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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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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여, 묻지 마라 “흑인 여성 대통령 받아들일 준비가 됐나”

대선 후보 확정된 현직 대통령이 후보직 사퇴한 초유의 사태에 ‘단합’ 목소리 커진 결과, 해리스 약진
등록 2024-07-27 10:49 수정 2024-07-27 11:57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024년 7월23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첫 단독 유세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미국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024년 7월23일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첫 단독 유세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암살 위협을 이겨낸 ‘돌아온 영웅’과 말도 제대로 못하는 ‘병약한 노인’의 대결로 굳어지던 미국 대선 판도가 송두리째 뒤집혔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직 사퇴 직후 삽시간에 민주당을 장악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은 불과 사흘 만에 대선 후보 지명을 사실상 확정지었다. 이제 2024년 11월 미국 대선은 ‘전직 검사 대 범죄자’ ‘소수인종 출신 여성 대 백인우월주의자 남성’의 대결 구도로 바뀌었다. 불과 일주일 만에 미국이, 세상이 달라졌다.

 

바이든 ‘결단'에 영향 준 블루랩스 보고서

 

“오늘 아침까지 민주당 대선 후보로 선출되기 위해 필요한 대의원을 모두 확보했다.”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을 대선 후보로 확정한 공화당 전당대회(2024년 7월15~18일)가 열렸던 위스콘신주 밀워키에서 2024년 7월23일 첫 단독 유세에 나선 해리스 부통령은 이렇게 말했다. 장고를 거듭하던 바이든 대통령이 7월21일 후보 사퇴를 전격 발표한 직후만 해도 해리스 부통령이 이 정도로 빠르게 상황을 장악할 수 있을 것이란 전망은 많지 않았다. 정치 전문매체 <폴리티코> 등이 입수해 보도한 바이든 대통령의 ‘결단’에 결정적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여론 분석기관 ‘블루랩스’의 보고서를 보면, 적어도 4명이 해리스 부통령보다 ‘당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직후인 2020년 8월12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을 러닝메이트로 지명한 직후인 2020년 8월12일 델라웨어주 윌밍턴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블루랩스 쪽은 후보 사퇴론이 본격화한 7월5일부터 12일까지 네바다·애리조나·위스콘신 등 7개 격전지(스윙스테이트)에서 1만5천 명을 상대로 바이든 대통령을 포함한 민주당 대선 후보군과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 간 대결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민주당 대체 후보군 모두 바이든 대통령보다 평균 3%포인트 지지율 우위를 보였다. 특히 40살 이하 젊은층(12%포인트)과 무당파층(9%포인트), 2020년 대선 이후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유권자층(10%포인트)에서 바이든 대통령보다 대체 후보군에 대한 지지율이 높게 나타났다. 블루랩스 쪽은 “이들 세 집단은 후보 교체가 안 되면 투표에 참여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유권자층”이라고 짚었다.

해리스 부통령도 바이든 대통령보다 지지율이 높게 나왔지만, 대체 후보군 지지율 평균치를 밑돌았다. 반면 그레천 휘트머 미시간 주지사와 조시 셔피로 펜실베이니아 주지사, 웨스 무어 메릴랜드 주지사와 마크 켈리 연방 상원의원(애리조나주) 등은 바이든 대통령을 5%포인트 이상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바이든 대통령이 사퇴 발표와 함께 해리스 부통령 지지 의사를 밝혔지만, 8월 전당대회 전에 경선을 다시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 것도 이 때문이다.

해리스 부통령 쪽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사상 처음으로 대선 후보로 확정된 현직 대통령이 후보직을 자진 사퇴하면서, ‘단합’을 호소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바이든 대통령의 러닝메이트인 해리스 부통령의 후보직 승계를 지지하는 당내 여론이 모이기 시작했다. 2016년 대선 후보였던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을 비롯한 당내 원로의 지지 선언이 꼬리를 물었다. 애초 재경선을 주장했던 낸시 펠로시 전 하원의장도 해리스 부통령 지지 쪽으로 돌아섰다. 유력 대체 후보군으로 거론된 휘트머 주지사 등 4명 모두 해리스 부통령 지지를 선언했다. 7월23일엔 척 슈머 상원 원내대표와 하킴 제프리스 하원 원내대표 등 원내 지도부가 동반 지지선언을 발표했다.

