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를 처음 본 것은 9년 전 봄날이다. 대구의 어느 방송사 토론회 자리였다.
그는 그해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국민참여경선이라는 이름으로 치러진 당내 예비선거의 주인공이었다. 나는 갓 투표권을 얻어낸 그 지역 대학 정치학과의 신입생이었다. 그날 자리에서 정치인과 언론의 관계를 규정하던 그의 목소리가 아직 또렷하다. “언론은 언론의 길이 있고 정치인은 정치인의 길이 있습니다. 서로 눈치 보거나 굽히지 말고 정치인과 언론이 각자 제 몫을 찾으면 됩니다. 그것이… 그것이 개혁의 핵심이지요.” 10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그가 바랐듯 정치인과 언론이 제대로 자리매김한 것 같지는 않다. 요컨대, 언론과 정치 영역에서 그는 실패했다. 그렇지만 공개된 자리에서 일관되게 과점언론의 문제를 비판할 줄 아는 용기와 다부짐은, 그해 세밑에 그를 이 나라 최고 권력자의 자리로 이끌었고, 나로 하여금 그를 스승으로 사숙하게 했다.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반성스승의 집권 기간 내가 일기장이나 블로그에 묶어놓은 글을 들춰보면, 대체로 그에 대한 호의가 넉넉하게 배어난다. 물론 서운함이 없지는 않았다. 민주당 분당과 대북송금 특검 동의 과정을 지켜보면서, 나는 적잖은 뒤숭숭함에 시달려야 했다. 이라크 파병과 보안법 폐지 실패, 법률가 시절 스승 자신이 변호했던 노동자들의 분신을 대하는 태도에 이르러서는 그에게 크게 실망했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문제에서 스승과 그의 옛 동지들이 날선 각을 세울 때, 나는 본의 아니게 그 사이를 이리저리 방황해야 했다. 스승의 동지 한 분이 학교로 돌아온 뒤 개설한 수업에서 한-미 FTA에 대한 판단을 요구한 적이 있다. 궁리 끝에 나온 답은 투자자-국가제소권을 비롯한 몇 가지 독소조항 제거를 단서로 붙인 조건부 찬성이었다. 꽤 시간이 흘렀지만 지금도 이 판단에 대한 확신이 서지 않는다. 다만 비겁한 답안이라는 생각은 든다. 아마도 정책의 주체가 내 스승이었다는 사실이 내 분별을 크게 흐렸으리라.
브레이크 풀린 사회 양극화의 혐의가 적대적인 언론에 의해 오로지 그만의 과오로 덧씌워진 상황에서 지지자들의 의사에 반하는 일련의 정책과 언행은 그에게 범정파적 환멸을 안겼다. 누구나 손쉽게, 극성맞게 스승의 정치적 파산을 추인했다. 어느 논평가가 “민주주의에 대한 포맷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정치인, 하드디스크로 치면 불량 섹터가 아주 많은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내린 것이 그즈음일 것이다(정확한 기억은 아니다. 그 시절 나는 군대에서 시간을 죽이고 있었던 만큼, 세상 물정에 어두웠다).
그 논평가의 진단에, 나는 절반만 동의한다. 스승이 불량 섹터가 많은 정치인이라는 평가는 수긍할 만하다. 앞서도 열거했지만 집권 기간에 스승이 범한 오류는 그 시절 내내 꿋꿋한 지지자였던 내 눈에도 셀 수 없을 만큼 많다. 그러나 동시에 그가 결벽증에 가까운 자기반성 기질을 가졌다는 걸 염두에 둘 수는 없었을까. 스승이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통해 민주주의의 본령에 누구보다 가까이 다다랐던 정치인이라는 점에서, 나는 그 논평가의 규정에 동의하지 않는다.
