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노빠’가 되겠습니다 노무현은 이제 없다. 하지만 그가 남긴 씨앗은 수많은 노무현으로 피어나고 있다. 농촌의 모범을 만들어보고 싶다던 경남 김해 봉하마을에서는 모내기를 앞두고 땅갈이가 한창이다. 그의 철학을 좇아 일상을 살아가고, 기업을 끌어가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이들이 모두 노무현이...2010-05-21 21:40
그는 가고 뜻은 남았다1년 만이다. 5월10일 봉하마을은 분주했다. 묘역을 단장하는 마무리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를 잃은 시민들의 추모 글이 담긴 바닥돌(박석)을 깔고 있었다. 1주기인 5월23일 이곳에서 추도식이 열린다.부엉이바위가 있는 학산과 맞은편 뱀산 사이의 너른 논엔 부지런한 농부...2010-05-21 21:24
‘인터넷 꿈’의 주례를 서다 “두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만 지켜나가면 다 잘될 겁니다. 두 사람은 운명지어져 있던 것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1997년 3월16일, 50살의 노무현 변호사는 서울의 한 예식장에서 주례를 섰다. 13년 묵은 결혼식 비디오테이...2010-05-21 21:12
원칙과 상식, 그의 철학으로 해보자2004년 3월 당시 나는 제법 잘나가는 직장인이었다. 빠른 승진으로 회사의 중요한 직급에 오른 지 몇 달째. 고속 승진은 내가 지켜온 원칙과 상식을 버린 결과였다. 현실과 타협했다. 회사의 체질 개선과 개혁을 줄기차게 요청했으나 외면당했고, 그 대신 승진이라는 당근이...2010-05-21 21:02
그는 늘 연설이 아닌 말을 했다 ‘노무현과 나’란 주제로 글을 써달라는 전화를 받았다. 고작 감기로 죽을 것같이 괴로워하고 있을 때다. 고열에, 기침에, 몸살에…. 전화를 받고, 설명을 듣고, 대답을 하는 과정이 다 고역이었다. 감기약과 열에 취해 자다 깨다를 반복하고 있던 내게 은 봉창 두드리는 ...2010-05-21 20:55
옳은 생각에 음표를 달리라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했듯이 나에게 ‘노무현’이라는 이름이 다가온 것은 그가 1988년 5공 청문회로 일약 스타 정치인이 되었을 때다. 무서운(?) 군인 아저씨 대통령을 호되게 질책하던 정치인 노무현의 패기는 나를 포함한 모두의 마음을 속 시원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당...2010-05-21 20:51
“너희 자식들 죽여봐” 울부짖던 국회의원 변호사 노무현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대 중반쯤이었다. 당시 나는 고 조영래 변호사께서 사무실 내에 설치한 시민공익법률상담소에서 노동상담 업무를 보고 있었다. 5공 시절인 어느 날, 후배인 정재성 변호사가 소개해 부산의 광안리 음식점에서 노무현 변호사를 처음 만났...2010-05-21 20:47
연대를 구했으나 외로웠던 남자 그를 처음 본 것은 9년 전 봄날이다. 대구의 어느 방송사 토론회 자리였다.그는 그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참여경선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당내 예비선거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갓 투표권을 얻어낸 그 지역 대학 정치학과의 신입생이었다. 그날 자리에서 정치인과 언론의 ...2010-05-21 20:41
“싸우지 않고 이기는 안보를 추구했다”노무현 정부 인사 가운데 검찰 수사선상에 오른 이가 또 한 명 늘었다. 박선원 전 청와대 통일안보전략비서관이다. 박 전 비서관은 지난 4월22일 문화방송 라디오에 출연해 천안함 침몰 사건과 관련해 정보 은폐 의혹을 제기했다는 이유로 김태영 국방부 장관에게서 명예훼손 혐...2010-05-21 20:33
대추리 그리고 2개월의 감옥보스턴에서 어학연수를 하던 때였다. 기나긴 겨울을 갓 벗어나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시원한 봄바람이 불기 시작한 5월의 어느 날이었다. 오는 봄이 반가워서였을까. 쉽게 잠이 오지 않아 컴퓨터를 켠다. 인터넷 포털을 가득 채운 것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를 알리는 소식들....2010-05-21 20:22
전국정당·민주적 리더십… 아련해라‘정치인 노무현’은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비주류로 지냈다. 시민은 비주류인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 탄핵의 수렁에서 구해냈으며, 소수파인 집권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줬다. 시민이 그에게 기회를 부여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열린우리당, 청와대 ...2010-05-21 20:15
“신행정수도, 균형발전의 굳은 의지”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일하기 전까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30년 동안 자신이 굳게 지킨 신념과 철학이 맞아 노 전 대통령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2003~2004년 신행정수도건설추진자문위원장과 신행...2010-05-21 20:08
재벌 개혁, 진심은 있었으나… 대기업 임원인 그는 지난 2002년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를 찍었다. “무언가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해서”였다. “우리나라에서 가진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격차가 너무 크게 벌어졌다”는 게 그의 진단이었다. 그는 소속과 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고 신신당부하면서 인...2010-05-21 18:45
한-미 FTA, 외로운 대통령을 유혹했다노무현 전 대통령이 선거에서 자신을 지지한 개혁·진보 진영으로부터 가장 욕을 먹은 정책으로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강행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경제평론가인 정태인씨는 노 전 대통령의 한-미 FTA 추진을 가장 앞장서 반대한 인물이다. 참여정부 초기 청와대 경제비서...2010-05-21 18:40
열심히 뛴 복지, 달라진 인식 지난해 5월23일 오전 9시께 사회복지사 임채휘(33)씨는 강화도 앞바다 석모도의 해안 도로를 따라 운전하고 있었다. 서울 영등포구 신길동 돈보스코아동복지센터의 동료 8명과 함께 1박2일 나들이를 온 이튿날이었다. 이들을 태운 9인승 승합차는 석모도 낙가산 자락 보...2010-05-21 18: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