 

사상 첫 아프리카계, 남아시아계, 여성

 

정치자금 모금에도 불이 붙었다. <시비에스>(CBS) 방송은 “바이든 대통령의 후보 사퇴 뒤 24시간 만에 88만8천여 명이 정치자금 8100만달러를 기부했다. 사상 최고 기록”이라고 전했다. 전당대회에서 대선 후보를 확정지을 대의원들도 마음을 굳힌 것으로 보인다. <뉴욕타임스>는 7월23일 민주당 전당대회 대의원 250여 명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에서 해리스 부통령이 대선 후보로 선출되는 것에 대해 78%가 ‘매우 만족한다’고 답했다고 전했다. 같은 조사에서 대의원의 61%는 ‘경선을 치르지 않고 후보직을 승계해야 한다’고 답했다. 해리스 부통령이 사실상 민주당의 새 대선 후보로 확정됐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다.

2024년 7월23일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방문한 위스콘신주 웨스트앨리스 고등학교에서 지지자들이 손팻말을 든 채 환호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4년 7월23일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방문한 위스콘신주 웨스트앨리스 고등학교에서 지지자들이 손팻말을 든 채 환호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부통령에 당선되기 전 연방 상원의원이었다. 그에 앞서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에 선출됐고, 그 전엔 공판검사로 일했다. 온갖 범법자를 다 상대해봤다. 여성을 학대하는 성범죄자, 소비자를 등 치는 사기꾼,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을 어기는 불한당까지. 도널드 트럼프 같은 부류의 사람을 잘 안다고 감히 말씀드린다.” 해리스 부통령의 발언에 유세장을 가득 메운 지지자들이 환호성을 울리며 박수를 쳤다. “(트럼프 전 대통령을) 감옥으로 보내라”라는 구호가 메아리쳤다. 100여 일 앞으로 다가온 미국 대선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새롭게 시작됐음을 알리는 자리였다.

해리스 부통령은 1964년 10월 캘리포니아주 오클랜드에서 아프리카계 자메이카인 아버지(경제학자)와 인도인 어머니(생리학자) 사이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버클리 캘리포니아대학 유학생으로 만난 부모는 그가 7살 때 이혼했지만, 양육권을 맡은 어머니는 그를 ‘흑인 여성’으로 키웠다. 12살 때 어머니가 캐나다 맥길대학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그는 청소년기를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퀘벡의 몬트리올에서 보냈다. 고교 졸업 뒤 그는 유서 깊은 흑인 고등교육기관인 워싱턴디시(DC)의 하워드대학에 진학했다. 대학에서 정치학과 경제학을 전공한 그는 헤이스팅스(현 샌프란시스코) 캘리포니아주립대학 법학전문대학원에 입학했다. 그는 대학원 시절 전미흑인법학생협회(NBLSA) 지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1990년 캘리포니아주 앨러미다에서 검사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8년 샌프란시스코 검찰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 무렵 그는 살인·절도·강도·성범죄 등 강력 사건을 전담한 것으로 전해진다. 2002년엔 ‘소수인종’으론 처음으로 샌프란시스코 지청장에 당선됐고, 2010년엔 캘리포니아주 법무장관에 출마해 ‘사상 첫 아프리카계, 남아시아계, 여성’이란 수식어를 달고 당선됐다. 이어 2016년 민주당 내에서 ‘진보파의 사자’로 불리던 바버라 복서 의원의 은퇴로 공석이 된 연방 상원의원에 도전해 당선됐다.

