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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추정의 원칙 유죄추정의 덫

등록 2013-04-13 15:23 수정 2020-05-03 04:27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color="#991900">판사가 유죄판결을 하려면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명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설령 유죄라고 의심되더라도 무죄를 선고해야 한다. 유죄판결을 내릴 수 있는, 합리적 의심의 여지가 없는 증명을 수치로 표시하면 얼마나 될까? 한국 판사들은 평균 89.35%라고 답했다(‘민사·형사재판에서의 입증 정도에 대한 비교법적·실증적 접근’ , 설민수·2008). 유죄 증거가 압도적이더라도 무죄 가능성이 다소 있으면 무죄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얘기다. 헌법이 보장한 ‘무죄추정의 원칙’ 때문이다. 불행히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1995년부터 2012년 8월까지 1심에서 유죄판결을 받았지만 2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강력사건은 540건인데, 이 중 504건이 대법원에서 무죄 확정판결을 받았다(‘무죄판결과 법관의 사실인정에 관한 연구’ , 김상준·2013). 이들 사건의 1심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지켜내지 못했음이 분명하다. 왜 그랬을까? 인간이 흔히 범하기 쉬운 판단 오류에서 판사도 자유롭지 못한 탓이다. ‘유죄추정의 덫’을 기획 연재 네 번째 이야기로 다룬다. 이름은 모두 가명이다. _편집자</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일러스트레이션/ 조승연

2004년 1월9일 대구고법은 남편을 살인했다는 이유를 들어 아내에게 징역 5년을 선고했다. 뇌손상 탓에 몸 왼쪽이 마비되고 오른쪽 눈을 실명한 아내는 흐느꼈다. “여보, 제발 기억 좀 나게 해줘요. 기억나서 억울한 누명 벗고 아이들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줘요.”

남편 손용우(사고 당시 37살)와 아내 조경미(32살)는 부부 공무원이었다. 직장 동료의 소개로 만나 사귀다 1991년 5월에 결혼해 이듬해 9월 쌍둥이 딸을, 1994년 10월 아들을 낳았다. 경북 경산시에서 시어머니(58), 시동생(28·경찰)과 함께 살던 부부는 2000년 10월27일 비극을 맞는다. 이날은 시할머니의 제삿날이었다. 아내는 일찍 귀가해 음식 준비를 했다. 남편은 저녁 식사 모임에 참석했다가 밤 9시20분께 돌아왔다. 시동생은 야간근무로 오지 못했지만 다른 가족은 제사를 지내고 음식을 나눠 먹었다. 아이들이 먼저 잠이 든 뒤 밤 12시께 아내가 설거지를 마치고 불을 껐다.

<font size="3">119구급대보다 2시간이나 늦은 경찰</font>

새벽 4시30분 화장실을 가려고 나온 시어머니는 피를 흘리는 아들 부부를 발견한다. “절단 났심더, 빨리 와 보이소.” 시어머니는 119구급대에 다급한 목소리로 신고했다. 이웃에도 도움을 구해 위아랫집 사람들이 몰려왔다. 속옷만 입은 남편은 얼굴이 피투성이인 채로 천장을 바라보며 누워 있었다. 아내는 피를 흘리며 화장실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흰색 반소매 티셔츠를 윗옷으로 입었지만 아래옷은 벗은 채였다. 새벽 4시41분 119구급대가 신발을 신은 채 집 안으로 들어왔다. 피해 정도가 심한 남편을 먼저 호송하고, 아내는 이웃이 병원으로 데려갔다. 곧이어 전화 연락을 받은 친척들이 도착했고 기력을 잃은 시어머니를 병원으로 옮겼다. 아침 6시50분 경찰이 도착했다. 범행 현장을 감식한 결과, 베란다나 창문 등이 파손된 흔적이 없었다. 집 주변을 수색하다가 혈흔이 묻어 있는 남자 바지와 망치 1개를 발견했다. 혈흔은 남편과 아내의 것이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부검한 의사는 얼굴과 머리를 최소한 9차례, 가슴을 4차례 이상 둔기로 맞았을 것으로 추정했다. 아내의 뇌손상도 심각해 뇌조직을 제거하는 수술을 2차례 받았다. 혼수상태에 빠져 20여 일 만에 깨어났다. 하지만 여전히 심한 가면상태(외부 자극에 반응하지만 자꾸 자려는 의식)였다. 경찰은 11월23일부터 12월11일까지 아내를 신문했다. 메모를 적어 필담을 나누었고 이를 토대로 피의자 신문조서를 작성했다. “제사를 지내고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이 느닷없이 베란다에서 손잡이가 나무로 된 망치를 들고 와서 내 얼굴을 2차례 내리쳤다. 그 충격으로 정신을 잃고 기절했다. 얼마 뒤 깨어나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봤더니 피가 나고 있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 남편을 살해하기로 마음먹었다. 거실에 있던 망치를 들고 방에 들어가 침대에 누워 자던 남편의 머리를 2대 때렸다.” 남편을 살인했다는 자백이었다. 그러나 이후 검찰과 법정에서 범행을 전면 부인했다. “사건 당시 상황이 기억나지 않는다.”

