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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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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정당·민주적 리더십… 아련해라



2004년 총선 ‘열린우리당 돌풍’의 주역 김형주 전 의원…
“노무현, 정치 개혁 위해 공천 개입 전혀 안 해”
등록 2010-05-21 20:15 수정 2020-05-03 04:26

‘정치인 노무현’은 정치 인생의 대부분을 비주류로 지냈다. 시민은 비주류인 그를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 탄핵의 수렁에서 구해냈으며, 소수파인 집권당을 다수당으로 만들어줬다. 시민이 그에게 기회를 부여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정치 개혁에 대한 열망이었다.

열린우리당, 청와대 개입 완전 차단

김형주 전 의원.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김형주 전 의원.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노무현식 정치 개혁의 결정체는 열린우리당이었다. 열린우리당의 창당과 소멸은 곧 노무현식 정치 개혁의 역사와 같다. 노 전 대통령은 회고록 (학고재 펴냄)에서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창당하지 않을 수 없는 정당이었습니다. 지역 정당을 벗어나서 전국 정당을 만들어야 한다는 정치적 당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현실적으로 민주당에서 전국 정당을 만드는 노력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제가 후보일 때 외부의 다른 후보와 내통하면서 해당 행위를 했던 사람들이 제가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후에도 당의 개혁을 반대했기 때문입니다. 당의 개혁을 반대하니 결국 열린우리당이 창당된 것입니다.”

창당 직후 치러진 2004년 4월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절반이 넘는 152석을 얻어 압승했다. 당시로서는 정치 신인이던 김형주 전 의원이 서울 한복판(광진을)에서 옛 민주당의 거물 추미애 의원을 꺾은 장면은 열린우리당 돌풍의 상징이었다.

“추미애 의원이 워낙 막강한 후보여서 열린우리당에는 마땅한 후보조차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공천을 신청한 것이죠. 물론 끝까지 혼자였다면 약세인 제가 공천받기 어려웠을 겁니다. 전략공천을 검토한다는 이야기가 있었으니까요. 그때 조상훈 후보가 공천을 신청하며 경선이 치러질 수 있었습니다.”

당시 ‘우리당 사랑모임’ 광진 대표였던 조상훈 후보는 1988∼92년 노 전 대통령의 비서 및 비서관을 지냈다. 김 전 의원은 2002년 대선 직전 개혁국민정당 상임운영위원을 한 게 정치 활동의 전부였다. 경선은 노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더 깊은 조 후보가 앞설 것으로 보였지만 결과는 김 전 의원의 승리였다. “열린우리당 경선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당의 문호도 지금의 민주당보다 훨씬 열려 있었고 특정 계파로부터 자유로웠습니다. 제가 비록 약체 후보였지만 경선이라는 합법적 정당성을 획득하고 난 뒤에는 전략공천설도 가라앉았습니다.”

당내 민주주의라는 측면에서 ‘당원이 중심이 되는 백년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은 1인 보스의 제왕적 리더십을 중심으로 운용되는 과거 정당과 분명 달랐다. 당정 분리를 아예 당헌.당규에 못박아 청와대의 정치 개입을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실제로 2004년 총선 때 노 전 대통령은 공천과 관련한 권한을 거의 행사하지 않았다. 유시민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노 전 대통령과 가까운 여성단체 핵심 인사 고은광순씨 등 2~3명을 추천했으나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이 이마저도 거절했다.

“노 대통령도 왜 아쉬운 마음이 없었겠습니까. 열린우리당이 사실 노 전 대통령에게서 출발한 정당이라고 할 수 있는데도, 자신은 비례대표 공천에 일절 개입하지 않았습니다. ‘정당 민주주의’와 이를 내세운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려 했습니다.”

안정된 리더십 확보 못하고 우왕좌왕

정당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니 문제가 생겼다. 당이 안정된 리더십을 확보하지 못했다. 좋게 표현하면 백가쟁명이고, 나쁘게 말하면 중구난방의 연속이었다. 김 전 의원은 “워낙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물이 열린우리당이라는 틀 속에 모이다 보니 개별적 언론 접촉 등을 통해 각종 현안에 대해 정리되지 않은 의견을 쏟아냈다”며 “아쉬운 부분은 이해찬 전 국무총리 같은 인사가 우선 당을 제어한 뒤 우리 나름의 기율을 정리하는 과정이 필요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했다.

