인 30대 여성과 그의 한 살배기 딸이 집 안욕조에서 끈으로 목이 졸려 죽은 상태로 발견된 사건이다. 당시 치과의사인 남편이 피의자로 지목돼 1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8년간 치열한 법정 공방 끝에 2003년 무죄가 확정됐다.
과학수사가 왜 잘못되나.

과학수사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게 법의학 감정이다. 예를 들어 법의학에서는 시강(사체 경직), 시반(사체의 피부에 나타나는 자줏빛 반점), 위의 음식물 등으로 사체의 사망 시각을 추정한다. 사망 시각이 언제인지에 따라 범인이 달라지고, 수사 방향이 바뀔 수도 있다. 따라서 법의학자들에게 객관적 자료를 주고 선입견 없이 판단토록 하는 게 중요하다. 그러나 국내 수사기관은 피의자(용의자)에게 불리한 정황 자료들만 법의학자에게 잔뜩 준다. 그러면 법의학자는 잘못된 전제를 바탕으로 추정하기 시작한다. 거기서부터 다 어그러지는 거다. 법의학 감정은 원래 수사의 초동 단계에서 선입견 없이 단서를 잡을 때 필요한 것인데, 우리나라에선 거꾸로 수사기관이 이미 (피의자에 대한 유죄의) 선입견으로 수사 결론을 내놓은 다음 법의학자에게 그 결과를 뒷받침시키라는 식이다.

사건 현장에서 사체를 보존하는 법적 조항이 전혀 없다. 경찰이 현장에서 (사체) 사진을 찍은 뒤 옮겨도 불법이 아니다. 그렇게 옮겨진 사체는 대부분 동네 병원 영안실 냉동고에 들어간다. 그러고는 경찰이 일차적으로, 검사가 최종적으로 부검 여부를 결정한다. 오늘 사망한 변사사건 사체가 있으면 아무리 빨라야 다음날 아침에 국과수 부검실로 들어오는 거다. 사체의 경직 상태나 직장(대장의 가장 아랫부분) 온도 등 사후 경과 시간을 추정할 수 있는 부분의 절반은 이미 날아간 상태인 거다. 냉장고에 들어갔다가 나온 사체의 직장 온도를 따지는 게 얼마나 의미가 있겠나. 그러다보니 우리는 일부분의 경직 상태, 복부에 나타난 피부 변화, 부패 진행 정도 등 나머지 절반을 보고 사후 경과 시간을 추정한다. 이렇게 처음부터 법의학 전문가가 사건 현장에 갈 제도적 장치가 없는 게 한계라고 본다.

과학적 증거가 재판 결과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는 이유는.

과학적 증거를 다루는 재판의 문제는, 판사는 법의학을 모르고 법의학자는 법을 모른다는 거다.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증명’이 형사재판에서 유무죄를 가르는 핵심이다. 재판부가 합리적 의심을 다 해결하면 피의자는 유죄고, 합리적 의심이 들면 무죄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국내 법의학자들에겐 ‘법의학적·과학적 추정이 과연 얼마나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증명의 범주에 들어가야 하는가’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다. 그래서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증명이 안 됐는데도 법정에서 ‘피의자가 범인이다’라는 식으로 용감하게 단언하곤 한다. 해외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판사는 법의학자가 법적 의미를 다 안다고 생각하고 ‘우리가 생각하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 없는 증명의 선을 넘었구나’라며 유죄를 선고해버린다. 법의학자와 판사 간 이런 간극이 좁혀지지 않는 한 억울한 사람은 계속 나올 것이다.

국과수는 피의자의 유무죄에 대한 중립적 의견을 보냈는데 수사기관에서 이를 왜곡해 받아들일 수도 있나.
954호 표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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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수도 있다. ‘김 순경 사건’*이다. 당시 수사기관이 사체의 직장 온도를 한 번 재서 보내왔다. 원래 세 번은 재서 보내라고 돼 있다. 어쨌든 당시 우리가 (사망 추정 시각에 대한) 답변을 ‘참고사항’이라고 달아서 보냈다. 여러 상황으로는 단언할 수 없어서였다. 당시 아쉬웠던 게 (사건 현장인 여관방에) 이상한 발자국도 있고 여관방 열쇠가 사라지는 등 이상한 점들이 있었는데도 경찰은 사망 추정 시각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 같다. 그 시간대에는 현장에 피해자의 남자친구인 김 순경밖에 없었으니 자백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진범이 밝혀져 김순경은 풀려나지 않았나. 경찰이 다른 수사를 할 여지가 있었음에도 (국과수 의견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 거다. 이렇게 수사기관이 더 수사할 부분이 있는데도 (법의학의 추정) 하나로만 수사를 끝낸다면 또 다른 김 순경 사건이 나올 수 있다.