2004년 1월 1심 법원은 유죄판결을 했다. “의문점이 있지만 제3자가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희박하고 피고인(아내)이 경찰에서 자백했다. 범행 도구인 망치와 피해자(남편) 바지와 피고인의 속옷에서 부부의 혈흔이 동시에 발견돼 서로 때렸을 가능성이 충분하다.” 그로부터 1년5개월간 사건을 다시 심리한 2심 법원은 2005년 6월16일 제3자의 침입으로 인한 강도살인이라며 무죄로 뒤집었다. 근거는 이렇다. 첫째, 범행 도구인 망치는 부부의 집에서 사용하는 게 아니었다. 머리나 나무자루의 용접, 드릴 흔적으로 볼 때 공장이나 작업장 등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사용한 것으로 추정됐다. 둘째, 남편의 바지 속에 들어 있던 지갑이 없어졌다. 지갑에는 공무원증과 신용카드가 들어 있었고 남편은 사건 당일까지 그 신용카드를 사용했다. 셋째, 경찰수사 때 자백했지만 당시 아내의 기억은 불명료했다는 의학적 진단이 나왔다. 뇌의 일부를 잘라내는 수술을 한 경우 뇌손상 직전·직후 상황을 기억하지 못할 수 있다. 넷째, 남편은 최소 13차례 이상 둔기로 맞았고, 그 피가 천장이나 커튼까지 튀었는데 심각한 뇌손상으로 실신했던 아내가 그럴 힘이 있는지 의심스럽다.

<font size="3">공장용 망치·남편 지갑 도난은 무시</font>
956호 기획연재

956호 기획연재

2심이 밝힌 무죄 근거를 왜 1심은 보지 못했을까? 우선 ‘터널비전’ 탓이다. 마치 자동차를 타고 터널 속으로 들어가면 터널 안만 보이고 터널 밖은 보이지 않는 현상과 같은 원리인데, 인간의 타고난 인지적 선입견(Bias)을 말한다. ‘확증편향’이 대표적이다. 확증편향이란 현재 믿음과 기대, 가설을 지지하는 증거를 찾고 반대되는 증거를 무시하는 현상을 말한다. 형사사법제도에서 확증편향에 빠지면 유죄를 입증하는 증거만 선별적으로 걸러져 눈에 들어올 뿐, 유죄 초점을 흐리는 다른 무죄 증거들은 무시되거나 억제된다.

경산 ‘뇌손상 아내’의 남편 살인사건은 첫 단추가 잘못 끼워졌다. 경찰은 초동수사에서 사건 현장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했다. 이웃들과 119구급대보다 경찰이 2시간이나 늦게 출동했기 때문이다. 외부자 범행의 단서를 찾는 게 어려워진 경찰은 ‘내부자 범행’이라는 가설을 세운다. 나이 든 어머니와 어린아이들, 알리바이가 확실한 경찰 시동생을 제외하자 아내만 남았다. 뇌손상으로 기억이 혼미한 아내를 계속 찾아가 유도·반복 신문 끝에 자백을 받아낸다. 1심 법원도 ‘내부자 범행’이라는 가설을 받아들여 유죄판결을 내렸다. 형법상 경찰에서의 자백은 법정에서 뒤집으면 증거로 채택할 수 없는데도 아내의 자백을 과대평가했다. 반대로 ‘내부자 범행’ 가설에 어긋나는 공장용 망치, 남편 지갑 도난 등의 증거는 무시했다.

