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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포사회의 침묵이 깨졌다



보수적인 미국 한인사회에 시민정치 가치 일깨운 노무현의 죽음… 대중 향해 연대하는 신선한 변화
등록 2010-05-20 16:10 수정 2020-05-03 04:26
지난해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미국 LA 한인타운의 한 교회에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다. 연합뉴스

지난해 5월29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맞아 미국 LA 한인타운의 한 교회에서 4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추모의 밤’ 행사가 열렸다. 연합뉴스

그는 아직도 ‘검은 리본’을 차에 달고 다닌다. 다양한 피부색의 이웃들이 리본의 뜻을 알아줄 리 없다.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떼지 않았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이후부터다. 김인수(42)씨는 말했다. “그에 대한 평가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제 인생은 많이 달라졌습니다.”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 거주하는 한인 시민권자다. 지난 1월 한국의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미국 원정 투쟁을 동행 취재하면서 만났던 이다. 인연 없는 노동자들의 시위 현장에서 김씨도 함께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동포 사회 흔든 ‘미스터 프레지던트의 죽음’

이역만리에서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은 현재형이다. 동포사회의 수도라 할 LA만 보더라도, 특히 서거 국면을 계기로 파편화됐던 동포들의 결속과 연대가 더 강화되고 있다. 외견상 합리적·진보적 가치를 지향하는 이들이다. 이례적이다. 보수 일변의 동포사회에서 자·타의로 성향 따위를 감춰오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던 이들이다. 선진국에선 경험하기 어렵던 ‘미스터 프레지던트의 자살’이 많은 이들을 깨우고 집 밖으로 떠민 셈이다.

지난해 5월 초 미국 한인사회 최초로 ‘생협’이 생겼다. LA 인근 오렌지카운티 풀러턴시에 터 잡은 ‘가주생협’이다. 동포 120명가량이 회원이다. 몇 달 앞서 LA 한인타운에선 공동 육아를 하는 ‘나눔문화학교’도 시작됐다. 현재 스물세 가족이 참여 중이다. 김인수씨는 올 2월 ‘유학생권익센터’를 만들었다. 다들 해외 동포사회 최초라 해도 아주 틀리진 않다. 각개의 모임은 ‘노무현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노사모)의 변이가 아니다. 서거가 이들을 직접 발아시킨 것도 아니다. 하지만 서거 국면에서 각 단체는 중소 규모의 틀을 완성했다. 무엇보다 동포사회에서 전거가 드물던 ‘풀뿌리 시민정치’의 가치를 자각시키는 대마루판이 됐다.

‘동지’들의 커밍아웃이 큰 힘이 됐다. 뿌리를 추적하자면, 지난해 5월 LA와 풀러턴시에 차려진 두 곳의 시민 분향소에 가닿는다. 자원봉사자만 50여 명이 몰렸고, 이레 동안 조문객 3천여 명이 다녀갔다. 3시간 거리의 샌디에이고, 1시간이 걸리는 샌타바버라에서도 달려왔다. 누구도 예상 못한 규모였다.

“이런 곳이라도 있어서 살 것 같다.” “(여기 안 오면) 죽을 것같이 답답하고 힘들었다.” “대통령이 돌아가신 것도 힘들지만 주위 사람들의 냉소적 반응이 더 힘들다.” 생협 창립 일원으로 풀러턴시 분향소를 차리는 데 일조했던 김윤희씨가 전해준 당시 조문객들의 육성이다. 분향소는 한마디로 게토이면서 해방구였다. 김씨는 “이렇게 모이고서 그냥 흩어지면 안 된다는 열성적 동포도 꽤 많았다”며 “실제 생협 회원 70%가 분향소에서 주도적으로 의견을 주던 분들”이라고 말했다. 가치와 지향을 공유한, 그러나 만날 수는 없던 시민들을 노무현이 한자리에 불러모은 셈이다.

당연히 주류 한인사회에 대한 비판이 선행했다. 교민들은 보수성·비민주성·폐쇄성으로 한인사회를 거칠게 요약한다. 1세대 자수성가형 자영업자들이 권력을 쥐고 여론을 주도한다는 게 중평이다. 최근 LA 한인회 선거에선 스칼렛 엄 회장이 투표 없이 재선됐다. 선관위가 경쟁 후보가 선거규정을 어겼다며 자격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교민들은 “선거규정이 불합리하고 타협과 조정 자체가 미숙하다”고 지적한다. 한인회장 선거가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한 지는 오래다. 대개의 비판적 시민들은 입을 닫고, 영어 구사가 자유로운 세대는 커뮤니티를 벗어났다. ‘무관심’이다.

김윤희씨는 “분향소에만 가면 다른 세상이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10년 동안 사귈 친구를 (서거를 계기로) 1년 만에 사귀었다고 말할 정도로 서로 가까운 사이가 됐죠. 잘 어울리는 친구 20여 명은 돌아가며 식사 초대를 하고 독서 토론도 하고, 입장차도 있지만 본국 정치를 이야기합니다. 결국 동포사회도 대화 주제가 되는데, 한인 커뮤니티에 좀더 합리적인 리더가 생겨야 한다는 데 모두 동의하는 거죠.”

