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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어느 날 새벽 5시, 충북 청주에 사는 민지(당시 17살·가명)는 공포에 질렸다. 자고 있던 방 안으로 괴한이 침입한 것이다. 남자는 성폭행을 시도했지만 미수에 그치고 반항하는 피해자에게 전치 3주의 상처를 입힌다. 경찰 조사에서 민지는 괴한의 얼굴을 보지 못했고 목소리만 들었다고 진술한다. 방 안에서는 발자국과 머리카락·음모 등이 발견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검사 결과 머리카락에서 15개 유전자좌(염색체에서 특정 유전자가 차지하는 위치)가 검출됐으나 이는 피해자의 것이었다. 나머지 음모 1점에서는 15개 유전자좌 가운데 7개가 검출됐는데 앞서 감정 의뢰가 들어온 적이 있는 김우진(가명)의 구강 채취물에서 검출한 유전자형과 일치했다. 대전에 살고 있는 김우진은 범행이 일어난 날짜와 시간에 청주에 간 적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1심 재판부는 7개 유전자좌가 일치하는 경우는 5억8천만 명 가운데 1명에 불과하다며 유죄를 선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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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항소심 판결은 달랐다. 항소심 재판부는 김우진에게 무죄판결을 내린다. 유전자 검사 결과로 피고인이 유죄임을 입증하려면, 우선 감정 자료(음모)가 범행 과정에서 범인의 몸에서 나온 것이어야 한다. 또 범행과 관련된 장소에서 감정 자료가 수집돼야 함은 물론이다. 이런 자료는 감정기관에 전달돼 최종분석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적절하게 관리·보존돼야만 한다. 그러나 수사기관은 증거 수집 및 관리에 소홀했다. 우선 피해자는 피고인이 하의를 벗었는지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고 했다. 경찰 현장 감식 요원은 방 안에 있는 모발과 음모를 전부 수거해 편지 봉투에 넣었다고 말했으나 사진 촬영을 따로 하지는 않았다.
경찰이 사건 당일 작성한 현장임장일지에는 모발 약 20수를 수거한 것으로 쓰여 있고 국과수 감정의뢰서엔 감정물을 ‘모발 등’이라고 기재했다. 재판부는 범행 현장에서 음모가 채취됐는지, 채취된 모발이 몇 개인지 명확하게 알 수 없었던 것이다. 또 경찰이 현장 수사를 진행하는 동안 모발 및 음모를 넣은 봉투는 열려 있었으며, 사무실에 돌아온 뒤 봉투 안 모발·음모 개수를 확인하고 봉투를 밀봉했다. 법원은 “제3의 경로로 감정 자료가 봉투에 들어갔을 가능성을 배제하지 못한다”며 “음모에선 유전자좌 탈락 현상이 있었는데 이는 DNA가 변형돼 불완전한 상태이거나 DNA 양이 적어 최적의 실험 여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경우에 발생할 수 있으므로 사건 발생 한참 전에 사람의 몸에서 떨어져나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또 범행이 일어난 시간에 대전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김우진의 주장에 신빙성이 있다고 보았다. 통화 발신지 조회 결과, 범행이 있던 전날 밤 9시와 다음날 아침 9시 즈음 그는 대전에 위치한 기지국을 통해 전화를 걸었다.
