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한 개혁·진보 진영으로부터 가장 욕을 먹은 정책으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경제평론가인 정태인씨는 노 전 대통령의 한-미 FTA 추진을 가장 앞장서 반대한 인물이다.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경제비서관으로 노 전 대통령의 경제참모였던 그가 대통령에 반기를 든 것은 당시부터 많은 화제가 됐다.
경멸과 칭송의 과잉
정태인 경제평론가.
노 전 대통령 서거 1주기를 앞두고 정 전 비서관을 지난 5월11일 서울 서교동의 한 연구소에서 만났다. 자기와 인터뷰하면 ‘노빠’(노무현 전 대통령의 지지자)들이 싫어할 거라며 짐짓 빼는 그를 잡아끌며 요즘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 사회의 문제를 풀기 위해 이기적 존재인 사람이 어떤 조건에서 협력하는지를 연구 중인데, 너무 재미있다.” 스스로를 정치를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분야의 정책을 만드는 사람이라고 표현하는 그의 책상 위에는 연구 주제와 관련된 각종 영어 논문과 국내외 서적이 수북이 쌓여 있다. 하지만 그가 말처럼 연구소에만 파묻혀 지내는 것은 아닌 듯싶다. 인터넷 방송인 칼라TV의 대표를 맡으면서 매주 금요일 이라는 도발성 인터뷰 프로그램을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칼라TV는 촛불시위를 계기로 만들어진 독립 인터넷 언론이다. 요즘 그가 호시탐탐 바라보는 대상은 삼성이다. 2007년 10월 양심선언을 통해 삼성 비자금 사건의 도화선에 불을 붙인 김용철 전 삼성 구조조정본부 법무팀장을 얼마 전 인터뷰한 데 이어 김성환 삼성일반노조 위원장과 백혈병에 걸린 전 삼성전자 직원을 잇달아 만날 예정이다.
본론에 들어가기 전에 노 전 대통령 추모와 재평가 열기에 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잘 구분해야 진보 진영의 다음 과제를 제대로 도출할 수 있는데….” 노 전 대통령 재임 중에는 술을 먹다가도 대통령 욕을 안 하면 팔푼이 취급할 정도로 입에 거품을 물던 사람들이 서거 이후에는 마치 단군 이래 이런 성군이 없었던 것처럼 사모의 노래를 부르는 이중적 모습을 이해하기 힘들다는 속내를 내비쳤다. 둘 다 ‘과잉’이고 비정상이라는 생각인 듯하다. 내친김에 노무현은 그에게 어떤 사람이냐고 물어봤다. “사랑은 하는데, 존경은 할 수 없는 사람이지.” ‘좋아하지만, 사랑하지는 않는다’거나 ‘사랑하지만, 결혼은 못한다’는 얘기는 들어봤지만, 이 무슨 언어 희롱이란 말인가? 좀더 쉬운 말로 설명해줄 것을 부탁했다. “인간적으로 아주 매력적이고 순수하고 열정적이고 트인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지. 하지만 나와는 생각이 너무 달랐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미 FTA다.”
한-미 FTA와 관련한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이었을까? 2006년 3월 노 전 대통령이 이정우 전 청와대 정책실장과 정 전 비서관, 배우 문성근씨 등 몇몇 사람을 청와대로 불렀다. 과거 뜻을 같이한 동지 중에서 한-미 FTA에 반대하는 이들을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노 전 대통령은 “중국이 우리를 따라오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릴 것 같냐”고 물었다. 정 전 비서관이 “최소 10년은 걸릴 것”이라고 대답하니까, 대통령은 “그것보다 더 짧을 것”이라고 고개를 저었다. 노 전 대통령은 한국이 일본과 중국 사이에 끼어 경쟁력을 잃는 샌드위치 상황에 빠지는 것을 걱정했다. 앞으로 제조업으로 중국을 이기기는 어려우니 서비스업에서 활로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비스업을 발전시키려면 제도 개선이 이뤄져야 하는데 내부 동력만으로는 쉽지 않다고 봤다. 여기서 생각한 것이 외부 충격에 의한 내부 개혁이다. 그리고 한-미 FTA에 그 외부 충격의 역할을 기대한 것이다.
