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년 10월31일, 사형수 최은수(당시 30살)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이런 말을 남겼다.
“나는 억울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나를 오판한 자와 위증한 자의 죄를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font color="#C21A1A">객관적으로 입증된 오판 사례 드물어</font>
1980년 현직 경찰관이던 고인은 동네 주민에게서 도박빚 독촉을 받고 농협 숙직실에 소총을 들고 가 금고문을 열려다 직원 두 명에게 들키자 이들을 총으로 쏘고 달아난 혐의로 구속 기소돼 사형을 선고받았다. 재판 과정에서 최씨는 고문과 회유 때문에 허위 자백을 했
고, 숨진 직원 가운데 한 명이 또 다른 직원을 총으로 쏘고 자신과는 몸싸움을 벌이다 오발 사고가 났다고 주장했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서는 그에 대해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는데, 1984년 12월4일치 에서 최씨 변호인은 이렇게 말한다. “도박빚을 진 적이 없다는 증언이 나왔다. 농협 금고 열쇠도 숙직실에 없었다.” 고인의 주장은 진실이었을까. 아니, 고인은 정말 살인자였을까. 답하기 어렵다. 다만, 확실한 점은 그의 생사를 결정지었던 판사들도 전지전능한 신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간인 이상 무의식적 편견 때문에 착각과 실수를 범할 수 있다. 이런 오류를 줄인다면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비극도 줄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서는 1980년대 후반부터 ‘오판’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됐다. DNA 검사를 통해 누명을 벗는 이들이 생겨난 덕이다. 국내에선 피고인의 무고함이 객관적으로 입증된 오판 사례가 드물다. 미처 밝히지 못한 오판도 분명 있을 것이다. 오판 연구가 부족한 상황에서 최근 현직 판사가 ‘오판의 소지가 상존함’을 전제로 판사들이 빠질 수 있는 판단 오류를 실증적으로 연구한 논문을 내놓았다.
서울고등법원 김상준 부장판사는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사건에 주목했다. 오판 또는 심급 간에 유무죄 판단이 달라진 사건을 통해 판단 오류나 차이를 일으킨 원인을 규명하려는 시도다. 검사의 1차 판단을 거쳐 유죄 의견으로 기소된 뒤 1심 판사도 거듭 유죄를 판단한 경우, 2심 재판부가 앞선 판단을 뒤집기는 쉽지 않다. 1심 판결을 취소하려면 무죄판결 이유를 상세히 설명할 수밖에 없다. 김 판사는 1995년~2012년 8월 ‘1심 유죄-2심 무죄’판결을 받은 생명침해·성폭력·강도죄·방화죄 등 강력범죄 사건 전체인 540건을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이 연구를 바탕으로 논문 ‘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에 관한 연구-항소심의 파기자판 사례들을 중심으로’를 작성해 지난 2월 서울대 법학전문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인섭 서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법관의 오판 가능성에 대해 누구나 다루고 싶은 마음은 있지만 진범이 밝혀진 사례 외엔 문제 접근 방법이 막막한데, 1심 유죄-2심 무죄의 판단 근거를 서로 비교해 법관이나 검사·변호사·경찰들이 판단할 때 유의해야 할 점을 연구했다는 점에서 방법론적으로 참신한 논문”이라며 “실제 사례를 정밀 분석한 살아 있는 자료이므로 법관 교육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연구 대상 540건 중 무죄 확정판결을 받은 경우는 504건(93.3%)에 이른다. 대법원에서 다시 유죄 취지로 파기환송된 사례는 22건이다. 540건의 1심 판결을 모두 ‘오판’으로 단정할 순 없다. 피고인이 진범이지만 증거 부족 등을 이유로 무죄가 선고된 사례가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분석 대상이 된 540건의 1심 판결은 합리적인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의 유죄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절차법상의 오판’으로 볼 수 있다.
<font color="#C21A1A">허위 자백에 대한 실증적 연구도</font>
<font color="#008ABD">살인 등 생명침해 범죄에선 정황증거 문제(53%)와 허위 자백(38.3%)이 쟁점이 됐고, 성폭력 범죄에서는 피해자의 허위 진술 또는 피해 오인 진술(77.2%)이 유무죄를 갈랐다.</font>
유무죄 판단 차이를 초래한 원인은 △허위 자백(20.4%) △공범의 허위 자백(11.1%) △피해자 또는 목격자의 오인 지목 진술(20.7%) △피해자의 허위 진술 또는 피해 오인 진술(49.3%) △과학적 증거의 오류(13.9%) △정황증거 문제(23%) 등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 로스쿨 새뮤얼 그로스 교수가 1989년 1월부터 2012년 2월 사이에 발생한 오판 사례 873건을 분석한 결과와 유사하다. 이 연구에선 위증 및 무고(51%)가 가장 빈번한 오판 원인으로 밝혀졌다. 김 판사의 연구 결과, 범죄 유형별로 쟁점이 되는 증거 유형은 매우 달랐다. 살인 등 생명침해 범죄에선 정황증거 문제(53%)와 허위 자백(38.3%)이 쟁점이 됐고, 성폭력 범죄에서는 피해자의 허위 진술 또는 피해 오인 진술(77.2%)이 유무죄를 갈랐다.
지난해엔 현직 경찰이 오판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요인 가운데 ‘허위 자백’에 대한 국내 최초의 실증적 연구를 내놓았다. 이기수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경찰연구관은 서울대 법학전문 박사 학위 논문인 ‘형사 절차상 허위 자백의 원인과 대책에 관한 연구’에서 피고인(피의자)의 허위 자백 주장, 재판을 통한 자백의 신빙성 부정, 무죄 확정 등 세 가지 조건에 부합하는 사례와 수사 및 기소 단계에서 허위 자백이 인지된 경우 등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 사이에 발생한 허위 자백 46건을 분석했다. 허위 자백의 원인은 폭행(16%), 기망(10.6%), 장시간 조사(10.6%)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시대 변화에 따라 허위 자백에 이르는 사유도 달라졌다. 1990년대에는 고문, 폭행, 협박, 신체 구속의 부당한 장기화, 기망 등 5가지 원인의 비중이 50%를 차지했지만, 2000년대에는 회유·유도신문 등 물리력 행사가 없는 상황에서의 허위 자백이 증가하는 추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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