확증편향이 더욱 심해지면 무죄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가 있어도 유죄 판단을 고수한다. 2006년 5월 이수현(당시 18살)은 특수강도죄로 붙잡혔다. 2005년 10월과 2006년 3월 울산 중구의 한 모텔에서 출장마사지를 불러 성관계를 맺고 흉기를 들이대 현금을 빼앗은 혐의였다. 경찰 조사에서 이수현이 본드를 흡입한 적이 있다고 진술하자 성폭력 범죄를 추궁한다. 같은 지역에서 본드 환각 상태에서 강도치상·특수강간 범죄가 2건 발생했지만 범인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경찰은 범인이 검거됐다며 피해자들을 경찰서로 불러 이수현의 사진을 보여줬다. “범인일 가능성이 70∼80%다.” 다른 객관적 증거가 없는데도 피해자의 불확실한 범인 지목 진술만으로 1심과 2심 법원은 유죄로 인정했다. 하지만 대법원은 달랐다. 이수현의 유전자형이 진범의 정액에서 나온 것과 다르다는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DNA 분석 결과를 1심·2심 법원이 무시한 잘못을 지적하며 무죄판결을 했다. “유전자형이 다르면 동일인이 아니라고 확신할 수 있다는 게 유전자 감정 분야의 전문지식이다. DNA 분석 결과는 피고인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는 유력한 증거에 해당한다. 합리적 의심을 할 여지가 없을 정도로 (유죄) 증명이 됐다고 볼 수 없다.”

한발 더 나아가면 강력한 무죄 증거를 은폐하기도 한다. 1996년 10월 김승환(당시 23살)은 서울 영등포구 대림동 주변의 가정집에 새벽에 흉기를 들고 침입해 남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성폭행한 혐의로 경찰 조사를 받았다. 경찰이 보여준 전과자 영상 시스템을 보고 피해자가 그를 범인으로 지목해서다. 김승환은 2년 전 강도강간 혐의로 기소됐다가 무죄를 받았지만 경찰서에는 전과자로 기록이 남아 있었다. 지능지수(IQ)가 71인 김승환은 소심하고 내성적이며 융통성과 판단력이 부족했다. 이런 특징이 유죄 피의자임을 시사하는 행동이라고 검찰은 밝혔다. “검사가 조사할 때 고개를 숙이고 눈을 깜박거리며 사건 설명을 하면 귀를 기울였다. 스트레스를 주는 질문에는 경동맥이 뛰고 손을 만지작거렸다. 검사가 의자를 밀착하자 뒤로 피하고 얼굴이 상기됐다.”

<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E7E7E2"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F7F6F4"><tr><td class="news_text02" style="padding:10px"><font color="#877015">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유죄편향성이 짙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분명히 있다. 형사사건에서 완벽한 증거를 다 갖추라고 요구하는 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형사 분야의 전문가인 검사가 1차로 걸러낸 사건이니까 검사의 판단으로 기울어질 여지도 있다.</font></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font size="3">재판 경험 많을수록 유죄 선고 경향 높아</font>

검찰은 결정적 증거를 숨기고 있었다. 사건 발생 당시 피해자는 진범의 정액이 묻은 것이라며 속옷을 제출했다. 정액 및 분비물을 감정한 결과 진범의 혈액형은 O형으로 확인됐다. 김승환은 A형이었다. 좀더 정확한 판별을 위해 경찰은 DNA 분석을 의뢰했다. 1심이 진행 중이던 1996년 12월 국과수는 김승환과 진범의 유전자형이 전혀 일치하지 않는다는 유전자 감정 결과를 보내왔다. 검찰은 경찰로부터 감정 결과를 보고받고도 법원에 제출하지 않았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1심 법원은 1997년 4월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다행히 2심 법원이 국과수에 사실 조회를 해서 이 사실을 알아냈다. 무죄가 확정됐고 김승환은 국가를 상대로 손해배상을 청구했다. 대법원은 국가가 2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검사는 공익의 대표자로서 피고인의 정당한 이익을 옹호할 의무를 지닌다. 수사 및 공판 과정에서 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가 발견됐다면 피고인의 이익을 위해 이를 법원에 제출해야 한다. 무죄를 입증할 결정적 증거를 은폐한 검사의 행위는 위법하다.”