노무현 고립, 진보 진영도 반성해야
하지만 정 전 비서관은 이런 대통령의 생각은 자기모순이라고 지적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항상 자신과 참여정부가 역사에 어떻게 남을 것인가를 생각했다. 역사적 평가를 받으려면 새 시대를 만들어야 하는데 그것이 ‘복지’다. 실제 복지 예산을 많이 늘렸다. 하지만 한-미 FTA는 이런 복지에 배치된다.” 개방은 필히 구조조정을 수반하고 사회 취약계층이 가장 많은 타격을 받게 되는데, 대통령은 이 점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더구나 한-미 FTA는 관세를 일부 낮추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서비스 시장 개방과 지적재산권, 투자와 관련된 법과 제도를 모두 미국식에 맞춰 바꾸는 것이고, 그렇게 한번 바꾸면 돌이킬 수 없는 불가역적이라는 점도 강조한다. 정 전 비서관은 한-미 FTA를 반대한다고 해서 자신이 반개방론자이거나 FTA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니라고 강조했다. “(한-미 FTA가)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미국이 정한 협상 시한에 쫓겨) 졸속으로 추진하는 것을 반대한 것이다.” 두 사람의 시각차는 2007년 4월 한-미 FTA 체결 관련 대통령 담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노 전 대통령은 “(교육·의료 등 서비스 시장의 개방폭이 넓지 못한 것이) 솔직히 불만스럽고 아쉽다”면서 “우리 협상팀이 너무 방어를 잘한 것 같다”고 정반대 말을 했다.
정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이 한-미 FTA 올인 작전에 매달리는 데 결정적 계기를 제공한 인물로 김현종 전 통상교섭본부장을 지목한다. 노 전 대통령이 2005년 9월 코스타리카 순방에 나섰을 때 동행한 김 전 본부장이 쇠고기, 스크린쿼터, 자동차, 의약품 등 4가지 선결조건이 주렁주렁 매달린 한-미 FTA 보따리를 펼쳐놨다. 김 전 본부장은 이보다 7개월 앞서 미국과 비밀접촉에 나서 한-미 FTA 카드를 만들었다. 보수 언론, 재벌과의 지루한 싸움에 지치고 개혁·진보 진영의 외면으로 힘을 잃은 대통령에게는 한-미 FTA가 여당과의 대연정과 외부 충격에 의한 개혁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묘책으로 보였다.
노 전 대통령이 자기모순적인 한-미 FTA를 강행 추진한 것에 대해서는 개혁·진보 진영도 스스로를 되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노 전 대통령은 집권 초기를 제외하고는 자신을 찍어준 개혁·진보 진영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 이는 자신을 찍지 않은 수구·보수 진영의 반대보다 더 대통령의 마음을 쓰라리게 했을 것이다. 심지어 개혁·진보 진영에서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개량주의적 정체를 하루속히 폭로해야 한다”는 말까지 공공연히 나왔다. 정 전 비서관은 노 전 대통령의 개혁 추진 전략이 ‘집권 초기 민중연대 개혁’ → ‘중반기 한나라당과의 연정을 통한 개혁’ → ‘후반기 외부 세력을 이용한 개혁’의 순서로 이어졌다고 말한다. “대통령은 노·사·정 사회적 합의를 통한 개혁을 희망했지만 실패했다. 화물연대 파업, 전교조와의 대립, 철도파업 등을 통해 좌파와 노동계가 대통령을 비타협적으로 몰아붙여 결국 서로 적대적 관계가 됐다.” 하나의 가정이지만 개혁·진보 진영이 좀더 유연성을 보여 (비록 좌파 신자유주의자를 자처했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해 비판적 지지 전략을 썼다면 이명박 정부의 집권으로 이어진 참여정부 후반부의 지리멸렬은 피할 수 있지 않았을까? 정 전 비서관은 이를 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실패는 곧 개혁·진보 진영의 실패라고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퇴임 이후 “재검토 필요” 언급노 전 대통령도 퇴임 이후인 2008년 9월 미국발 글로벌 금융위기가 본격화하자 재임 중의 금융 자유화 정책에 대한 재검토 필요성을 언급하면서 FTA에도 문제가 없는지 살펴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를 두고 노 전 대통령이 한-미 FTA 강행 추진에 대해 후회했다고 단정짓기는 힘들지만, 내심 많이 걱정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4년 전 상당수 국민의 반대에도 당장 안 하면 마치 큰일이나 생기는 것처럼 정부가 밀어붙였던 한-미 FTA. 하지만 미국 의회의 반대로 비준이 안 돼 3년 넘게 창고 속에서 먼지를 푹 뒤집어 쓰고 있는 한-미 FTA. 이럴 줄 알았으면 왜 그런 무리를 했을까 하는 생각이 시나브로 든다.
글 곽정수 기자 jskwak@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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