당대에 눈에 띄는 치적의 질과 양에서, 지지 기반의 견고함에서 내 스승에 앞설 정치가는 넘쳐날지 모른다. 그러나 개인의 정치적 목표를 역사의 큰 줄기와 일치시킬 줄 알았다는 점에서 그는, 그의 전임자와 더불어, 최량의 정치가였다. 스승은 민주주의와 평화, 분권과 자율이라는 의제를 자신의 정치적 수레에 담아낼 만큼 명민했고 헌걸차게 밀고 나갔다.
가방끈과 지적 능력은 관계가 없다
더불어 그는 가방끈의 길이와 지적 능력은 별다른 상관관계가 없음을 가장 명쾌하게 증명해낸 사람이었다. 좌우를 막론하고 당내 경선과 후보 단일화 과정, 본선에서 그와 경쟁한 후보들의 학력은 모두 이 나라 최고 수준이었지만 각종 토론에서 드러난 그들의 지적 밑천은 상고 졸업장이 전부인 스승에 견주기 민망할 정도였다.
스승을 마지막으로 뵙던 날이 기억난다. 이태 전 여름이다.
개인적으로 심란했던 속을 달래보려 내가 아는 유일한 시골인 봉하에 들렀다.
스승이 심한 감기몸살로 그즈음의 핵심 일과이던 방문객 인사마저 거른다는 소식이 들렸던 탓에 그를 만날 수 있다는 기대는 애초에 접은 상태였지만(일말의 희망을 품긴 했다. 후보 시절 출간된 그의 반평전과 네임펜을 챙겼던 것을 보면 말이다), 때때로 행운의 여신은 장삼이사에게도 그 은혜를 베푸는 법이다.
“안녕하세요!”
그늘을 찾아 쪼그리고 앉아 있던 내게 언제 나타났는지 그가 익숙한 말투로 인사를 걸어왔다. 나는 스승의 인사를 받지도 넘기지도 못한 채 그저 엉거주춤, 어 어… 하고 있었다.
“식목일에 왔었지요? 차나무 심어주러.”
“어(그랬나?), 네…(그랬겠지?).”
영리함과는 별개로 사람 얼굴에 대한 기억력은 낙제생이었다는 스승이 석 달 전 자원봉사자 틈에 섞여 있던 얼굴을 기억하는 게 신통했다.
“저기….” 눈인사를 끝으로 발길을 옮기는 스승에게 쭈뼛쭈뼛 책과 펜을 내밀었다. 스승의 성치 않은 건강을 염려했을까. 경호원으로 보이는 한 사람이 슬며시 막아섰다. 스승은 “이거 하나만 하입시다”라며 흔쾌히 책에 사인을 해주었고 “또 봅시다”,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사람 사는 세상, 노무현.’
사람 사는 세상은 오는 것일까
이름 모를 제자에게 그 아홉 글자를 새겨준 열 달 뒤, 스승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끊임없이 세상과의 연대를 모색했던 스승이지만, 마지막 순간 그는 철저히 고립돼 있었다.
세월이 빠른 걸까, 사람 마음이 무심한 걸까. 머잖아 스승의 사후 1년이다. 소수파의 지도자가 고난 끝에 흔히 사후 추존되듯, 지난해 이맘때 (나를 포함해) 모두로부터 버림받았던 스승을 이제는 많은 이들이 칭송한다. 마치 그를 칭송하는 행위가 건강한 시민의식을 가졌음을 표내는 장신구가 돼버린 느낌이다. 누구나 내 스승을 그리워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시절이다. 부질없지만, 나는 이 풍경이 밉살맞다.
과연, 사람 사는 세상은 오는 것일까? 스승의 제자를 자처했던 사람으로서 스승의 꿈을 낙관하고 거기에 힘을 보태는 게 도리일 테다. 물론 스승의 영정 앞에서 나 역시 그러리라 약속했다. 그러나 스승의 부재만큼이나 세상살이와 밥벌이의 팍팍함이, 약속을 흐릿하게, 사람 사는 세상을 향한 내 손발을 더디게 잡아맨다.
-대구에서, 당신이 끝까지 몰랐을 제자가
이민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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