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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꿈’의 주례를 서다



1996년 프로그램 함께 개발하고 주례까지 서준 대통령… “생각해보면 그의 구상은 ‘웹 2.0’이었다”
등록 2010-05-21 21:12 수정 2020-05-03 04:26
신현묵·박진숙 부부가 두 아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신현묵·박진숙 부부가 두 아들과 함께 환하게 웃고 있다. 한겨레21 정용일 기자

“두 사람은 어떤 경우라도 항시 사랑하기로 약속했습니다. 이 약속만 지켜나가면 다 잘될 겁니다. 두 사람은 운명지어져 있던 것으로 받아들이시기 바랍니다.”

1997년 3월16일, 50살의 노무현 변호사는 서울의 한 예식장에서 주례를 섰다. 13년 묵은 결혼식 비디오테이프를 재생하자 주례석에 서서 싱글벙글 웃고 있는 그가 나타났다. 신랑 자랑이 한창이다. “신랑 신현묵군은 최근에 저랑 무슨 일을 좀 같이 하고 있거든요. 무슨 일이냐 하면, 요즘 제일 전망이 밝고 우리 사회 발전에 꼭 필요하다는 정보통신 분야 사업입니다. 세계적인 제품을 개발할 것 같아서 기쁘게 지내고 있습니다.”

구상을 빼곡히 적어온 변호사
13년 전,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준 ‘주례 선생님’은 노무현이었다. 신현묵 제공

13년 전, 두 사람의 결혼을 축복해준 ‘주례 선생님’은 노무현이었다. 신현묵 제공

당시 스물여섯 살 신랑이던 신현묵씨는 이제 39살이 됐다. 부인 박진숙(41)씨와의 사이에 낳은 두 아들은 벌써 중학교 2학년, 초등학교 3학년이다. “대통령 퇴임하고 조용해지면 아이들 데리고 인사를 가려고 했는데” 지난해 5월 ‘주례 선생님’이 세상을 떠났다. 부부는 아들들의 손을 잡고 봉하마을에 내려가 분향을 하고 왔다. 가고 오는 길에 슬피 울었다. 박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슬픔”이라고 블로그에 적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인 신씨는 ‘노무현이 꿈꾸는 인터넷 세상’을 가장 가까이서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다. 신씨는 “노무현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부터 정보가 투명하게 관리되고 서로 자유롭게 소통할 수 있는 인터넷 환경을 만드는 일에 큰 열정을 가졌다”고 회상했다. 인터넷 소통을 꿈꾼 노무현과 젊은 소프트웨어 개발자 신현묵씨의 만남은 운명적이었다.

신씨가 노무현 대통령을 처음 만난 것은 1996년 초가을이었다. 당시 신씨는 군대를 제대한 뒤 친구 2명과 의기투합해 소프트웨어 개발회사를 차렸다. 회사라고는 하지만 경기 부평의 친구 자취방에 컴퓨터 3대를 들여놓은 것이 전부였다. 회사를 차린 지 몇 달 만에 자취방으로 한 남자가 찾아와 명함을 내밀었다. ‘해마루종합법률사무소 노무현 변호사’라고 적혀 있었다.

그는 소프트웨어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뉴리더 새버전 구상’이라는 문서를 가방에서 꺼냈다. 자신이 원하는 소프트웨어에 대한 구상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애초에는 대학생들에게 부탁해 제작해보았는데 결과가 만족스럽지 않았고 큰 기업은 의뢰를 거절했다고 했다. 신씨는 노무현 변호사가 건넨 문서를 보자마자 도전 욕구를 느꼈다. ‘뉴리더’는 일정, 개인·단체 정보, 문서 관리는 물론 정보와 메시지 공유 등 사용자 간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일종의 인맥 관리용 프로그램이었다. 신씨는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그의 구상은 ‘웹 2.0’이었다”고 말했다.

1996년은 한국에 인터넷이 막 보급되던 때로, ‘도스’ 대신 ‘윈도’가 운영체제로 이용되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일반인이 업무에 컴퓨터를 활용하는 수준은 높지 않았다. “당시 노무현이란 사람이 소프트웨어 개발에 보인 열정은 개발자 이상이었다”고 신씨는 기억했다. ‘요상한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데 세 사람이 달려들었다. 개발자 두 사람과 의뢰인 노무현이었다.

세 사람은 일주일에 두 번씩 회의를 했다. 회의 때마다 노무현은 자신의 구상에 대해 상세히 설명했다. “이름만 클릭하면 그의 신상 정보, 인맥, 관련 자료 등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기능”의 구현 가능성을 두고 오후 3시부터 새벽 2시까지 회의를 하기도 했다. 소프트웨어 사용자 간에 서로의 일정과 업무 정보를 투명하게 볼 수 있고 단문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소통하는 것도 어디까지 가능할지 토론이 길어지곤 했다.