*김 순경 사건
1992년 애인을 살해한 혐의로 징역 12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던 김기웅 순경이 진범의 자수로 누명을 벗고 1994년 풀려난 사건이다. 당시 국과수가 ‘피해자가 새벽 5시께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는 의견을 내놓자 새벽 3시30분~7시께 피해자와 함께 있었던 김 순경이 범인으로 지목됐다.


“사건 현장에서 사체를 보존하는 법적조항이 전혀 없다. 경찰이 현장에서(사체) 사진을 찍은 뒤 옮겨도 불법이 아니다. 이렇게 처음부터 법의학 전문가가 사건현장에 갈 제도적 장치가 없는 게 한계라고 본다.” -최영식
수사기관이 법의학 전문가들을 독점한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에는 유명한 법의학자가 몇 명 없다. 그런데 사건이 터지면 검찰이 싹 데려가서 감정을 시킨다. 나중에 재판이 시작돼서 피고인쪽 변호사가 찾아갈 법의학자가 없어지는 거다. ‘치과의사 모녀 살인사건’ 때도 그랬다. 검찰이 (국내 법의학자를) 몽땅 다 불러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할 수 없이 유명한 해외 법의학자들에게 전자우편을 보냈다. 사진과 동영상 등 온갖 자료를 보내면서 “선입견 없이 판단해달라”고 했다. 그중 한 명은 법정에까지 나와 검찰 쪽 국내 법의학자들과 엄청난 공방을 벌였다. 그렇게까지 했으니 검찰이 제시한 사망시간 추정이 터무니없다는 걸 밝혀내고 피고인이 살아난 거다. 게다가 현재 국과수, 국과수 출신 법의학자, 법의학 교수 간에는 동료의식이 있어서인지 서로의 판단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한번은 내가 (검사 쪽 법의학 감정을 반박하려고) 국과수 출신 법의학자를 설득해 법정까지 데리고 간 적이 있다. 그런데 증언하지 않고 도망갔다. 법의학자들 간에는 객관적 실체를 드러내기 위한 치열한 싸움이나 검증을 하지 않는 거다.

검사가 모든 증인을 독점하기는 한다. 지금은 워낙 법의학자 수가 적다. 전국적으로 국과수 의사는 23명이다. 나머지 법의학과 교수나 개업한 법의학자들도 손에 꼽는다. 물론 그들도 생각이 다르면 다른 의견을 내기도 한다. 그래도 (피고인 처지에선) 외국처럼 변호사 쪽에 법의학자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과학수사의 오류를 줄일 대안은.

법원이 증거 법칙을 엄격하게 적용하는 게 중요하다. 미국의 연방대법원 판례를 보자. 마약범이 경찰 앞에서 마약을 꿀꺽 삼켰다. 경찰이 병원에 마약범을 데리고 가서 영장 없이 마약을 토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재판부는 마약범이 마약을 소지한 게 사실인데도 불법으로 채취한 증거라는 이유로 마약범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우리도 재판부가 지금보다 증거 법칙을 더 엄격하게 적용하면 수사기관의 잘못된 관행이 저절로 고쳐질 것이다. 재판에서 유죄의 증거로 채택받기 위해 수사를 제대로 할 것이고, 과학수사 기법도 좀더 발달할거다. 물론 수사기관들은 당장은 ‘수사를 어떻게 하라는 거냐’라며 난리를 칠 거다. 그러나 10명의 범인을 놓치더라도 1명의 무고한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는 게 법 아닌가.

국민은 왜 국과수가 외국 드라마처럼 사건 현장에서 모든 증거를 찾아내지 못하느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그런 시스템이 안 돼 있다. 일단 제대로 해보기나 했으면 좋겠다. 적어도 중요한 사건에선 경찰과 검찰, 국과수가 합동으로 현장에 나갈 수 있게 하는 길이라도 열어주면 좋겠다. 그리고 지금은 변사사건이 발생했을 때 부검하는 비율이 7~8%밖에 안 된다. 외국에서 30% 정도 부검을 하는 것에 비하면 매우 적다. 우리는 검사가 부검 여부를 결정하는데 그 기준이 다 다를 수 있다. 외국은 교도소 안 사망사건 등 특정 유형의 변사사건에 대해선 반드시 부검을 하도록 기준을 세워놓고 있다는 점을 참고했으면 한다.

서보미 기자 spring@hani.co.kr·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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