통제되지 않은 ‘정당 민주주의’의 부작용은 대연정 논란 때 극대화됐다. 2005년 10월 재보선을 앞두고 노무현 전 대통령이 대연정을 제안했다. 같은 해 4·30 재보선에서 여당이 ‘23 대 0’으로 패하며 여대야소가 여소야대로 뒤집어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회고다. “그 국면에서 어떻게 빠져나갈 것인가를 깊이 생각하다 제 자신의 논리에 다시 빠져버린 것입니다. 몇 사람 제외하고는 아무도 반대를 하지 않아서 찬성한다고 보고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중에 판단해보니 좋은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중에서)

야당인 한나라당의 반대보다 뼈아팠던 것은 열린우리당의 반발이었다. 김 전 의원은 대연정 논란을 정당 민주주의가 불시착한 사례로 들었다. “오직 당에 이로운가 해로운가만을 따졌죠. 이롭지 않다면 상대가 대통령이든 청와대든 우리 생각과 다르다며 선 긋기에 바빴습니다. 대통령이 어떤 의도로 연정론을 제기했는지 이해하려 하기보다 ‘한나라당과 손잡으라는 말이냐’며 성급하게 반발한 태도도 국민에게 분열 세력으로 비친 이유라고 봅니다.”

정당 민주주의와 당정 분리의 원칙을 지키기 위해 제왕적 리더십을 버린 노 전 대통령에게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등 ‘선출되지 않은 권력’과의 투쟁은 또 다른 도전이었다. 과거 제왕적 리더십 아래에서 숨죽이고 있던 한국 사회 시스템의 문제에 그는 오직 헌법과 법률이 허용한 ‘표현의 자유’로 맞섰다. 대표적 사례가 대통령 탄핵 사건 등이었다. 그의 발언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위반했느냐 여부가 종종 논란이 됐다. 유시민 전 장관은 (돌베개 펴냄)에서 이렇게 그를 변호했다.

“이명박 대통령이 측근과 참모를 통해 한나라당의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 후보 공천을 좌지우지했다는 것도 만인공지의 비밀이다. 대통령들은 예외 없이 여당의 국회의원 후보 공천을 좌우했고 여당의 총선 승리에 도움을 주기 위해 애썼다. 정치 중립은 고사하고 선거 중립조차 지키지 않았다. 그런데 대통령들은 이 진실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그래서 선거법 위반이라는 비난을 받지도 않았고 탄핵을 당하지도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러한 위선을 거부하고 자기를 지지하는 정당이 잘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공개적으로 말했다.”

대연정 논란·탄핵… 불시착

노 전 대통령도 사전 선거운동 금지와 대통령의 정치적 중립 의무를 요구한 공직선거법의 문제를 ‘사리에 맞지 않는 것’으로 지적하며 개선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실현되지 않았다. 김 전 의원은 “우리가 너무 나이브했다”고 말했다.

“대통령 발언에 대해 선관위나 헌재가 문제 삼는 것 자체는 노 전 대통령이 원한 건강한 민주사회의 표징이라고 봅니다. 문제는 정권이 바뀌며 선출되지 않은 권력의 태도가 너무 빨리 뒤바뀌었다는 것이죠. 또한 선관위 제도에 문제가 있다면 이를 해소하기 위한 제도 개선 노력이 필요했는데 이것 역시 부족했습니다.”

서거 직전 노 전 대통령은 정치 개혁을 말하며 ‘좌절’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독재의 잔재를 청산하고 제왕적·권위적 지도자의 정치문화를 바꿔 낮은 권력과 공정한 사회를 실현하는 데 성공했지만, 정작 우리 정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 문제를 해결하는 데 이르지 못했다는 아쉬움의 표현이었다.

“중요한 것은 우리 정치의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이걸 해결해보자고 인생을 걸고 도전했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결국 거의 원점에 돌아와 있습니다. 분열주의와 기회주의가 원점으로 돌아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치인 노무현의 좌절입니다.”( 중에서)

최성진 기자 cs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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