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안제(73) 서울대 명예교수. 전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장. 사진 김정효 기자
“노무현 전 대통령과 함께 일하기 전까진 그를 지지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인지도 몰랐다고 했다. 하지만 30년 동안 자신이 굳게 지킨 신념과 철학이 맞아 노 전 대통령의 도움 요청을 받아들였다고 했다. 2003~2004년 신행정수도건설추진자문위원장과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장을 지낸 도시계획학 원로 김안제(73) 서울대 명예교수 얘기다.
김 교수는 “국토균형발전에 행정수도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다”고 단언하는 강경파다. 수도권에 인구가 몰리는 가장 큰 원인이 행정기관의 집중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때인 1977년 박정희 전 대통령이 추진한 임시행정수도 건설사업인 ‘백지계획’의 자문위원 겸 작업단원으로 참여했다. 참여정부 때인 2004년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장이 돼 행정수도의 청사진을 그렸다. 지지는커녕 일면식조차 없던 노무현 대통령이었지만, 수도권 과밀을 억제하고 지역 균형발전을 이루겠다는 그의 의지와 김 교수의 신념이 맞아떨어졌기 때문이다.
5월12일 서울 자양동 한국지역발전연구원에서 김 교수를 만났다. 한국지역발전연구원은 이름 그대로 지역 균형발전 방안을 모색하는 곳으로, 김 교수가 운영하는 연구소다. 김 교수는 “정권이 바뀌어도 되돌릴 수 없게 못을 박아놨어야 했다. 참여정부 때 (행정수도를) 국민투표를 해서 아무도 손대지 못하게 했어야 했다”고 단호히 말했다. 그는 2004년 6월9일 한나라당이 연 토론회에서 “국회와 사법부가 모두 다 옮기면 그것은 수도 이전이라고 볼 수 있다. 신행정수도특별법을 국회가 통과시키기 전에 국민투표를 실시했어야 했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행정수도 건설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지만, 이 발언은 부메랑이 됐다. 한나라당 등 반대론자들이 행정수도의 취지를 ‘행정 기능만 옮겨가는 것이 아니라 천도’라고 왜곡하고, 불과 여섯 달 전 여야 합의로 제정한 신행정수도건설특별법을 무시한 채 또다시 국민투표를 하자고 주장할 빌미를 준 것이다.
“행정기관이 내려가는 것 말고 균형발전을 이룰 방법이 있습니까? 노무현 대통령은 행정수도 이전을 공약했고, 당선됐습니다. 하지만 (행정수도가 건설되기 전에) 대통령은 당연히 바뀌는 거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어요. 이걸 꼼짝 못하게 묶어두는 건 법만으로는 어려워요. 국민투표라는 장치를 통해서 아주 못을 박아놔야 어떤 정권이 들어와도 이 정책은 밀고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거죠. 참여정부 초기에는 인기가 있었어요. 그때 얼른 국민투표를 했으면 통과됐을 텐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국민투표를 하자고) 더 우길걸, 아쉽습니다.”
한 달에 한두 차례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회가 진전시킨 안을 노 대통령에게 보고하면, 그는 “잘됐습니다. 그대로 추진하세요”라며 위원회를 격려했다. 노 대통령도, 김 교수가 이끄는 위원회도 왜 행정수도를 만들어야 하는지 깊이 공감했기 때문에 일은 순조롭게 진행됐다고 한다.
그해 8월 행정수도 입지가 충남 연기·공주로 확정된 뒤 김 교수는 위원장직을 사직했다. “위원장이 바뀌면 반대하던 집단의 공격도 적어질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였다. 그런데 두 달 뒤 헌법재판소가 “수도가 서울인 점은 관습헌법에 해당한다”는 신묘한 논리로 신행정수도특별법에 위헌 결정을 내렸다.
“깜짝 놀랐어요. 말도 안 되는 결정이죠. 청와대에서 연락이 와서 급히 갔어요. 대통령이 주재를 하고 고건 총리, 관계부처 장관 등 20명이 모여 앞으로 어떻게 할지 회의를 했습니다. 그날 대통령은 만나서 점심 먹고 회의하고 헤어질 때까지 몇 시간 동안 한 번도 안 웃으셨어요. 항상 웃는 얼굴이고 유머러스해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드는 분인데, 그날은 내가 농담을 몇 마디 해도 안 웃으시더라고….”