김우진은 유죄인가 무죄인가. 은 두잇서베이와 함께 10대 이상 4273명에게 이 사건과 비슷한 상황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피고인에게는 알리바이가 있다. 그러나 범행 현장에서 피고인의 것으로 추정되는 DNA가 발견됐다면 피고인은 범인일까?” 매우 그렇다(10.3%)·그렇다(43.9%) 등 유죄 취지의 판단을 내린 이가 전체 응답자의 절반을 넘었다. 같은 상황에서 DNA 대신 지문이 발견됐다면? 피고인이 범인일 거라고 추정한 이는 전체 응답자의 40.1%였다. 범인이 아닐 것이라고 판단한 응답자는 39.9%였다. 지문보다 유전자 감식* 결과를 더 신뢰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유전자 감식은 과학적으로 정확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런 검사 결과만으로 누군가를 범인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간혹 범행 현장에선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들의 DNA가 발견되기도 한다. 어느 법과학자는 이런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안양 예슬양 사건 때 용의자의 DNA가 발견될 것으로 추정되는 증거물이 1t 가까이 들어왔는데, 완벽한 유전자가 딱 하나 검출됐다. 그런데 이 유전자의 주인공은 현장 과학수사 요원이었다.”(법과학을 적용한 형사사법의 선진화 방안1·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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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NA와 마찬가지로, 사건 현장에 핏자국이 있다고 해서 그 핏자국의 주인을 범인으로 단정할 수는 없다. 2010년 겨울, 김근수(당시 50살·가명)는 실랑이를 벌이다 넘어진 동료의 가슴과 배를 발로 밟아 숨지게 했다는 혐의로 1심에서 징역 3년형을 선고받는다. 사건 현장인 민박집 방 벽면과 피해자의 양손에서 혈흔이 나왔는데, 이는 김근수의 혈흔과 DNA형이 일치했다. 김근수는 피해자가 민박집으로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고, 벽에 묻은 피는 다른 동료가 어깨를 밀어 넘어지면서 벽과 부딪친 흔적이라고 주장했다. 항소심 재판부는 피고인의 혈흔이 반드시 폭행 과정에서 나온 것이 아닐 수 있고, 피고인에게만 혐의를 두고 현장에 있던 제3자에 대해서는 제대로 수사하지 않았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2009년 일본에서는 약 20년 전 최초의 DNA 과학수사로 붙잡은 범인이 사실은 억울하게 누명을 쓴 것으로 밝혀진다. 과학 증거의 오류 가능성을 제대로 살피지 않아 벌어진 비극이었다. 1990년 도치기현 아시카가시에서 4살짜리 여자아이가 살해되는데 이 사건의 용의자로 스가야 도시카즈(당시 45살)가 지목된다. 아이 옷에 묻어 있던 정액에서 검출된 DNA가 그의 DNA형과 일치했기 때문이다. 스가야는 결백을 주장했지만 결국 무기징역형을 선고받는다. 17년간 감옥에 갇혀 있던 그는 유전자 재감정을 통해 누명을 벗게 된다.
유전자 감식이 등장하기 전까지 개인을 식별하는 가장 과학적인 방법으로 여겨진 것은 지문 감정이다. 지문 감정 역시 현장에 남겨진 지문과 용의자의 지문을 비교해 두 지문 사이의 동일성 여부를 확인하는 방식이다. 법심리학 전문가인 박광배 충북대 교수(심리학)는 지문 감정이 생각보다 복잡한 작업이라고 설명한다. “사건 현장에 깔끔하게 남겨진 지문은 거의 없다. 사람이 유리를 잡았을 때, 옷을 잡았을 때 등 다양한 상황에서 어떤 지문이 찍히는지, 한 사람의 지문이 얼마나 다양하게 나올 수 있는지 등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필요하다.”
미국 수사 드라마 <csi>에서는 사건 현장에 있던 지문을 현재 지문으로 시각화해 기계에 입력하면 바로 지문의 주인공이 누군지 드러난다. 그러나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장면이다. 현장 지문과 가장 유사한 지문이 시스템을 통해 걸러지면, 사람이 두 지문 사이에 일치하는 특징을 찾아내는 방식으로 감정이 이루어진다. 지문을 대조하는 사람의 경험이나 기술에 따라 오류가 존재할 수 있다.
2004년 미국에서는 지문 감정의 신뢰성이 뿌리째 흔들리는 사건이 터진다. 그해 3월 스페인 마드리드에서는 통근열차 폭탄 테러사건이 발생한다. 미국 연방수사국(FBI)은 사건 현장 주변에서 발견한 지문을 근거로 변호사 브랜던 메이필드를 체포한다. 그러나 스페인 경찰은 FBI가 감정한 지문의 주인공이 따로 있다고 발표한다. 미국은 지문 감정에 오류가 있음을 인정했고 메이필드는 석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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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어나는 거짓말탐지기 검사, 증거 능력 없어
이후 미국에서는 과학수사의 결함을 검토하게 된다. 2009년 미국과학학술원(NAS)은 ‘미국의 법과학 강화: 앞으로의 방향’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핵 DNA 분석을 제외하면 어떤 법과학적 방법도 증거물과 개인 혹은 출처를 연관짓는 데 높은 확실성을 가지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밝혔다. 2006년부터 3년간 연방기관 직원, 학자 및 연구자, 과학자, 변호사, 공공 사법기관 요원들이 머리를 맞대고 연구해 내놓은 결론이다. 이들이 검토한 법과학은 실험실에서 분석이 이루어지는 DNA 분석, 화학물질이나 화재 및 폭발 분석 등과 전문가가 특정 패턴을 관찰해 해석하는 지문, 총기 검사, 치흔, 족적이나 필체 감정 등이었다. 특히 패턴 분석을 기반으로 하는 법과학은 범죄를 해결하는 도구로 사용돼 발전해왔지만 정확성 검증 등 제대로 된 과학적 평가를 받지 않았다.
