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8월3일 오전 11시20분 이지연(당시 9살·가명)은 작은 방 책상의자에 앉아 컴퓨터게임을 하고 있었다. 잠기지 않은 대문으로 한 남자가 들어왔다. “집에 아무도 없니?” 지연이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는 방바닥으로 지연을 끌어내렸다. 바지와 속옷을 벗기고 협박했다. “움직이면 죽인다. 발버둥치지 마.” 지연이 반항하자 남자는 몸으로 눌러 성폭행했다.
그날 지연은 부산 연제구 거제동에 있는 부산의료원의 원스톱지원센터로 갔다. 그곳에서 성폭력 피해를 말하고 범인의 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얼굴은 넓적하고 사각형(턱을 가리키며)이고, 흑인만큼은 아니지만 지나가면 표가 날 정도로 얼굴과 팔 등이 검은 편이에요. 눈은 조금 작고 쌍꺼풀이 있었어요. 눈과 이마에 주름이 있고 머리는 짧지만 단정하지 않았어요. 옷은 회색 반소매 면티셔츠에 긴 청바지를 입고 있었어요. 키는 엄마(163cm) 정도로 작았고 몸은 뚱뚱해 보였어요. 나이는 아빠(당시 42살)보다 많아보였고 얼굴에 점은 없었어요.”
사건 발생 4∼5일 뒤 경찰은 비슷한 수법으로 범행을 저지른 적 있는 300명의 영상을 지연에게 보여줬다. 지연은 용의자를 발견하지 못했다. 그 뒤 지연은 경찰서 출석을 거부했다. 정신적 충격 탓이었다. 사건 발생 26일째인 8월28일 경찰은 관내 성폭력 우범자 등 47명의 주민등록 사진을 휴대용 저장장치(USB)에 담아 지연의 집을 찾았다. “이 사람이 범인과 아주 많이 닮았어요.” 지연이 김수철(당시 61살·가명)의 사진을 가리켰다. 김수철은 2004년 아동 성폭력 혐의로 징역 2년을 선고받고 복역한 뒤 2005년 9월 가석방된 사람이었다.
법원에서 체포영장을 발부받은 경찰은 곧장 김수철을 찾아나섰다. 그러고는 그해 10월11일 부산 동구 초량동 부산역 주변 고시원에서 그를 체포했다. 경찰이 범행을 추궁했지만 그는 완강히 부인했다. 경찰은 김수철의 모습을 비디오로 촬영해 다음날 지연의 집을 다시 방문했다. “범인이 맞아요.” 지연이 말했다. 경찰은 그날 지연을 경찰서로 데려와 숙직실에서 유리 너머로 김수철을 보여줬다. 지연이 범인을 식별하는 모습을 비디오로 녹화하기 위해 경찰은 평상복을 입은 김수철을 다른 2명과 함께 앉혔다. 범인식별 절차인 라인업(줄세우기)이다. 한쪽만 볼 수 있는 특수유리를 통해 지연은 그들과 마주했다. 김수철을 가리키며 지연은 “범인”이라고 재확인했다.
김수철은 성폭력 혐의를 줄곧 부인했다. 피해자의 집 위치도 모르고 그 근처에 가본적도 없다고 했다. 지문·정액 등 객관적 증거가 없는 상태에서 범인 지목 진술만으로 유죄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항변했다. 무엇보다 자신은 발기가 되지 않는다며 신체감정까지 요청했다. 부산지법은 2007년 2월2일 김수철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항소심 재판부는 무죄로 판결을 뒤집었다. 피해자의 범인 지목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2008년 1월 대법원에서 무죄가 확정됐다.
<font size="3">정확히 기억 못하는 인간의 한계</font>서울고법 김상준 부장판사가 분석한, 1심에서 유죄 선고가 났지만 2심에 무죄로 뒤바뀐 사건 540건(1995~2012년) 중에서 범인 오인 지목은 112건(20.7%)이었다(서울대법학전문 박사논문 ‘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에 관한 연구’, 2013). 성폭력 사건이 66건(58.9%)으로 절반을 넘었고, 강도(37건·33%), 살인(1건·0.9%)이 뒤를 이었다. 범인 오인 지목자는 대부분 피해자였다. 112건 가운데 24건에서 ‘제3의 목격자’가 있었는데, 그중 20건은 피해자도 함께였다. 단 4건만이 제3자가 단독으로 범인을 오인 지목한 셈이다.
범인 오인 지목은 오판의 주요 원인으로 미국과 영국에서 오래전부터 연구돼왔다. 미국 미시간대학 로스쿨 새뮤얼 그로스 교수가 분석한 873건(1989~2012년) 중에서 범인 오인 지목이 43%를 차지한다. 목격자의 위증까지 더하면 76%로 높아진다. 특히 성인 성폭력(96%), 아동 성폭력(95%), 강도(94%) 사건이 문제가 됐다. 미국 인권단체 ‘결백 프로젝트’(Innocence Project)가 DNA검사로 면죄를 받아낸 피고인 303명 중에서도 범인 오인 지목 탓에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은 72%나 된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인간의 관찰력, 기억력, 표현력의 한계를 일상적으로 경험한다. 어떤 사건을 친구와 함께 목격했는데도 그 사건 상황을 서로 다르게 기억하는 것을 보고 놀라거나 다투는 일은 흔하다. 인간은 모든 사물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관심 갖고 주의를 기울이는 걸 선별적으로 관찰·인식하기 때문이다. 형사재판에서도 피해자나 목격자의 진술을 대할 때 이런 평범한 경험, 인간의 한계를 고려해야 한다.
