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당부를 하나 하겠습니다. 피고인들의 행위(경영권 승계 목적의 초저가 신주 발행)는 실정법상 처벌 대상은 되지 않지만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높으니만큼 앞으로 국가 발전에 헌신해주기 바랍니다.” 지난 10월10일 이건희 전 삼성 회장에 대한 2심 선고공판에서 서울고법 서기석 부장판사는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 장면에서 나는 귀를 의심했다. 사회적 비난 가능성이 높은 행위를 반복적으로 저질렀다고 일껏 지적하고 나서 이어지는 말이 국가 발전에 헌신해달라는 당부라니, 내용상 어처구니없고 어법상으로도 어색했다. 잘못을 깊이 반성하고 평생 자숙하라는 따끔한 훈계가 자연스러운 것 아닌가.
더욱이 내용적으로는 유죄를 확신하면서도 기소 잘못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한 2심 재판부로서는 특검 수사 결과와 공판 과정에서 밝혀진 다음 몇 가지 정황을 들어 이건희 피고인을 엄하게 질책해야 마땅했다. 그래야만 판결 내용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법원이 최소한의 체면이라도 건질 수 있었다.
첫째, 피고인은 선대로부터 삼성전자와 삼성생명 등 주요 계열사의 주식을 차명으로 상속받아 막대한 상속세를 포탈했으며 그 후에도 실명 전환하지 않고 금융실명제법 위반죄를 저질렀다. 공소시효가 지나 처벌과 추징이 불가능하지만 범법 사실은 변함이 없다.
둘째, 피고인은 에버랜드와 SDS의 신주 저가 발행에만 책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에스원, 엔지니어링, 제일기획, 서울이동통신, e-삼성 등 경영권 불법 승계를 위해 동원된 다른 계열사들의 유사한 배임 행위에 대해서도 책임이 있다. 공소시효와 상관없이 범법 사실은 그대로 남는다.
셋째, 피고인이 이재용 등 자녀들에게 에버랜드와 SDS의 신주를 초저가로 특혜 발행해주고 그에 맞춰 에버랜드를 삼성생명의 지배주주로 삼아 순환 소유구조를 만들어준 결과 피고인은 단지 16억원을 세금으로 내고 이재용에게 그룹경영권을 통째로 물려줬는바, 여기에는 조세정의와 경제정의가 전혀 없다.
넷째, 피고인은 1996년 8월 전두환·노태우 비자금 사건으로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형을 확정받고 97년 8월 특별사면을 받은 전과 사실이 있다. 2003년 대선 때에도 피고인 명의의 천문학적인 대선 자금이 불법적으로 당시 한나라당 후보에게 전달된 사실이 드러났으니 상습적이다.
다섯째, 피고인은 형집행유예 기간 중인 96년 말 에버랜드 저가 발행을 단행했으며, 삼성차 부실경영의 폐해가 드러나고 에버랜드 저가 발행이 사회적으로 문제된 뒤인 99년 2월에 다시 SDS 저가 발행을 감행했다. 정상참작의 여지가 전혀 없다.
기업공개촉진법과 금융실명제법은 시대정신여섯째, 안기부 X파일의 폭로 내용과 김용철 변호사의 양심 고백에 따르면 피고인은 명절과 휴가철마다 뇌물성 ‘떡값’을 뿌리며 검찰 등 국가 사정기관의 상층부를 지속적으로 관리해왔다. 2004년 대선 자금 수사 기간 중에도 당시 청와대 법무비서관에게 ‘설날 떡값’이 전달된 사실은 특히 충격적이다.
위에 열거한 모든 정황들이 웅변해주듯이, 피고인은 국가와 사회가 어떤 상황에 처하건 상관없이 경영권 불법 승계, 정·관계 불법 로비, 비자금 불법 운용 등 고질적 불법 행태를 한 번도 반성하거나 중단한 적이 없다. 우리 재판부는 따라서 무죄선고와는 별개로 피고인이 자신의 행태를 깊이 뉘우치고 평생 자숙하며 살아갈 것을 당부하지 않을 수 없다.
1심이건 2심이건 의도적으로 봐주기 판결을 한 게 아니라면, 피고인을 세워놓고 최소한 이런 정도의 당부를 곁들이며 따끔하게 혼내줘야 주관적인 진정성이라도 인정받을 수 있는 것 아닌가. 하지만 1심의 민병훈 재판부와 2심의 서기석 재판부는 이건희 피고인에게 불리한 위의 정황들에 대해선 철저히 눈을 감고 대신 경제 발전과 체육 발전에 기여한 점 등 여섯 가지 ‘변론’을 늘어놓았다.
그뿐 아니다. 비자금 운용 과정의 탈세 혐의에 대해서 민병훈 부장판사는 경영권방어 목적 아래 진행된 특성상 통상적인 양도세 포탈 사안보다는 죄질이 경미하다고 판단했다. 이건희 회장에게 집행유예를 붙여주기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회장에 대해 1심 법원의 선고형을 고스란히 유지한 2심 재판부도 다르지 않다.