과학적이라고 여겼던 증거로 인해 되레 억울한 누명을 쓴 사례도 속속 나타났다. 2009년 브랜든 개럿 미국 버지니아 법대 교수는 1989년 이후 면죄받은 사건 200건을 분석했다. 이 가운데 과학적 증거를 잘못 사용한 사례는 113건(56.5%)이었다. 이런 사건에서는 혈액형·모발비교·치흔·지문·족적 검사 등이 증거로 활용됐다.
살인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면죄된 레이 크론은 과학수사의 함정에 빠졌다. 1991년 미국 애리조나주의 한 술집에서 36살 여자가 숨진 채 발견된다. 피해자의 몸에서 잇자국이 발견됐는데, 전문가들은 술집 단골인 크론의 이빨 모양과 일치한다고 증언했다. 크론은 1996년 재심을 청원했으나 치흔 전문가들의 증언으로 인해 다시 한번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다 2002년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타액과 혈흔에 대한 유전자 감식을 했는데 크론의 것이 아니었다. 10년 만에 크론은 석방된다. 육안으로 모발을 비교분석하는 것도 오류율이 최대 67%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는 등 정확성에 의문이 제기됐다.
국내 수사기관에서는 거짓말탐지기 검사를 광범위하게 활용하고 있다. 경찰청 통계를 보면 거짓말탐지 의뢰 건수는 2002년 2385건에서 2011년 3952건으로 늘었다. 거짓말탐지기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거짓말을 하면 탄로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긴장·초조·공포·두려움 등의 감정이 생기는데 이런 감정 변화가 신경계 및 호르몬 작용에 의해 생리 변화를 일으킨다는 데 근거를 두고 있다. 독일은 거짓말탐지기를 사용하되 법정에서 증거로 인정하지 않는 편이다. 정확성과 상관없이 기계가 인간 심리를 검사하는 것은 인격 침해이며 인간의 가치를 부정하는 신문 방법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재판부에 따라 증거능력을 인정하기도 하지만, 정확성을 놓고서는 여전히 논란이 많다. 1970년대 한국에서는 거짓말탐지기 검사 결과가 증거능력을 인정받았으나 1983년 대법원 판례 이후로 정확성을 의심해 증거로 채택하지 않는 편이다.
2011년 대전고법 청주재판부는 2년 전 어머니를 살해한 혐의로 유죄를 선고받은 김아무개(당시 40살)씨에 대한 파기환송심에서 무죄를 선고하며 수사기관이 제출한 행동분석·진술분석 결과 통보서를 유죄 증거로 활용하는 데 한계가 있다고 언급했다. “행동분석 결과는 통계학에 기초하고 있는데 거짓말을 하거나 진실을 은폐하려 할때 관찰되는 얼굴 표정이나 행동이 분석관에 의해 항상 일률적으로 해석된다고 단정할 수 없어 행동분석관의 의견에 불과하다”고 설명했다. 진술분석 역시 피고인의 심리적·육체적 상태를 관찰해 진단한 결과이므로 범행에 대한 직접적 증거로 볼 수 없다고 판시했다.
미국은 60%에서 “분석관 증언에 문제 있다”
<csi> 속 길 반장은 언제나 냉철하다. 좀처럼 실수는 하지 않을 것 같은 인상이다. 2011년 강지현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연구위원과 김민지 숙명여대 교수(사회심리학)는 경찰청, 대검찰청 디지털포렌식 센터, 국과수, 국방부 조사본부 과학수사연구원 증거분석관 등 123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 ‘과학적 증거와 판단의 오류: 증거분석관을 중심으로’라는 보고서를 작성했다. 법정에서 증언을 해본 분석관 38명 가운데 ‘피고인이 범인’임을 단정하는 의견을 유도받거나 요청받은 경험이 있다고 답한 이는 12명이었다. ‘법과학 증거 문제로 인해 한국에서도 오판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느냐’는 질문에 22명의 응답자 중 10명이 ‘가능성이 있다’고 답했고 8명은 ‘가능성이 매우 낮다’는 반응을 보였다.
2009년 브랜든 개럿 교수와 변호사 피터 뉴펠드가 법과학 증거분석관의 증언 때문에 잘못된 유죄판결을 받은 156건 가운데 137건의 재판 속기록을 입수해 내용 분석을 한다. 이 가운데 82건(60%)에서 검찰 쪽 증인인 법과학 증거분석관의 증언에 문제가 있었다고 밝혔다. 인간이면 어쩔 수 없이 갖게 되는 확증 편향*과 같은 선입견 때문에 실수를 할 가능성도 있다. 지난해 미국 법무부와 FBI는 소속 과학수사 연구소에서 실시한 검사를 재검증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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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현정 기자 saram@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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