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예산군에 사는 이상용(사고 당시 32살)씨는 2008년 8월 옆집 여자(35살)를 성폭행한 혐의로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았다. 검사가 작성한 피의자 신문조서를 읽어보자.
검사 피의자는 야간에 피해자의 집에 침입해 자고 있는 피해자를 성폭행한 사실이 있는가요.
피의자 사실 저는 술에 취해 기억은 나지 않지만 피해자가 저로부터 성폭행당했다고 한다면 인정합니다.
검사 피의자가 피우는 담배가 피해자의 베란다 뒤편에서 발견됐는데요.
피의자 예, 피해자의 집 안으로 침입하기 전 피우고 버린 것입니다.
검사 피해자의 집 현관문을 통해 안으로 침입한 것인가요.
피의자 아니요, 저희 현관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집 둘레를 한 바퀴 돌다가 피해자 집 뒤 베란다 앞에 서서 그 집을 보니 문이 열려 있어 호기심에 침입했습니다.
검사 침입 뒤 어떻게 하였나요.
피의자 피해자의 방문을 열고 안에 들어갔습니다.
검사 계속 진술하시오.
피의자 피해자가 침대 위에서 잠옷 차림에 엎드려서 자고 있길래 순간적 욕망에 피해자의 속옷을 벗기고 저는 입고 있던 반바지와 속옷을 벗어 뒤에서 성폭행했습니다.
검사 피해자를 성폭행한 후 어떻게 하였나요.
피의자 속옷만 입은 후 다른 옷은 손에 들고 피해자의 집 베란다를 통해 밖으로 나온 후 집으로 들어가 잤습니다.
검사 피의자는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하지만 당시 피의자의 집 현관문 앞에서 담배를 피운 사실, 피해자의 베란다 뒤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의 상태, 피해자의 진술 등을 보면 피해자의 집에 침입해 피해자를 성폭행한 것으로 보이는데 인정하는가요.
피의자 인정합니다. 다만 경찰에서 피해자의 질 분비물 등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의뢰한 것 같은데 그 결과를 알고 싶습니다.
“기억나지 않는다”에 집중해보니
1심 법원은 “피고인이 검찰에서 한 자백은 사건 범행의 전후 경위에 관해 구체적이어서 신빙성이 있다”며 징역 3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2심 법원은 “피고인이 사실관계를 자백한 것으로 볼 수 없다”며 무죄판결했다. 유무죄 판결이 엇갈린 이유는 1심은 범행 전후를 설명한 가운데 진술에만 초점을 맞췄지만, 2심은 “술에 취해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 앞뒷부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해자의 진술을 포함해 다른 객관적 증거가 피고인의 범행을 증명한다면 자신도 이를 인정하겠다는 진술이다. 대략 이와 같은 방법으로 범행이 이뤄졌을 것이라는 추측을 피고인이 밝혔을 뿐이다.” 이상용은 1심에서부터 그렇게 주장했다. “실제로는 범행 기억이 없는데 검찰 수사관이 경찰 조서를 근거로 추궁했다. 그런 것 같다고 했더니 검사가 내가 구체적으로 진술한 것처럼 조서를 작성했다.”
미국·독일과 달리 우리나라 법원은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를 법정 증거로 인정한다. 하지만 수사기관이 변호인의 참여가 없는 상황에서 밀실에서 주도적으로 작성한 조서는 실체적 사실을 왜곡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우선 신문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수사기관은 자연스러운 진술을 청취하기보다는 듣고 싶은 내용을 유도하며 피의자 답변을 오염시킨다. 예를 들면 ‘예’ 또는 ‘아니요’라고 단답식으로 답변하라고 요구하고는 조서에는 피의자가 개방적인 질문에 자발적으로 답변한 것처럼 꾸민다. 나중에 조서를 읽는 판사는 마치 피의자가 자유로운 신문 상황에서 생생하게 진술한 것 같은 심각한 착각에 빠질 수 있다.