이 사건의 1·2심 법관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들인가. 이른바 경영권방어(승계 포함)를 위해 재벌 총수들이 약탈적 배임 행위와 상속·증여세 포탈을 일삼는다는 사실과 이를 다스리는 일이 회사법과 세법의 핵심 과제라는 사실을 정녕 모르는가. 더욱이 금융실명제법을 위반한 채 차명 상속 주식을 20년이나 남몰래 운용해온 게 어떻게 죄질이 경미한가.
이 부분은 단순히 넘어갈 일이 아니다. 기업공개촉진법과 금융실명제법은 기업소유 분산과 검은돈 차단을 요구하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정당한 법률이다. 따라서 두 법률의 취지와 규정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경영권방어 목적의 차명상속과 기타 불법 관행을 죄질이 경미하다고 판단한 1·2심 법관들은 의회와 법률을 경시하고 자신의 본분을 망각한 셈이다.
왜 하필 민병훈 판사가삼성 재판과 관련해 법원의 치사한 행태를 하나만 더 거론하자면, 이 사건이 경제사범 전담부서인 서울중앙지법 형사24부나 25부로 가지 않고 엉뚱하게 형사23부(부장판사 민병훈)에 배당된 사실이다. 민병훈 부장판사는 이미 오래전부터 저가 발행은 배임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주장을 하고 다닌 것으로 알려져 있다( 720호 표지이야기 참조).
한국 사법부의 자화상이 이처럼 짜부라지고 일그러져 있는 이상 한국 사회가 법과 상식이 존중받고 부패와 비리가 없는 정상적인 사회로 진입하는 건 불가능하다. 정상 사회는 무엇보다도 먼저 법치 사회이다. 법의 지배가 고상하다든가 진보적이라서가 아니다. 정상 사회가 법치주의를 기반으로 삼는 진짜 이유는 법치주의의 일차적 대상이 평범한 시민이 아니라 국가와 사회의 권력자라는 데 있다. 법치주의의 실현은 전적으로 권력자, 그것도 최강자의 부패·비리에 대해 동등한 법의 잣대를 적용할 수 있는지에 달려 있다.
법치주의에 뿌리를 둔 정상 사회는 법의 성격상 본래 보수 주류의 사회 이념이다. 하지만 강자의 부패·비리가 횡행하는 비정상 사회에서는 강자의 부패·비리부터 엄히 다스리는 정상 사회화의 경로가 이념의 좌우와 정책의 보수·진보를 가로질러 최우선순위의 사회 과제로 등장한다. 현실정치에서도 ‘정상 사회=법치주의’는 ‘반부패=기득권 약화’를 요구하는 강력한 개혁 지향성의 원천으로 작용한다.
정상 사회는 법치사회이므로 정상 사회로 갈수록 법의 해석자이자 불의의 심판자이며 정의의 회복자인 법관의 권위는 높아지는 법이다. 안 그래도 분쟁 당사자와 방청객들은 재판부의 입정과 퇴정을 일어서서 맞이한다. 생사여탈권을 가진 무서운 국가권력이 이렇듯 행복하게 권위와 결합한 사례는 사법부 바깥에선 발견되지 않는다. 사법부와 법관에 거는 국민의 기대는 그만큼 크다.
실제로 좋은 판결은 하루아침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신장시키고 국민의 영혼을 맑게 한다. 반면 나쁜 판결은 하루아침에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며 국민의 영혼을 오염시킨다. 문제는 엘리트 법관들이 정의롭고 현명한 사람이라는 보장이 어디에도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법관들이 그저 좋은 판결을 내려주기를 목 빼고 기다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일반 시민의 사법 참여와 사법 감시 활성화가 필수적이라는 얘기다.
다시 강조하거니와 강자의 부패 비리에 엄격하고 약자의 권리 보호에 민감한, 독립적이고 책임 있는 사법부를 만들기 위해서는 모든 권력은 외부의 감시와 통제가 없이는 조만간 부패한다는 경험칙에 충실해야 한다. 이 점에서 우리나라 사법부는 몹시 취약하다. 대법원장의 권력이 지나치게 비대한 반면 내·외부의 통제와 감시 장치는 찾아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내외부의 감시·통제로 바로잡아야다행히 1990년대 이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사법부는 정치권력과 공안기관으로부터 독립성을 획득했다. 하지만 이제는 사법부 내부의 위계권력과 시장의 자본권력으로부터 독립성이 요구된다. 이를 위해선 더 발본적인 사법부 개혁이 필요하다. 전관예우와 반말 짓거리, 그리고 ‘유전무죄 무전유죄’로 대표되는 사법권력의 부패와 오만은 내·외부의 감시·통제 장치, 특히 시민 참여와 감시 기제의 강화로만 바로잡을 수 있다. 법과 정의가 입맞춤하고 상식과 법리가 일치하는 정상 사회는 이럴 때만이 우리 눈앞의 현실이 될 것이다.
곽노현 한국방송통신대 교수·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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