유죄추정의 덫을 이끄는 또 다른 힘은 ‘암묵적 편향성’이다. 사법연감을 보면, 2011년 무죄율은 1심이 6.2%, 2심이 7%였다. 형사사건 100건 중에서 무죄판결이 6∼7건에 그친다는 뜻이다. 유죄판결이 압도적으로 많은 이유가 판사들이 유죄편향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형사사건은 대부분 범죄 증거가 확실하다. 이를테면 현행범이거나 물증과 목격자가 분명하고 피고인의 자백이 있다. 판사는 유무죄를 다투기보다는 주로 양형만 심사할 때가 많다.

다른 한편으로는 재판 경험이 쌓일수록 유죄편향성이 짙어진다는 연구 결과가 분명히 있다. 형사사건에서 완벽한 증거를 다 갖추라고 요구하는 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형사 분야의 전문가인 검사가 1차로 걸러낸 사건이니까 검사의 판단으로 기울어질 여지도 있다. 게다가 과업에 시달리는 상황이라 더 편하고 쉬운 쪽으로 결론을 내고 싶은 유혹을 느끼기도 한다. 유죄판결문에 비해 무죄판결문은 작성하기가 훨씬 복잡하고 어렵다. 이렇게 암묵적으로 심어지는 유죄편향성이 의식·의지와는 무관하게 판사의 유무죄 판단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실제로 판사가 배심원보다 유죄편향적이고 피고인에게 덜 유리한 결론을 내리는 경향이 있음이 분석 결과 확인됐다. 2008~2010년 국민참여재판 사건(323건)을 분석해보니, 배심원의 무죄율(28.5%)과 피고인 주장 수용률(41.5%)이 판사보다 유의미하게 높았다. 배심제 역사가 오래된 미국에서도 비슷한 연구 결과가 많이 나왔다. 특히 배심원이 판사처럼 재판 경험을 거듭하면 유죄편향성이 높아질 수 있다는 연구도 있다.

초동수사에서 사건 현장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면 범행의 단서를 찾기 힘들다.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사건의 피의자인 김길태가 현장검증에서 범죄 재현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초동수사에서 사건 현장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하면 범행의 단서를 찾기 힘들다. 부산 여중생 납치 살해사건의 피의자인 김길태가 현장검증에서 범죄 재현을 하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유죄추정의 원칙을 진화심리학적 관점으로도 설명한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저지르는 판단 오류는 생존에 적합한 방향으로 선택되는 진화의 산물인데, 유죄 오판이 그렇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어떤 마을에 이방인이 들어왔는데 마을 사람들이 최근 일어난 살인사건에 그가 연루됐다는 의심을 품고 있다. 많은 사람이 그를 범인이라고 의심하면 덩달아 의심해 조심하는 게 그와 가까이하는 것보다 상식적으로 나은 선택이다. 실제로 그가 연쇄살인범인데도 확증이 나올 때까지 무고한 사람이라고 판단하면 그 오판 탓에 자신의 생명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무죄 오판보다 유죄 오판이 자기보호 본능에 충실하다는 설명이다.

