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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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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가고 뜻은 남았다



봉하마을에서 농사짓는 ‘진짜 바보’ 김정호 비서관… “오십 평생 해온 일 중 가장 어울리는 일”
등록 2010-05-21 21:24 수정 2020-05-03 04:26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철학과 꿈을 봉하마을에 심고 있는 김정호 비서관은 “1주기 추도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모내기철”이라며 생태농업, 경관농업으로 모범 사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철학과 꿈을 봉하마을에 심고 있는 김정호 비서관은 “1주기 추도식이 끝나면 본격적인 모내기철”이라며 생태농업, 경관농업으로 모범 사례를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1년 만이다.

5월10일 봉하마을은 분주했다. 묘역을 단장하는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를 잃은 시민들의 추모 글이 담긴 바닥돌(박석)을 깔고 있었다. 1주기인 5월23일 이곳에서 추도식이 열린다.

부엉이바위가 있는 학산과 맞은편 뱀산 사이의 너른 논엔 부지런한 농부들이 모내기를 위해 땅을 갈아엎고 있었다. 다 자라도 앳되 보이는 노랑머리 황로, 백로, 왜가리가 트랙터를 요리조리 피해가면서 뒤집힌 흙에서 먹이를 찾고 있었다. 농약을 치던 시절에는 없던 풍경이다. 그는 갔지만 여러 생명이 돌아왔다. 추도식이 끝나면 바로 모내기철이다.

평일인데도 간간이 관광버스가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가 몸을 던진 부엉이바위와 봉화대가 있던 사자바위에 올랐다. 묘역이 내려다보이는 곳에서 단체로 묵념을 하는가 하면, 부엉이바위 언저리에서 말없이 먼 하늘을 바라보는 이를 여럿 만났다. 마지막까지 그를 모셨던 김경수 비서관은 “5월 들어 가족 단위로 오거나 버스를 빌려 단체로 오는 방문객이 늘었다”고 말했다. 누가, 무엇이 그들을 부르는 것일까?

황로·백로·왜가리가 돌아온 논

사람 사는 세상을 염원한 그는 실패했다. 봉하마을을 사람 사는 동네로 만들다가 황망히 세상을 등졌다. 그가 좋아하던 민중가요 에서 따온 구절 ‘사람 사는 세상’은 1988년 국회의원 선거에 나올 때부터 캐치프레이즈로 사용했고, 떠날 때까지 놓지 못한 화두였다. 사람 사는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아니, 더 멀어지고 있다고 느끼는 이가 많다.

그가 봉하에서 하려던 일을 대신하고 있는 김정호 비서관을 만났다. 챙 넓은 모자에 작업복 차림이어서 몰라볼 뻔했다. 공식 직함은 ‘영농법인 봉하마을 대표이사’인데 ‘노무현의 비서’로 불리고 기록되기를 원했다. ‘바보 노무현’이 “자, 바보 아이가?”라고 했던 이다.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재단’ 홈페이지(knowhow.or.kr)의 영농일기 코너에 ‘농군정호’로 등장한다.

김정호 비서관은 “지난해에 왔을 때는 경황이 없었을 테고, 여기서 대통령님이 하시려던 일을 보러 가자”며 논으로 향했다.

“저게 이쪽 말로 둠벙이에요. 물웅덩이. 우리 일을 친환경 무농약 농업이라고만 하면 충분치 않아요. 생태농업, 경관농업이라는 말이 더 정확해요. 가을에는 논물을 다 빼거든요. 논에 있던 다양한 생명체들이 갈 데가 없잖아요. 둠벙은 걔네들한테 피난처가 되는 생명의 저수지인 셈이죠. 처음엔 농민들이 쓸데없는 일을 한다고 해서 대통령님이 농민들을 만나서 설득했어요. 이젠 7개로 늘어났어요.”

그가 할 일이 없어서 농사에 관심을 가졌을까? 김 비서관은 “국정보고 자료를 볼 때마다 농업·농촌 문제 때문에 안타까워하셨다”고 회상했다. 농림부에 농촌의 경쟁력을 높이는 방안을 연구하고 예산을 지원할 테니 성공 사례를 만들어보라고 수차례 제안했는데도 별 성과가 없자, 그는 “우리가 한번 해보자”고 했다.