 

트럼프와 대조되는 특성이 정치적 자산

 

중앙 정치무대에서 전국적 지명도를 갖춘 해리스 부통령은 2019년 1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출마 선언 뒤 24시간 만에 선거자금 150만달러를 모으며 여론의 관심을 모았다. 앞서 2016년 대선 때 민주당 경선에서 돌풍을 일으킨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세운 기록과 동률이었다. 선거운동 초반 약진했던 그는 지지율 정체 속에 어려움을 겪다가 당내 경선이 공식적으로 시작되기 직전인 같은 해 12월 결국 출마 포기를 선언했다. 그는 2020년 3월 바이든 대통령 지지를 공식 선언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024년 3월26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랄리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환하게 웃으며 얼싸안고 있다. EPA 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이 2024년 3월26일 노스캐롤라이나주 랄리에서 열린 선거 유세에서 환하게 웃으며 얼싸안고 있다. EPA 연합뉴스


2020년 5월 흑인 조지 플로이드(당시 46살)가 백인경찰의 과잉 진압과정에서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그가 마지막 남긴 “숨을 쉴 수 없다”는 말을 구호 삼아 미국 전역에서 인종차별 반대 시위가 들불처럼 번졌다. 민주당 대선 후보로 사실상 확정된 바이든 대통령은 ‘흑인 여성’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해야 한다는 여론에 직면했다. 경찰 출신 밸 데밍스 하원의원(플로리다주)과 검찰 출신 해리스 당시 상원의원이 유력한 후보로 물망에 올랐다. 그해 8월 전당대회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해리스 의원을 ‘사상 첫 여성 소수인종’ 러닝메이트로 지명했다.

“민주당은 이제 곧 흑인이자 남아시아계 여성을 백인우월주의자인 전직 대통령과 맞설 대선 후보로 선출할 것이다. 부모가 이민자인 후보와 집권하면 이민자를 집단 추방하겠다고 벼르고 있는 외국인 혐오 후보 간 대결이다. 성범죄자를 기소했던 여성과 강간범으로 판명난 성범죄자 간 대결이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강력하게 옹호하는 후보와 자신이 (낙태권을 여성의 권리로 인정한 대법원 판례인) ‘로 대 웨이드’ 사건을 뒤집은 장본인이라고 자랑하는 후보 간 대결이기도 하다.”

미국 진보매체 <네이션>은 7월23일 “‘미국은 흑인 여성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이렇게 짚었다. 이 매체는 “앞으로 몇 주, 몇 달 동안 ‘미국은 흑인 여성 대통령을 받아들일 준비가 됐느냐’는 질문이 끊임없이 반복될 것이다. 이미 ‘아니요’란 답을 가진 사람들이 그 질문을 하게 될 것”이라며 “미국의 현재를 상징하는 인물과 미국의 과거에서 온 복수의 유령이 맞붙게 됐다. 트럼프 전 대통령과 대조되는 모든 점이 해리스 부통령의 가장 큰 정치적 자산이 될 것”이라고 덧붙였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2024년 7월22일 델라웨어주 뉴캐슬의 공군기지에서 공군 2호기(부통령 전용기)에서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오른쪽 위)와 함께 내리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카멀라 해리스 미국 부통령이 2024년 7월22일 델라웨어주 뉴캐슬의 공군기지에서 공군 2호기(부통령 전용기)에서 남편 더글러스 엠호프(오른쪽 위)와 함께 내리며 거수경례를 하고 있다. AFP 연합뉴스


‘색깔론’ 꺼내든 공화당과 트럼프

 

<로이터> 통신은 7월23일 여론조사 전문기관 입소스와 공동으로 실시한 최신 조사에서 해리스 부통령(44%)이 트럼프 전 대통령(42%)을 오차범위 안에서 앞섰다고 전했다. 공화당은 즉각 ‘총공세’에 나섰다. 팀 버쳇 하원의원(테네시주)은 해리스 부통령을 “(다양성·평등·포용을 뜻하는) 디이아이(DEI) 부통령”이라고 불렀다. 소수인종이자 여성이란 점 덕분에 부통령직에 올랐다는 야유다. 트럼프 전 대통령도 직접 나섰다. 이례적으로 전화 기자회견을 자청한 그는 “(해리스 부통령은) 극단적인 좌파다. 국민은 나라를 파괴할 극단적 좌파를 원치 않는다. 그는 국경을 개방하려고 한다. 그는 아무도 원치 않는 일을 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색깔론’은 불리할 때 주로 쓴다. 판세가 바뀌긴 바뀐 모양이다.

정인환 기자 inhwa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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