둘째, 조서를 작성할 때 수정·생략을 일삼는다. 수사기관은 미리 사건 진행에 대한 그림을 머릿속에 그려놓는다. 피의자의 진술이 그 그림과 일치하면 조서에 적고, 일치하지 않으면 뺀다. 유죄 그림이 그려지도록 피의자 진술을 짜맞추는 거다.
2011년 11월 곽노현 당시 서울시교육감 재판에서 이런 사실이 드러난 바 있다. 곽 교육감의 회계책임자인 이아무개씨는 법정에서 “검찰이 조사 도중 쉬는 시간에 나눈 개인적 대화를 조서에 남겼다”고 증언했다. 검찰은 이를 반박하며 영상녹화물을 공개했다. 법원이 영상녹화물을 분석해보니 이씨의 진술과 검찰 조서는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주요 진술은 누락되고 답변 순서도 뒤바뀌어 편집돼 있었다. 곽 교육감의 변호인은 “(검사가) 멋대로 작성한 조서가 분명하다”고 비판했다. 법원은 조서를 증거로 채택하지 않았다.
영국, 되감기 기능 없앤 녹음
영상녹화물은 조서보다 분명 장점이 있다. 재판이 1년 뒤에 진행되더라도 피의자나 참고인의 초기 진술을 판사가 현장감 있게 확인할 수 있다. 대화 내용뿐만 아니라 진술 태도, 표정, 몸동작 등을 정확히 볼 수 있어 언어진술의 오류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만큼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 데 한 발짝 나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수사 과정 전체를 녹화할 수 없다면 한계가 있다. 자백을 이끌어낸 과정은 모두 생략된 채 자백하는 영상만 수사기관이 녹화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녹음·녹화의 편집 조작 위험성이 지적되자 되감기 기능을 녹음기에서 제거했다. 동시에 두 개의 채널을 설정해 한쪽에는 신문과 답변을, 다른 쪽에는 시간의 경과를 기록해 편집이나 조작을 방지했다.
박노섭 한림대 교수(법행정학)는 “검찰의 피의자 신문조서에 법원이 증거능력을 부여하면서 자백 위주의 수사와 조서 재판이 보편화됐다”고 지적했다. 2008년 경찰청 범죄분석을 보면, 형사사건에서 피의자가 자백하는 비율은 77.1%인데, 일부 자백(17.7%)까지 합치면 피의자 94.8%가 경찰 수사 단계에서 자백한다. 문제는 자백이 늘 진실하지는 않다는 점이다. 1심 유죄·2심 무죄로 엇갈린 강력사건 540건(1995~2012년)을 분석해보니 피고인이나 공범이 허위 자백한 비율이 31.5%나 됐다. 그럼에도 법원은 검찰 조서에 의존한 재판을 고수하고 있다.
조서 재판은 일제강점기 때 우리말을 모르는 일본인 판사가 법정에서 피고인의 증언을 무시한 채 수사기관이 일본어로 작성한 조서만 보고 재판하던 관행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한 부장판사의 솔직한 고백이다. “수사 과정에서 한 번 자백한 피고인은 법정에서 무죄 주장을 하고 싶어도 무죄판결을 기대하는 게 어려워 자포자기 상태에서 법원의 선처만 기대하는 경향이 있다. 법원도 수사기관의 조서 내용이 약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어도 증인들이 종전 진술을 번복할 가능성을 보이지 않으면 일단 유죄의 심정을 형성하고 양형에서 참작하는 식으로 재판을 진행해오지 않았나 생각한다.”
일제강점기 관행에서 비롯
2012년 ‘허위 자백’에 대해 국내 최초의 실증적 연구를 낸 이기수 경찰대 치안정책연구소 경찰연구관은 법원이 자백 위주의 수사 관행을 깨뜨릴 마지막 보루라고 했다. “(수사기관의) 조서에 의존해 쉽게 재판하고 조서 재판을 실제 관행화해온 주역은 법원이다. 법원이 조서 재판의 폐해를 극복하고 공판중심주의를 이끌어갈 책임을 져야 수사기관이 바뀐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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