그의 구상은 이랬다. 수십 년간 ‘과학영농’이라는 이름으로 벼를 제외한 다른 생명체들을 죽이면서 수확량을 늘려온 방식으로는 피폐해진 농촌의 사정이 나아지지 않는다, 농업은 산업이어서는 안 되고 굳이 산업을 붙이자면 생명산업이 되어야 한다, 농약을 쓰지 않고 가공을 제대로 하고 신뢰할 수 있는 브랜드를 만들어 팔면 성공할 수 있지 않겠나, 습지 생태체험장으로 만들면 사람들이 찾아올 거다, 도시에서 성공한 사람들이 은퇴해 고향에 내려가 돈을 투자하고 자신의 인맥을 활용해 팔면 되지 않겠나, 우리가 성공 모델을 만들어 전파하자.

청와대에서 구매국장·인사국장·기록관리비서관을 지낸 김 비서관이 총대를 멨다. 대학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농활(농촌활동)을 가서는 거머리가 무서워 논에 들어가지도 못하던 이에게 무리한 일이었지만, 애초 책임을 맡은 사람이 아파서 요양을 가 돌아오지 않자 자청했다. 김 비서관은 조건을 달았다. “이 없으면 잇몸으로 하지요. 저라도 하겠습니다. 그런데 잘 못한다고 너무 뭐라고 하지는 마십시오.”

부산에서 학생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하던 때 처음 그와 인연을 맺은 김 비서는 그렇게 농군이 되어갔다. 한때 김 비서와 한 집에서 생활했던 김경수 비서관은 “새벽에 들에 나가 저녁에 돌아오면 9시 뉴스도 보지 못하고 곯아떨어지는 날이 많았다”고 전했다.

“대통령님 모시고 농사를 시작하면서 정말 신기했어요. 벼가 자라는 게 하루하루가 달라요. 세상을 배우는 아이처럼 때늦은 호기심이 발동해 책을 보고 인터넷을 뒤져가며 공부도 했지요. 수십 년 농사를 지으며 오랜 경험과 관행을 믿는 분들하고 얘기를 하려면 뭘 알아야지요. 수확의 결실, 성취감, 새벽부터 밤까지 이 일을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를 거예요.”

봉하마을에는 평일임에도 방문객이 적지 않았다. 봉화산 사자바위에서 노 전 대통령의 묘역(왼쪽 사진 삼각형 모양)을 향해, 그리고 공사 중인 묘역 앞에 임시로 마련된 영정 사진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봉하마을에는 평일임에도 방문객이 적지 않았다. 봉화산 사자바위에서 노 전 대통령의 묘역(왼쪽 사진 삼각형 모양)을 향해, 그리고 공사 중인 묘역 앞에 임시로 마련된 영정 사진 앞에서 사람들은 고개를 숙였다.

지난해 친환경 무농약 농산물 인증

첫해인 2008년 2만4천 평(7만9200㎡)으로 시작했는데 올해는 그 10배인 24만 평(79만2천㎡)의 논이 제초제를 쓰지 않고 논에 오리·우렁이·미꾸리를 넣는다. 봉하마을 부근의 다른 면에서도 관심을 갖고 참여하기 시작했다. 지난해엔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으로부터 친환경 무농약 농산물 인증을 받았다.

마을에서 빠른 걸음으로 30분 정도 걸리는 화포천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가 고무보트를 타고 청소를 하던 습지다. 산책로 공사가 마무리되면 ‘대통령의 산책길’로 공개가 될 곳이다.

“하루는 산책을 다녀오시더니 ‘어릴 때 소 풀 먹이러 자주 갔던 곳인데 가까이에 이렇게 멋진 습지가 있는 줄 몰랐다’며 놀라워하셨어요. 흰뺨검둥오리 수천 마리가 겨울을 나러 오고, 수달·고라니·족제비·멧돼지도 살아요. 대통령님은 사람들이 직접 와보지 않고서 가치를 알 수 있겠느냐면서 우리가 청소를 하고 산책길도 내자고 하셨어요. 느리게 걸으면서 하천과 습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게 말이죠.”