<font size="3">용의자 모르는 수사관이 질문 진행하라</font>고려해야 할 첫 번째 사항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일정한 비율로 망각이 이뤄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실험 결과를 보면, 처음 몇 시간 안에 대부분의 기억은 사라지고 5∼6일이 지나면 일부만 보존된다. 따라서 망각곡선은 ‘엘(L)자형’을 그린다. 결국 사건 발생 직후에 나온 목격자의 진술이 중요하다. 사건 당일에 지연이 범인에 대해 묘사한 내용이 사건 발생 26일 뒤 이뤄진 범인 지목보다 훨씬 신뢰도가 높다는 얘기다.
둘째, 피해자는 범행 당시의 극심한 공포탓에 범인을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한다. 어떻게 범인의 얼굴을 잊을 수 있느냐고 흔히말하지만 정작 실험 결과는 그렇지 않다. 낮은 정도의 스트레스는 사람의 기억을 촉진하지만 극심한 스트레스는 사람의 기억을 훼손하고 왜곡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셋째, 기억의 왜곡은 수사 과정에서 악화한다. 목격자가 여럿일 경우 한 목격자가 범인을 묘사하면 다른 증인의 기억도 얽히고 설킨다. 사진이나 정보를 수사관이 더해주면 실제 범행에 대한 기억과 그 중간 정보가 합쳐진다. 그렇게 왜곡되면 이를 정정할 방법이 없다. 목격자 자신도 왜곡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보자. 목격자의 기억이 희미하면 어떨까? 목격자는 경찰을 도와 범인을 잡길 원하기에 기억 속의 그림과 가장 닮은 사람을 선택하게 된다. “범인과 아주 많이 닮았어요”라고 지연처럼 말하면서 말이다. 수사관이 그 지목 진술이 옳다고 맞장구쳐주면 ‘내 증언이 옳다’는 확신까지 더해진다. 만약 수사관이 단 한 명만을 보여주면 그를 수사기관이 범인으로 의심한다는 암시효과가 생겨 오류 위험성은 한층 커진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면서 목격자가 더 확고하게 지목 진술을 한다면 진실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한계, 오류 가능성을 인지한 미국 법무부는 ‘범인 식별 가이드라인’을 정했다. △목격자에게 여러 사진을 제시하거나 여러사람을 라인업한다. △이때 한꺼번에 보여주지 말고 한 사람씩 순차로 보여준다. △보여줄 때마다 질문을 던져 그가 범인인지 답하게 한다. △용의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수사관이 그 과정을 진행하도록 한다. 몸짓과 목소리의 톤 등 은밀한 암시가 이뤄지지 않도록 말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이 2004년 2월 판례로 비슷한 조건을 제시했다. △범인의 인상착의 등에 대한 진술 또는 묘사를 사전에 상세히 기록화해야 한다. △용의자를 포함해 그와 인상착의가 비슷한 여러 사람을 동시에 목격자와 대면시켜 범인을 지목하도록 해야 한다. △용의자와 목격자, 다른 비교 대상자들이 사전에 접촉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 △사후에 증거가치를 평가할 수 있도록 대질 과정과 결과를 서면화해야 한다.
<font size="3">대안 ‘비디오 라인업’</font>피고인 김수철이 무죄를 선고받은 건 경찰이 대법원이 명시한 범인 인식 절차를 제대로 따르지 않았으므로 피해자의 범인 지목 진술을 신뢰할 수 없다고 법원이 판단했기 때문이다. 법원은 “피해자(지연)가 특수유리를 통해 앉아 있는 3명 중에서 피고인(김수철)을 지목했지만 그 직전에 피고인만 동영상과 숙직실에서 확인해 범인 식별 절차를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밝혔다. 또 지연은 사건 발생 초기에 범인의 피부색이 눈에 띌 정도로 검은 편이며 얼굴에 점이 없다고 말했지만, 김수철은 검지도 않고 왼쪽 볼에 사마귀 같은 점이 있음에 주목했다. “1차 범인 식별 때 경찰은 사진 중에 범인이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다고 말하지 않았다. 정신적 압박에 시달리던 피해자가 빨리 범인을 지목해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 탓에 사진 속에 범인이 없음에도 범인과 닮았다고 생각한 피고인을 지목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법원은 덧붙였다. 실제로 지연은 범인이 흰색 반소매 면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사건 당일 진술했는데, 용의자 사진 47장을 보면 40대 이상 남자 중에서 흰색 옷을 입은 사람은 김수철과 다른 한 명뿐이었다. 당시 국선변호를 한 백중현 변호사는 과의 통화에서 “항소심에서 신체감정도 했는데 피고인이 발기되지 않음이 확인됐다”고 말했다.