<font size="3">“무죄 선고는 사람 한 명을 창조한 것”</font>

고 유병진(1914∼66) 판사는 “무죄의 선고, 그것은 암흑 지옥에서 사람을 구해낸 기분이다. 아니 이 세상에서 한 사람을 창조해낸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무죄추정의 원칙을 구현하는 게 그만큼 가치 있고 또 어려운 일이다. 인간의 직관과 충동, 심리적 게으름을 극복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법심리학자들은 그 첫걸음으로 자신의 판단을 과신하지 않는 자세를 꼽았다. 연구 결과를 보면, 자신의 판단과 반대되는 입장에 서서 다른 결론을 내리고 그 근거를 따져보는 것만으로도 터널비전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다. 암묵적 편향성에서 벗어나는 방법도 비슷하다. 2008년 미국 판사 133명(백인 85명, 흑인 48명)을 대상으로 인종적 편향을 조사했더니 백인 판사 87.1%가 백인 선호 경향을 보였다. 보통의 미국인들과 다를 바 없는 암묵적 편향이다. 이는 놀랍게도 재판 결과에는 전혀 다른 영향을 끼쳤다. 백인 선호 경향이 큰 백인 판사일수록 흑인 피고인보다 백인 피고인에게 더 유죄판결을 많이 내렸다. 자신의 인종적 편향성이 편파적인 재판 결과를 이끌지 않는지 스스로 의심하면 암묵적 편향이 상쇄될 수 있다는 얘기다.

정은주 기자 ejung@hani.co.kr<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tr><td height="22px"></td></tr><tr><td bgcolor="#DFE5CE" style="padding: 4px;"><table border="0px" cellpadding="0px" cellspacing="0px" width="100%" bgcolor="#EBF1D9"><tr><td class="news_text03" style="padding:10px"><font size="4">판사를 좌지우지하는 검사</font>
<font color="#1153A4">초깃값에 의존하는 ‘정박효과’</font>
실험 연구 결과를 보면, 유능한 판사라도 예견된 오류를 범한다. 판사라면 그런 실수를 피할 수 있다고 일반인들은 기대하지만 말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정신적 축약에 의존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복잡한 결정을 내릴 때 종종 나타나는 현상으로 ‘휴리스틱’(Heuristic)이라고 부른다. 문제를 해결할 때 검증이 다소 부족하지만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정보에 의존하는 전략이다. 예를 들면 경험에 따른 추측이나 직관적 판단 또는 상식 등이다. 휴리스틱은 대부분 올바른 판단을 하는 데 도움이 되지만 때로는 인지적 착각을 만들기도 한다.
판사에게 나타나는 휴리스틱으로는 ‘정박효과’가 대표적이다. 정박효과란 사람들이 수치화된 값을 추정할 때 초깃값에 의존하는 현상이다. 집값을 추정할 때 공시지가를 고려하는 식이다. 문제는 얼토당토않은 초깃값도 판단에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박광배 충남대 교수(심리학)가 2004년 2월 형사재판을 맡은 판사 158명을 대상으로 정박효과가 발생하는지 확인했다. 우선 판사들을 세 그룹으로 나눠 법정형이 5년 이상인 형법상 강간치상 사건을 동일하게 제시했다. 첫째 그룹에는 검사 구형을 2년으로, 두 번째 그룹에는 검사 구형을 10년으로 하고 세 번째 그룹에는 검사 구형에 관한 언급을 하지 않았다. 연구 결과, 검사가 10년을 구형하거나 구형하지 않은 경우에는 양형 평균이 57.2개월과 57.5개월로 비슷했다. 하지만 검사 구형 2년 그룹의 평균은 42.5개월로 큰 차이를 보였다. 검사의 2년 구형은 법적으로 불가능할 정도로 낮은데도 판사의 양형 판단에 영향을 끼친 것이다.
실제로 검사의 말만 믿고 오판한 사례가 있었다. 2010년 10월 1심 법원은 이종사촌 누나(사고 당시 23살)를 성폭행한 혐의로 신용하(21살)에게 2년6개월의 징역형을 선고했다. 검사가 항소했는데 그 이유가 이례적이었다. 재판장이 법정에서 1년6개월의 징역형이라고 선고했는데 판결문에는 징역 2년6개월로 잘못 기재돼 있다는 게 이유였다. 피고인도 같은 주장을 했다. 2심 법원은 2011년 1월 검사가 제출한 공판카드 등을 증거로 1심 판결을 직권파기했다. 1심이 판결문 기재와 다른 형을 선고했다며 징역 2년형을 다시 선고했다. 그러나 뒤늦게 법정 녹음을 확인해보니 1심 재판장이 법정에서 징역 2년6개월을 선고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2심은 이를 확인하지도 않았다. 판사와 검사의 특수한 관계를 짐작하게 한다.</td></tr></table></td></tr><tr><td height="23px"></td></tr></t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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