화포천 산책길이나 노란 꽃창포와 수련이 활짝 핀 생태공원, 널찍한 정자에서는 방문객을 배려한 그의 마음이 읽혔다. 현직에 있을 때 인기가 별로 없던 전직 대통령을 찾아 이곳까지 먼 길을 달려온 이들에게, 그는 늘 고마워했다. 온 김에 쉬어갈 수 있는 곳, 환경과 습지와 생명의 소중함을 보고 듣고 느낄 기회를 주고 싶어했다. 그는 없고, 그의 뜻만 남았다.

김 비서관 입에서는 창포, 자운영, 마름, 노랑어리연, 갈대, 물억새, 이팝나무 등 온갖 풀·꽃·나무 이름이 쏟아져나왔다. 논문을 쓰거나 책을 내도 되겠다고 하자 “대통령님한테 ‘니는 지난번에 가르쳐줬는데 아직도 모르나?’는 구박을 당하면서 하나씩 익혔다”고 말했다.

봉하마을 방앗간으로 이동하던 길, 농군의 발길은 다시 논을 향했다. 1주기 추도식이 끝나면 모내기철인데 모종에 문제가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모종 단계부터 육모장에서 농약으로 소독하는 일반 벼와 달리 논에서 직접 육모를 하는데, 키가 웃자라 쭉정이가 돼버리는 키다리병이 왔다고 했다. 바쁘게 이곳저곳 전화를 돌리더니 작목반 대책회의를 소집했다.

김 비서관과 둘러본 방앗간은 말이 방앗간이지 14억7천만원짜리 공장이었다. 벼를 보관하는 저온창고와 벼를 현미·오분도미·백미로 만드는 도정기계, 포장기가 있었다.

“2008년엔 2만4천 평에서 50만t을 수확했는데 다른 RPC(Rice Processing Complex)를 일주일 빌려 작업했어요. 봉화쌀이 나오는 논이 그 10배로 늘어나니 답이 안 나오는 거예요. 도정 과정에서 다른 쌀과 섞이면 품질 관리가 되지 않고 독자 브랜드를 유지하기 힘들어서 아예 새로 지어버렸죠.”

그러니까 2009년 봉화쌀이 농사에서 가공까지 전 과정을 봉하마을에서 진행한 첫 작품이었다. 그는 그것을 보지 못하고 갔다. 김 비서는 그의 묘역에 쌀을 올린 뒤 창자 끝에서 올라오는 울음을 울었다.

“물안개 짙은 날 문득 누가 툭 칠 것 같아요”

김 비서관은 그의 유지를 받들어야 한다는 의무감 때문에 이곳을 떠나지 못한 것은 아닐까. “오십 평생 해온 일 중 가장 어울린다고 해요. 저도 행복하고요. 물꼬를 터주신 대통령님만 계시면 더 바랄 게 없을 텐데…. 안 계신다고 그만두고 떠나면 ‘저놈들, 대통령이 월급 주면서 시키니까 한 거 아이가?’ 하면서 예전으로 다 돌아갈 수도 있고요. 지금은 절대 못 떠나요. 저보다 잘하는 사람이 나타나 ‘이제 그만 쉬라’고 할 때까지는 하고 싶어요.”

그에 관한 얘기만 나오면 김 비서관의 눈은 촉촉해졌다. 그래도 꼭 물어야 했다. 그와 함께 일을 벌였고 지금은 그를 대신해 노무현의 가치와 꿈을 봉하마을에 녹이고 있는 장본인이니까.

“언제 가장 그리우세요?”

“밤에 혼자 숙소로 돌아갈 때… 여기 일교차가 큰 날은 물안개가 짙거든요…. 가로등 불빛에 몽환적인 분위기인데… 문득 툭 칠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런 느낌이 들어서 자꾸 뒤를 돌아보게 돼요.”

김 비서에게서 듣고 싶은 얘기가 많았지만 더 물을 수 없었다. 농사 얘기를 할 때는 환경운동가나 교수처럼 막힘이 없었는데 마지막 질문에 자꾸 멈칫했다. 소 같은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다. 취재수첩을 덮었다.

김해=글 김보협 기자 bhkim@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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