‘이지원’으로 집약된 ‘뉴리더’

회의가 끝나면 선술집에 가서 소주잔을 기울였다. 1996년 신씨와 노무현은 ‘비슷한 처지’였다. 신씨는 군 제대 뒤 연인인 박씨와 결혼을 하려 했으나 ‘연상연하 커플’이라는 이유로 집안의 반대에 부딪혔다. 결국 집에서 도망나와 혼인신고만 한 채 살림을 차렸고 아이를 낳았다. 친구들끼리 차린 회사는 운영이 어려워 “앞날이 깜깜한” 시기였다. 노무현은 1992년 총선에서 부산 동구에 출마해 낙선한 뒤, 1995년 부산시장 도전에 또다시 실패한 직후였다. 술을 마실 때면 “다시는 정치 안 한다”며 한숨을 쉬기도 했다. “내가 정치에 뛰어들어서 가족에게 늘 미안하다”고도 했다. 그러다가도 “법으로만 해결할 수 없는 문제가 너무 많으니 정치로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신씨는 노무현에게 “바보 맞으시긴 하지만 언젠가 좋은 정치인이 될 것”이라고 위로했고, 노무현은 신씨에게 “사랑의 도피 행각은 아름다운 것이니 잘 살라”고 격려했다.

그렇게 3개월 만에 ‘뉴리더’가 완성됐다. 1997년 초였다. ‘뉴리더’가 성공하자 더 진보한 소프트웨어를 내놓기가 손쉬워졌다. ‘뉴리더’는 ‘우리들98’ ‘노하우2000’으로 계속해서 진화했다. 2002년 새천년민주당의 대통령 후보가 된 노무현은 선거 관리도 이런 소프트웨어를 기반으로 했다. ‘노하우2000’은 노무현재단의 ‘사람 사는 세상’ 홈페이지(www.knowhow.or.kr)로 발전했다. ‘뉴리더’ ‘우리들’ ‘노하우’의 기술력은 결국 참여정부의 전자정부 구상에서 핵심 시스템인 ‘이지원’으로 집약됐다.

하지만 신씨는 노무현이 대통령 후보가 되기 직전까지만 소프트웨어 제작에 참여했다. 이후에는 “욕심이 생길 것 같아” 대통령이 찾는다는 소식을 들어도 청와대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노무현이 소프트웨어 개발을 통해 실현하려던 가치는 세 가지다. 효율성·투명성·익명성을 기반으로 한 자유로운 소통이다. 특히 그는 ‘노하우2000’을 구상하면서 “누구나 접속해 글을 남길 수 있게 로그인 기능을 빼달라”고 주문했다. 개발자들마저 “그렇게 하면 악플이 많아질 것”이라고 우려했지만, 그는 “나는 반대 의견도 듣고 싶다”고 했다. 신씨는 “정치인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생각은 혁명적이었다”고 말했다.

“로그인 기능 빼달라, 반대 의견도 듣고 싶다”

신씨는 노무현이 못 이룬 ‘인터넷의 꿈’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차오른다.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도 잡혀가고 ‘김연아 회피 동영상’을 올려도 조사받는 시대에 “반대 의견도 들어야 한다”고 했던 그가 그립다. 하지만 ‘익명성’을 중시한 대통령이 정권 말기에 인터넷실명제를 실시했으니, 생각해보면 지독한 아이러니다. 정보 흐름의 ‘투명성’을 강조한 전자정부 시스템이 국가정보의 ‘기밀성’에 부딪혀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한 것도 안타깝다. 또한 노무현이 몇 년 전부터 ‘한 줄 블로그’ 방식의 단문 소통 시스템을 구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트위터 시대’가 이제야 온 것도 아쉽다. 신씨는 “노 전 대통령이 퇴임 직후 개설한 토론 사이트 ‘민주주의 2.0’은 그가 평소 원하던 대로 트위터 같은 단문 서비스 시스템으로 구축했어야 한다”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주기, 부부가 하늘로 140자 트위터를 쓴다. “그토록 원하셨던, 국민과 소통할 수 있는 소셜 네트워크 환경이 이제야 됐습니다. 이제 엔지니어 없이도 ‘@knowhow’ 계정으로 트위터 스타가 될 수 있는데…. 혼자 힘으로 다하려 애쓰는 모습, 안쓰러웠습니다. 쉽지 않은 일을 하다 가셨습니다. 아쉽고 너무 그립습니다.”

글 임지선 기자 sun21@hani.co.kr·사진 정용일 기자 yongi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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