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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식 디스켓 사용법

대세였던 3.5인치 디스켓
등록 2012-05-10 16:55 수정 2020-05-03 04:26
한겨레 자료

한겨레 자료

무지하게 술을 퍼마셨다. ‘나 죽는다’며 기자실 의자에 처박혀 있는데, 아침부터 타사 기자들이 시끄럽게 설친다. 부지런한 애들이 아닌데 이상했다. ‘일식’을 보겠다고 난리였다. 갑자기 어제 먹은 일식이 넘어오려 했다.

2009년 7월22일 오전 부분일식이 있었다. 1948년 이래 국내 최대 규모라고 했다. 닳아없어질 해도 아니고, 못 보면 좀 어떠나 싶었다. 밖에 나간 타사 기자들이 눈이 아프다며 꺄오꺄오거렸다. 니들이 무슨 울트라맨이냐. 노려본다고 해가 보이게. 축에서 빠지면 죽도 밥도 못 얻어먹는다. 기자실 책장을 뒤졌다. 저기 구석에서 3.5인치 플로피디스켓이 몇 장 보였다. 계보학적 탐사를 해보니 전임, 전임, 전임, 전임 기자 누군가가 ‘제보’라며 받았던 디스켓이 분명했다. 고고학적 가치가 없었다. 주저 않고 반으로 쪼갰다. 동그란 마그네틱 필름이 나왔다. 아이고 머리야.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꺄오꺄오거리는 인간들 사이에서 흡사 ‘라이방’ 선글라스 끼듯 안경알 안쪽에 마그네틱 필름을 폼나게 걸쳤다. 해를 품은 달이 눈에 들어왔다. 어우 쏠린다, 연우야.

요즘 3.5인치 디스켓을 쓰는 사람이 있는지 모르겠다. USB가 대세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하긴 USB마저 귀찮은 시대가 됐다. 인터넷상에서 웬만한 저장이 가능하니 보조 기억장치라는 게 딱히 필요할런가. 2000년대 초반부터 3.5인치 플로피디스크 드라이브를 탑재하지 않은 노트북이 나왔다. 3.5인치 디스켓 한 장의 용량은 1.44MB였다. 대충 사진 파일 몇 가지를 얹다 보면 ‘디스크가 꽉 찼다’는 혈압 돋는 문구가 튀어나왔다. 요즘 같으면 스마트폰으로 찍은 사진 한 장도 저장하지 못할 용량이다(그러니, 2MB는 얼마나 저용량인가. 보고 있나?). 잘 깨져서 애써 작성한 리포트를 날려먹기도 했다. 5.25인치 플로피디스켓으로 부채질하던 때를 생각하면 양반이었지만. 일반 카세트테이프에 게임을 저장하던 1980년대는 더 아득하다.

‘물경’ 700MB짜리 CD가 세상을 평정했던 때도 있었다.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방망이 깎던 노인’을 엎어친 ‘CD 굽는 노인’이라는 글이 떠돌았다. “용산역 맞은편 길가에 앉아 게임 CD를 구워서 파는 노인이 있었다. …그는 잠자코 열심히 이미지를 뜨고 있었다. 처음에는 빨리 뜨는 것 같더니 저물도록 이리 클릭하고 저리 클릭하고 굼뜨기 시작하더니 마냥 늑장이다. …집에 와서 CD를 내놨더니 아내는 이쁘게 구웠다고 야단이다. 싸구려 벌크 CD로 구우면 얼마 못 가서 인식이 잘 안 되다가 데이터가 쉬이 날아가며, 무리하게 고배속으로 구우면 다운이 잘되고 동영상이 끊기기 쉽단다. 요렇게 꼭 알맞은 것은 좀체 만나기 어렵다는 것이다. …그다음 상경하는 길로 노인을 찾았다. 그러나 단속이 떠서 노인은 있지 아니했다.” 1999년이던가. 나와 이세영 기자는 아마도 CD 굽는 노인이 구웠을 과 게임을 책보다 열심히 팠다. 상대방이 치사한 ‘치트키’를 쓰지 않는지 끊임없이 의심하며.

그 많던 디스켓은 누가 다 버렸을까. 어느 날 무심코 쳐다본 책장 한 귀퉁이. 균형 잡겠다며 3.5인치 디스켓 한두 장이 끼어 있다면 사진이라도 찍어두자. 소니가 2011년 3월부터 3.5인치 디스켓 생산을 중단했다는 기사가 보인다.

김남일 기자 namfic@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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