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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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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는 현충원을 하루에 두번 가셨습니다

땡볕 아래 호국웅변대회
등록 2012-06-06 14:08 수정 2020-05-03 04:26

“옆집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셨습니다. 할머니 집 대문에는 언제나 태극기가 걸려 있었습니다. 어느 날 대문 앞에 쓸쓸히 서 계시는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인사를 드렸더니 인자한 미소로 받아주셨습니다. 그날 밤 저는 어머니에게서 옆집 할머니의 사연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국군이셨던 할머니의 남편이 6·25 때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지난해 현충일에 저는 할머니를 모시고 국립현충원에 갔습니다. 줄지어 선 묘비들 사이에서 남편의 묘비를 찾은 할머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저는 할머니의 손을 꼭 잡아드렸습니다.”

뭐, 대략 이런 내용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학내 호국웅변대회였다. 5월이었던가 6월이었던가. 땡볕이 짜증났다. 운동장 한가운데 전교생을 반별로 앉혀놓았다. 반 대표였나, 학년 대표였나가 연단에 나가서 ‘옆집 할머니 드립’을 펼쳤다. 도대체 저놈이 무슨 오지랖으로 옆집 할머니까지 챙겼겠느냐고 수군거렸다. 자기가 알기로는 저 녀석은 엄마한테도 불효하는 놈이라는 증언이 나왔다. 뭐, 호국웅변 내용은 늘상 그랬으니까.

다음 연사가 연단에 섰다. “옆집에 할머니 한 분이 살고 계셨습니다.” 더워 늘어져 있던 운동장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혼자 사는 옆집 할머니가 이렇게 많았냐. 정부는 뭐하는 거냐” “아까 그놈이랑 이놈 집 사이에 그 할머니가 살고 계신 것이냐”. 쭈그리고 앉아서 500원짜리 일본 불법 복제 미니만화책을 돌려보던 녀석들이 논리적으로 씨부리기 시작했다. 결국 옆집 할머니는 또 한 번 현충원에 끌려가는 것으로 웅변은 끝났다. “옆집 할머니는 하루에 현충원을 오전·오후 두 탕을 뛰신 것이냐” “그러다 할머니 잡겠다” “니놈들 무서워서 그날 이후로 태극기를 내렸다더라”. 조악하고 뻔한 웅변 내용에 운동장 여기저기서 비웃음이 터져나왔다. 앞에 서 있던 선생님들도 피식거렸다. 뭐, 어쩌겠나. 이미 달달 외워온 웅변 원고를.

호국보훈의 달이 다가오면 반공글짓기, 반공포스터, 반공·호국웅변대회가 넘쳐나던 시절이 있었다. 공부 좀 하고, 그림 좀 그린다 싶으면 선수로 차출됐다. 특히 웅변대회는 소재의 빈곤이 경악하리만치 두드러졌다. 믿기지 않는 내용도 많았다. 자기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존재가 의심스러운 큰할아버지를 들고 나왔다. 그마저도 안 되면 옆집, 앞집, 뒷집을 마구잡이로 동원했다. 어찌나 이웃집 사정을 잘 아는지, 오가작통법, 오호감시제라도 이랬을까 싶었다. 어쨌든, 이웃집의 존재가 의식을 규정하는 시대였다.

이런 유의 웅변은 1990년대 초반 남북관계가 변화하며 사라지기 시작했다. 1992년 6월25일치 기사를 보면 “해마다 되풀이되던 반공 글짓기대회, 웅변대회 등 북한에 대한 적개심을 불어넣던 행사들이 자취를 감추고 민족공동체 의식을 높이는 통일교육으로 바뀌기 시작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러나 1994년 ‘1차 북핵 위기’가 가열되자 보수단체 등에서 또다시 반공글짓기를 들고 나왔다. 2012년 이명박 대통령도 반공 대열에 합류했다. 누가 듣는지도 모르는 라디오 연설에서 힘주어 외쳤다고 한다. 옆집 할머니가 살아 계시다면 올해 현충일도 바쁘시겠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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