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의 국정농단을 비판하는 2016년 촛불집회는 만민공동회 같았다. 광장 곳곳에 시민발언대가 섰다. 그곳에선 10대 학생이 사회개혁을 말했고, 평생 단 한 번도 집회에 나온 적 없다는 노인이 정부를 규탄했으며, 여성과 성소수자가 삶에서 부딪히는 문제의 해결을 촉구했다. 엔(n)개의 발언이 각자의 자리에서 피어올라 사람들에게 가닿았다. 하지만 집회는 시간이 갈수록 급속하게, 국정농단으로 무너진 나라를 정상 국가로 복원해야 한다는 하나의 당위로 결집했다. 그다음에 이어진 과정은 우리 모두 알고 있다. 박근혜 정권은 탄핵됐지만, 촛불의 열망을 흡수하고 들어선 “민주당 정권의 개혁은 지지부진했고 부동산값 폭등에서 보듯 서민의 삶은 곳곳에서 파열음을 울렸다. 정권의 도덕적 위선 앞에서 사람들의 가슴은 차갑게 식어갔다”.(이번호 표지이야기)
내란죄 피의자인 ‘윤석열 탄핵’을 외친 2024년 응원봉 집회는 ‘임을 위한 행진곡’보다 ‘다시 만난 세계’가, 촛불보다 응원봉이 주류가 된 최초의 대규모 시민 집회다. 이번 집회에는 크게 봤을 때 세 가지 정체성을 지닌 사람들이 모였다. 하나는 윤석열과 같은 내란범이 등장했을 때 바로 내란을 저지할 수 있도록 국민의힘 세력을 의회에서 몰아내고 더불어민주당에 지금보다 많은 의석을 안겨야 한다는 사람들이고, 다른 하나는 여성과 장애인, 성소수자, 기후시민 등과 같이 12·3 내란사태 이전에도 늘 광장에 서서 싸웠던 사람들이다. 마지막 하나는 뜬금없는 내란사태로 사라진 나와 나의 최애(가장 사랑하는 대상)의 평온한 일상을 되찾기 위해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빛’(응원봉)을 들고 나온 사람들이다. 여기에는 2030 여성이 가장 많았다.
2024년 응원봉 집회는 2016년 촛불집회와 달리 어느 하나의 목소리가 주류가 되어 다른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았다. 여성과 성소수자, 장애인 등이 집회 발언대에 섰을 때, 최소한 시민들 사이에서 ‘내란범 윤석열부터 탄핵하고 당신들의 요구는 나중에’라는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8년 동안 이뤄진 한국 사회의 의미 있는 진보다.
정치는 이 의미 있는 진보를 어떻게 받아안을 수 있을까. 크게 두 가지가 요구된다. 하나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의회와 시민에게 분산하는 정치제도 개혁이다. 이를 위해선 거대 양당을 중심으로 상대의 과오를 자양분 삼아 극단적 대결 정치를 펼치게 하는 승자독식의 선거제도를 비례성과 다양성을 확보할 수 있는 새로운 선거제도로 바꿔야 한다. 개헌을 통해 대통령제를 품고 있는 87년 체제의 퇴장을 논의할 필요도 있다.
다른 하나는 그동안 거대 양당 중심의 정치가 외면했던, 늘 광장에 서 있던 다양한 주체들의 요구를 제도화하는 것이다. 이 제도에는 차별금지법, 7대 장애인권리입법(장애인권리보장법, 권리중심공공일자리지원특별법, 교통약자이동권보장법, 발달장애인법, 장애인자립생활권리보장법, 장애인평생교육법, 특수교육법), 2019년 헌법재판소의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6년째 입법 공백 상태에 있는 낙태죄 보완입법, 근로기준법의 적용 대상을 불안정 노동자에게 확대하는 ‘일하는 사람 기본법’ 등이 있다.
이 두 가지 요구가 함께 이뤄질 때, ‘나의 평온한 일상’은 나만의 것이 아니라 광장을 구성한 모두의 것이 될 수 있다.
이재훈 편집장 nang@hani.co.kr
※‘만리재에서’는 편집장이 쓰는 칼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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