헌법재판소 결정 이후 노 전 대통령의 표정은 김 교수가 본 것 중 최고로 딱딱하고 어두웠다. 하지만 균형발전을 향한 노 전 대통령의 진정성은 꺾이지 않았다. “‘행정수도 공약으로 선거에서 재미 좀 보자’는 게 전부였다면, ‘국민 여러분 죄송합니다. 나는 신념을 갖고 하려고 하는데, 위헌 결정이 났으니 어떻게 해볼 수가 없습니다’ 하고 헌법재판소에 책임을 미루고 접으면 되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노 대통령은 그러지 않았어요. 어떻게 하면 판결에 위배되지 않으면서 이 나라 균형발전을 시킬 수 있을지, 뭐가 가야 지방이 살지에 초점을 맞추라고 강조하셨어요. 그렇게 해서 나온 게 청와대는 안 내려가고 행정기관만 이전하는 행정중심복합도시(세종시) 아닙니까.” 김 교수는 이후 만들어진 행정중심복합도시건설추진위원회 자문위원으로도 활동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이 수도권 집중 문제를 얼마나 심각하게 여기는지 다시 한번 확인했다.
“연기에서 열린 행정중심복합도시 기공식날 노 대통령은 매우 기뻐하셨어요. 기공식 연설 때도 그랬지만, 만찬장에서의 표정은 아주 순박한 유치원 선생 같았습니다.” 김 교수는 세종시 첫 삽을 뜨던 날의 노 대통령을 이렇게 기억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은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다. “균형발전이 수도권과 지방 모두의 경쟁력을 함께 높이는 일임에도 행정수도가 행정중심복합도시로 축소된 것은 매우 안타까운 일입니다. 청와대와 정부, 정부 부처 일부가 공간적으로 분리된 것은 매우 불합리한 결과입니다. 참으로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다행히 대선 후보들이 지금은 일치해 행복도시 건설과 균형발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음 정부에서도 이 정책들이 흔들림 없이 추진될 것으로 믿습니다. 더 나아가서는 우리가 그린 그림 위에서 언젠가는 이 세종시가 완전한 행정중심이 될 것으로 기대합니다.” 기공식에서 했던 노 대통령의 발언이다.
지금 세종시는 노 대통령의 기대와는 정반대로, 균형발전 논의는 사라지고 행정기능 축소를 전제로 한 ‘교육과학 중심 경제도시’ ‘자족도시’ 논란만 남았다. 김 교수는 신행정수도건설추진위원장 시절 이미 “사업의 진로가 (2007년) 대선 결과에 따라 크게 변할 수 있다”고 ‘예언’한 바 있다. “매우 착잡해요. 세종시가 신도시 하나 예쁘게 잘 만들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하나 만들자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지난해 말 이명박 정부가 세종시 수정 뜻을 밝힌 뒤 만든) 세종시 민관합동위원회에 행정수도 추진에 관여했던 사람도 서너 명 넣어놨습디다. 그분들 얘기가 먹혔으면 이렇게 됐겠습니까? 들러리로 세운 거지요.” 김 교수는 지난해 11월27일 밤 세종시 수정과 관련한 ‘대통령과의 대화’에 참석해 이명박 대통령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다고 정부 쪽에 의사를 전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래도 김 교수는 희망을 놓지 않는다. “정부가 수정안을 만든 게 헛고생만은 아닙니다. 행정부처가 가는 덴 손대지 말고, 기업·학교 이전처럼 자족 기능과 활성화 수단이 보강된 부분을 더하면 됩니다. 자꾸 몰아치면 정부도 삐쳐서 앞에선 (세종시를) 하는 척하면서 뒤에선 방해할 수도 있어요. 정부를 격려해서 ‘수정안의 수정’을 할 수 있게 해야지요. 그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글 조혜정 기자 zesty@hani.co.kr·사진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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