생활 밀착형으로 진화한 대안 모임

다양한 모임이 ‘생전’의 노무현과는 어떻게 만날까? 생협은 안전한 먹을거리를 1차 목표로 한다. 현지의 한국 농산물 생산자와 직접 거래한다. 건어물 등은 한국의 생산자를 통해 조달한다. 한인타운의 대형 슈퍼마켓을 견제한다. 김씨의 말마따나 “가격경쟁만 할 뿐, 품질경쟁은 하지 않는 독점적 유통구조”에 대한 비판이다. 공동육아는 3~8살의 2세대를 주요 대상으로 평화·통일·다민족·환경을 중점 교육한다. 학부모들이 격주로 수업을 주재한다. 5일 동안 직장생활을 한 뒤, 토요일 하루를 온전히 비운다. 김인수씨는 “(미국에서) 과거 진보는 통일민족운동 등 한국 정치·사회를 지원하는 형태였지 생활 밀착형은 아니었다”며 “비로소 시민과 함께 내 터전을 바꿔보자는 문제의식이 생겨난 것”이라고 말한다.

올 초 콜트·콜텍 해고 노동자들이 미국으로 간 이유는 본사가 참여한 현지 악기쇼에서 시위를 이어가기 위해서다. 돈 없는 노동자들이 손에 쥔 건, 귀 닫은 본사 대신 동종 업체들과 고객을 상대로 해고의 부당함을 알려야 한다는 절박함, 그리고 비행기삯이 전부였다. 이들을 현지에서 먹이고 씻기고 지원해준 이들이 공동육아 학부모였다. 생협 회원이고, 한글도 모르는 2세대로 구성된 풍물패였다. 본국에서도 조력받지 못하던 콜트·콜텍 노동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현재 LA에선 미국판 ‘수유+너머’를 지향하는 독서토론 모임도 운영된다. 모임 초기인 2008년부터 참여한 김성회(38·2001년 이민)씨는 “유의미한 대화 창구를 만들어 실제적이고 대안적인 삶까지 모색하는 지식 공동체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였다”고 말한다. 주류 사회에 대한 성찰적 대안이 이들의 공통 숙제인 것이다. 독서모임은 LA 내 다른 단체들과 연대해 ‘노무현 시민학교’를 운영 중이다. 노골적이다. 노무현 대통령 관련 책을 읽고 강좌를 듣는다. 말하자면 ‘노무현’이 곧 하나의 대안이 되는 셈이다.

LA 소재 로욜라메리마운트대학의 이종화 교수(커뮤니케이션학)는 “설립 시기나 규모, 목적이 다른 모임들이 노무현 대통령 서거를 기점으로 연대를 활성화하고 있다”며 “그 공통분모는 풀뿌리, 참여, 수평적 네트워킹”이라고 말한다. 이들 단체는 실제 추모 국면이 끝난 뒤 느슨한 연대체를 지향하는 ‘시민사회네트워크’를 만들었다.

수평을 지향하는 연대

LA 한인타운에서 18년간 노동·인권 운동을 해온 박영준 한인타운노동연대(KIWA) 소장은 “이곳에서 오랫동안 활동해온 시민단체와 서거 전후의 다양한 모임은 사상이나 뿌리의 차이가 있다”면서도 “연대하면서 (대중을 향한) 문턱이 낮아지고 폭은 넓어지며 신선한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다양한 방향성을 어떻게 조율할지는 여전히 중요하고 어려운 과제다. 당장 동포사회는 2012년부터 대선·총선 투표권을 부여하는 ‘재외동포 참정권’을 눈앞에 과제로 두고 있다. 새크라멘토주립대 교환교수로 재직 중인 이준한 인천대 교수는 지난 2월 한 칼럼에서 “(이미) 정당별 또는 국회의원별로 수시로 몰려와 동포사회를 들쑤시고 있다”며 “국회는 재외동포 관련 예산을 새로 만들거나 늘림으로써 교민 환심 사기용 실탄까지 마련해놓았다”고 말했다. 한국 정치권이 동포사회를 줄 세우면서 갈등이 조장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이종화 교수는 “시민 모임들은 내용이나 정치적 지향점보다 수평적 관계, 참여하는 주권에 주목한다”고 말한다. 시민연대가 혼탁·과열 선거전의 ‘견제장치’가 돼줄 것에 대한 기대가 있다.

이들은 LA 복판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추모식을 열 계획이다. 1년 전 이레 동안의 분향을 마치고 연 ‘추모의 밤’(2009년 5월29일) 때 상상도 못한 400명이 모였던 기억이 올돌하다. 김인수씨도 다시, 그때 쥐었던 검은 리본을 들고 갈 것이다.

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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