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이 끊긴 상황에서 성폭행당했다.”지난 2월, 배우 박시후씨는 20대 여성으로부터 성폭력 혐의로 피소됐다. 이에 박씨는 “호감을 갖고 마음을 나눈 것”이라고 주장한다. 강간이냐, 화간이냐. 성폭력 사건에서 흔히 벌어지는 공방이다. 이 사건이 법정으로 간다면? 우리나라에선 피해 여성이 얼마나 ‘무력화’됐는지가 강간죄 유무죄를 가리는 중요한 판단 요소다. 재판부는 폭행·협박이 있었는지, 피해자와의 관계, 반항 정도, 성관계 당시와 그 뒤 정황이 어땠는지 등을 따진다. 사건의 특성상 목격자가 없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피고인이 범행 사실을 부인할 경우 피해자 진술이 중요해질 수밖에 없다. 고소인의 말을 믿을 수 있는지가 박씨의 유무죄를 결정할 쟁점 중 하나가 될터다.
서울고법 김상준 부장판사의 연구에 따르면, 1995년부터 2012년 8월까지 ‘1심 유죄-2심 무죄 판결’을 받은 강력사건 540건 가운데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문제가 된 경우는 266건이다. 이 가운데 성폭력 범죄는 240건(90.2%)으로 압도적인 비중을 차지했다. 특히 피해자와 성관계를 가진 건 사실이지만, 합의하에 한 것이라는 피고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무죄가 선고된 항소심 판결은 81건이었다. 이런 판결을 재판장별로 비교해보면, 유독 몇몇 재판장이 피고인의 화간 주장을 인정한 경우가 많았다. 판사에 따라 강제성을 입증하는 증거의 기준이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김 판사는 논문을 통해 “법관 연수 등의 기회를 통해 심한 편차를 보이는 것은 시정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강도강간이나 특수강간 범죄에서도 화간 주장이 인정된 경우는 6건이었다. 주로 피해자의 주장에 과장이 있음이 밝혀진 사건들이다.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칼로 협박당했다는 피해자 주장이 과장돼 신빙성이 낮다고 보거나, 피해자는 안면이 없는 피고인이 집에 침입해 성폭행했다고 주장하지만 둘 사이에 이미 안면이 있어 이런 진술에 과장·왜곡이 있다고 판단한 경우였다. 통상 화간이라고 하면 남녀가 서로 아는 사이임을 전제한다. 그런데 서로 본 적이 없는 사이에서도 피고인의 화간 주장이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진 경우가 있었다.
2010년 당시 16살 김상진(가명)은 성폭력 혐의로 법정에 선다. 술에 취한 채 집 근처에 앉아 있던 이은아(19·가명)를 다른 일행 4명과 함께 발견해 집에 데려다준다는 명목으로 부축해준 뒤 헤어졌다가 다시 돌아와 인근 빌라 지하로 끌고 내려가 성폭행한 혐의다. 김상진은 피해자와 합의하에 성관계를 가졌다고 주장했다. 1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술에 취해 있는 피해자의 반항을 억압했다며 유죄를 선고했다. 그러나 항소심 재판부는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지적한다. 애초 피해자는 경찰 조사 때 바닥에 눕힐 때까지 무슨 일인지 잘 파악되지 않았다고 했으나 검찰·법원으로 갈수록 단계적으로 진술이 구체화되는데, 사람의 기억이 시간이 지날수록 더 선명해질 수 없다는 점에서 신빙성이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또 말이나 행동으로 구체적인 거부 의사가 없었고, 폭행·협박이 없어 심리적으로 반항이 불가능하거나 현저히 곤란한 상태에 있었을 뿐이라면 준강간죄에 해당할지 몰라도 강간죄는 성립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피고인이 상대방 의사에 반하는 정도의 유형력(직접적 물리력뿐 아니라 정신적 고통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폭력)을 행사해 피해자를 간음한 것으로 볼 여지는 있으나, 그 힘의 행사가 피해자가 반항을 못하거나 반항을 현저히 혼란하게 할 정도인지는 합리적인 의심이 없을 정도로 증명이 되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font size="3">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통념이 재판정으로</font>여자가 원치 않는 성관계에 노출됐다 하더라도, 경우에 따라 강간죄로 인정받지 못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성폭력 범죄 역시 다른 범죄처럼 유무죄를 판단하는 데 엄격한 잣대가 필요하다. 그러나 재판 과정에서 남자위주의 가부장적 통념이 개입돼 편향적 판단이 나올 수 있음은 부인할 수 없다. 여전히 우리 사회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통용돼 가해자에게 책임을 묻기보다는 피해자에게 ‘왜 술을 마셨는지, 가해자를 왜 따라갔는지, 꽃뱀은 아닌지’ 등을 따진다. 여성가족부가 19살 이상 성인 남녀 2200명을 대상으로 연구한 ‘2010년 성폭력 실태조사’ 자료를 보면, ‘여자가 알지 못하는 남자의 차를 얻어 타려다 강간을 당했다면 여자에게도 일부분 책임이 있다’ ‘여자들이 조심하면 성폭력은 줄일 수 있다’ ‘여자가 끝까지 저항하면 강제로 강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여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성폭행당하면 여자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통념에 대해 ‘매우 그렇다’ 혹은 ‘그렇다’고 답변한 비율이 50% 이상이었다. 남녀의 관계에 따라서도 성폭력 범죄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는데, 특히 부부 강간은 타인·지인·연인 관계에서 발생하는 강간보다 범죄로 덜 지각되고 처벌도 상대적으로 낮게 내려진다는 연구 결과가 있다(‘강간사건 판단에 주변 단서들이 미치는 영향: 부부 강간을 중심으로’, 이정원·김혜숙).
여성학자 권김현영씨는 성폭력 범죄의 처벌 구조에 대해 이렇게 진단한다. “우리나라 성폭력 범죄의 경찰 신고 비율은 7%, 기소 비율은 거기서 다시 41%가량에 그친다. 더구나 1심이 끝난 뒤 재판을 중단하는 경우도 많다. 재판 과정에서 사생활이 다 밝혀지는 힘든 질문을 받기 때문이다. 누군가 억울한 누명을 쓰는 일은 없어야 하지만, 많은 경우 피해 사실을 부모나 남자친구, 남편에게 알리지 못한다. 법정에 가는 것은 가족의 지지를 얻은 경우인데, 이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어쩔 수 없이 술자리에 갔다고 하는 등 사실과는 다른 이야기를 하게 되기도 한다. 이런 부분이 법정에서 문제가 되면 진술 신빙성을 의심받는데, 성폭력 범죄에서는 피해자가 완전히 솔직할 수 없는 구조가 있다.”
<font size="3">장애인 성폭력에서도 ‘진술 일관성’ 판단</font>장애인 성폭력 문제는 이보다 더 복잡한 경우의 수를 감안해야 한다. 전문가들은 판사가 장애 여성의 특성을 어떻게 인지하느냐에 따라 유무죄가 달라진다고 분석한다. 공익변호사그룹 ‘공감’의 염형국 변호사는 “피해 여성이 일관되게 진술을 못하더라도 쉽게 사람을 따르는 등의 장애 특성을 인지해 유죄로 판결하기도 하는데, 진술이 일관되지 않아 믿기 어렵다며 무죄판결을 하거나 수사 단계에서 무혐의 처분이 내려지는 것이 상당수”라고 말했다.
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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