법원의 잇따른 무죄판결에도 수사기관의 범인 인식 절차는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다. 이성기 성신여대 교수(법학)가 경찰 53명(복수응답 5명 포함)을 대상으로 목격자에게 범인 여부를 확인하는 방법을 물었더니 68%(36명)가 ‘목격자에게 용의자의 사진을 보여준다’고 밝혔다. ‘라인업’은 5.5%(3명)에 그쳤고 19%(10명)가 ‘용의자 직접 대면’, 7.5%(4명)가 ‘여러 사진 제시’를 꼽았다(‘목격자의 범인 식별 진술의 증명력을 높이기 위한 실질적 대안으로서의 비디오 라인업’, , 2011). 응답자의 82%가 단독 대면을 신뢰하지 않지만 현실적인 이유 때문에 이를 행한다고 밝혔다. ‘들러리’를 구해 라인업을 하는 게 쉽지 않기 때문이다. 대안으로 이성기 교수는 영국에서 2003년부터 시행하는 비디오 라인업을 제시했다. 용의자의 동영상을 촬영해 이미 확보된 비슷한 들러리와 함께 목격자에게 보여주는 방식이다. 비디오 클립을 공유하고 재활용할 수 있어 들러리 문제를 해소할 수 있다. “자백 위주의 수사를 하는 경찰청이나 수사기관만을 탓할 일이 아니다. 미국·영국의 학자들은 다양한 사례를 분석해 범인 식별 절차의 오류 위험성을 인식하고 실질적으로 실행 가능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했다. 한국도 목격자의 수사 협조와 수사상 인권 보호를 이뤄낼 현실적 대안을 마련해야 한다.”(이성기 교수)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size="4">첫출발은 엄마의 추궁</font><font color="#1153A4">아동 성폭력 사건의 일정한 패턴</font>
덴마크 영화 에서 루카스는 한 소녀의 거짓말 때문에 ‘아동성범죄자’라는 누명을 쓴다. 아내와 이혼한 뒤 고향에 내려온 루카스는 아이들과 잘 어울리는 인기 많은 유치원 선생이다. 클라라는 아빠의 친구인 루카스에게 특별한 애정을 느낀다. 아이답지 않은 애정을 클라라가 표하자 루카스는 부드럽게 거절한다. 상처를 입은 소녀는 유치원 원장에게 루카스가 싫다고 투정 부리며 그의 성기를 보았다고 말한다. 다른 아이들까지 잇따라 비슷한 일을 겪었다고 고백한다. 루카스는 항의하지만 그 누구도 들으려 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는 통념 탓이다. 클라라가 뒤늦게 거짓말을 실토하지만 엄마는 말한다. “끔찍했던 기억을 네 무의식이 차단하는 거야.” 법을 통해 루카스는 진실을 밝혀낸다. 경찰 조사 결과 아이의 진술 일부가 허위임이 드러난 것이다. 하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 판결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1995~2012년 ‘1심 유죄-2심 무죄’로 판결된 540건 가운데 아동 성폭력 사건은 47건(8.3%)이었다(서울대 법학전문 박사논문 ‘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에 관한 연구’, 2013). 피해자 나이는 2살부터 12살까지 다양하며 6~7살(16건)이 가장 많았다. 피고인은 30대에서 50대까지 고루 분포돼 있고, 평균연령은 35살이었다. 미국 미시간대학 로스쿨 새뮤얼 그로스 교수가 2012년 분석한 오판 사례(873건)에서도 아예 범죄가 일어나지도 않은 경우가 129건이었는데, 그 절반(71건)이 아동 성범죄였다. 특히 무죄가 나온 아동 성폭력 사건에서 일정한 패턴이 읽히는 유형이 13건 있었다. 공통점은 어린이집이나 유아원, 미술학원 운전기사, 초등학교 교사가 보육·교육 시설이나 등·하교 승합차에서 아동을 추행했다는 점이다. 첫출발은 대부분 엄마의 추궁이었다. 피해 아동의 행동이 특이하거나 음부에서 진물이 나오면 엄마가 반복 신문 끝에 성폭력 피해 진술을 받아냈다. 또 아동이 범인을 먼저 지목한 게 아니라 엄마가 특정인을 의심해 말하면 아동이 긍정적인 답변을 내놓는다. 그러면 암시와 유도 탓에 피해 아동의 진술이 오염될 위험성이 아주 커진다. 이후 성폭력상담센터와 경찰에서 반복적으로 진술함으로써 상상과 현실이 뒤섞인다. 사건을 분석한 서울고법 김상준 부장판사는 “무서운 일은, 실제 물리적 성폭력 피해를 당한 적이 없는 아동이 그릇된 기억 때문에 정신적 피해의 경험을 안은 채 평생 고통받을 수 있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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