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사재판의 최고 목표는 오판 탓에 무고한 자를 처벌받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유죄 오판이 일어나는 걸 막을 수 없다. 이러한 본질적 모순을 해소하려고 도입한 제도가 재심이다. 정의를 실현할 마지막 수단으로서 말이다. 1980년대 조작간첩 사건의 재심을 이끈 조용환 변호사는 “재심은 형사재판에 의해 형사재판의 이념이 무너진 바로 그 자리에서 다시 형사재판을 통해 그 이념을 되살리는, 역설적이면서도 극적인 절차”라고 표현했다.
문제는 재심에 이르는 길이 우리나라에선 너무나 멀고 험난하다는 점이다. 형사소송법이 재심 대상을 엄격하게 규정할 뿐 아니라 대법원의 해석 또한 까다롭기 때문이다. 형사소송법 제420조 5호를 보면, 재심 사유는 ‘무죄를 인정할 명백한 증거가 새로 발견될 때’라고 돼 있다. 대법원은 2009년 7월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피고인이 과실 없이 확정판결 선고 전에 이를 제출할 수 없었다가 판결 후에 새로 발견된 증거(신규성)로서 △기존 (유죄)판결이 인정한 사실을 뒤집을 수 있을 만한 증거가치가 있을 때(명백성)’라고 해석했다.
풀어보면 이렇다. 첫째, 무죄를 입증할 명백한 증거라고 하더라도 그 증거가 피고인의 고의·과실로 기존 판결에서 제출되지 못했다면 재심 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는 얘기다. 이를 근거로 법원은 범죄 사실이 객관적인 사실과 맞지 않는 것으로 드러나더라도 재심을 허용하지 않아왔다. 이에 대해 권오걸 경북대 교수(법학)는 “피고인에게 명백히 불리한 축소해석”이라고 비판했다. 전원합의체 판결 당시 소수 의견도 그랬다. “명백히 무죄가 선고돼야 할 무고한 사람에게 법원이 정의의 실현을 외면한 채 그 책임을 피고인에게 미뤄 인권의 보호를 위한 구제 절차를 거부하는 것이다.”
둘째, 무죄 가능성이 있다는 정당한 의심이 드는 증거로는 재심 사유가 안 된다. 기존 유죄판결을 그대로 유지할 수 없다고 판단할 만큼 ‘고도의 개연성’이 있는 무죄 증거여야만 한다. ‘재심 개시=무죄판결’이라는 공식을 천명한 셈이다. 권오걸 교수는 “이중·삼중의 벽을 쌓고 있어 대법원 판례의 입장대로라면 재심은 장식물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반면 일본에서는 재심의 관문을 획기적으로 넓힌 판례가 이미 1976년에 나왔다. 형사소송법상 재심 사유는 우리나라와 동일하지만 일본 최고재판소는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기 때문이다. 판례 요지는 이렇다. “재심 개시를 결정할 때는 기존 판결의 사실인정에 합리적 의심이 들게 했는지만 따지면 충분하다. 범죄 사실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확실한 심증이 필요하지는 않다. ‘의심스러울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형사재판의 원칙이 재심에서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유죄판결을 내리려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확실한 증명이 필요하고, 그렇지 않으면 설령 유죄 의심이 있더라도 무죄를 선고한다는 형사법 대원칙을 끝까지 지키겠다는 일본 최고법률가들의 견해다. “(재심 대상을 확대하면) 법적 안정성을 해치고 제4심을 허용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고 주장해온 우리 대법원과 대조적이다.
<font size="3">누가 법적 안정성을 실현하는가</font>유죄 오판을 바로잡을 길을 넓고 평평하게 닦은 일본이 법적 안정성을 실현하는 것인가, 아니면 그 길을 좁고 험난하게 만든 우리나라가 법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것인가.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font color="#877015">참고 문헌</font>조용환 ‘재심 소송-제2차 진도간첩단 조작사건을 중심으로’(2010), 권오걸 ‘재심 개시 사유로서의 증거의 신규성과 명백성의 의미와 판단 기준’(2010), 이호중 ‘형사소송법상 재심 사유의 합리적 해석론-제420조 제5호와 제7호를 중심으로’(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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