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시예비치는 1948년 우크라이나에서 태어나 벨라루스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벨라루스인, 어머니는 우크라이나인이다. 대학 졸업 뒤 기자가 됐고, 틈틈이 문학작품을 썼다. 알렉시예비치는 1994년 집권해 28년째 독재권력을 움켜쥔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정권과 맞서면서 반체제 인사로 탄압받았다. 2020년부터는 독일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다. 2022년 2월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일주일 뒤, 알렉시예비치는 독일 언론 인터뷰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범죄이며, 이를 지원한 벨라루스도 더는 독립국이 아니라 침략국”이라고 비판했다.
#2. 2022년 4월21일, 러시아군은 우크라이나 동남부의 전략적 요충지 마리우폴을 점령했다고 선언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마리우폴 ‘해방 작전’이 성공적으로 종료됐다”고 했다. 군에는 우크라이나의 최후 저항군이 갇힌 아조우스탈 제철소를 “파리 한 마리도 통과하지 못하도록 봉쇄하라”고 지시했다. 앞서 러시아는 마리우폴에 “목숨을 건질 유일한 방도는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는 것뿐”이라고 최후통첩을 한 바 있다. 전기와 가스는커녕 식량과 물도 없이 도시에 남아 있는 시민 10만여 명의 운명도 불투명하다. 전쟁은 인간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4월 초 키이우 일대에서 러시아군의 민간인 학살이 드러난 뒤 평화회담은 사실상 무산됐다. 국제사회는 러시아에 전쟁을 멈추라고 압박하지만, 푸틴의 귀에 가닿지 않는다. 그 와중에 가장 약한 이들부터 죽어나간다. 푸틴은 그 참혹한 대가를 감당할 수 있을까? 알렉시예비치는 자신과 인터뷰했던 한 여성 전사의 일기장에 적힌 문장을 앞서 소개한 책의 본문 첫 페이지에 인상 깊게 인용했다. “사람이 전쟁보다 귀하다.” _편집자주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한 러시아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공론장에서는 이미 유죄 선고를 받은 셈이나 다름없다. 2022년 4월7일, 유엔은 긴급 특별총회를 열어 러시아의 유엔 인권이사회 이사국 자격을 정지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유엔 인권이사회에서 이사국이 퇴출당한 것은 2011년 ‘아랍의 봄’ 당시 반정부 시위대를 폭력 진압한 리비아에 이어 두 번째다. 앞서 3월에는 유엔총회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고 철군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찬성 141표, 반대 5표, 기권 35표의 압도적 지지로 가결됐다. 또 우크라이나를 시작으로 폴란드, 독일, 발트3국(리투아니아·라트비아·에스토니아), 프랑스, 스웨덴, 노르웨이, 스위스 등 유럽 각국이 러시아의 전쟁범죄 혐의에 대해 독자적인 조사에 착수했다.
러시아에 대한 경제제재도 전방위로 이어졌다. 2022년 2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직후부터 미국과 유럽은 러시아 금융기관과 대기업들의 역내 자산 동결, 수출 통제, 신흥재벌 ‘올리가르히’ 등에 대한 자산 압류의 범위와 강도를 계속 확대하고 있다. 모두 제재 주체가 결정해 합의하고 실행하면 가능한 일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침략전쟁과 전쟁범죄에 실제로 사법적 책임을 지우는 건 다른 문제다. 국제법정을 꾸려야 하고 재판에서 채택될 증거를 충분히 수집해야 한다.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러시아의 모든 전쟁범죄를 확인할 것이다. 우리에겐 매우 분명한 임무가 있다”고 벼른다. 러시아는 자국을 단죄하는 국제법정을 인정할 리 없다. 재판이 열린다 해도 러시아의 전쟁범죄가 입증되고 책임자들이 즉각 처벌받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전망이 우세하다. 최대 장벽은 증거 감식과 입증이 까다롭고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이다. 이와 관련해 우크라이나 주민들이 촬영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린 사진과 영상의 전쟁범죄 증거 효력에 관심이 쏠린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 국민의 70% 이상이 인터넷에 접근할 수 있는 점에 주목하며 우크라이나가 이른바 ‘사용자 생산 증거물’(User-Generated Evidence)의 시험 사례가 될 거라고 본다고 미국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이 최근 보도했다. 멀리는 2013년 11월 우크라이나 국민이 빅토르 야누코비치 당시 대통령의 친러 정책에 반대해 벌인 ‘유로마이단 혁명’ 당시 스마트폰 카메라로 촬영된 전쟁범죄 의혹까지 국제형사재판소(ICC)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은 소셜미디어 게시물이 전쟁범죄를 입증하는 데 필요한 법의학적 증거와 문서 등을 대체하지는 못한다. 사진이나 영상에는 범죄행위의 실제 책임자가 누군지 명확한 정보가 담겨 있지 않다. 상급 지휘관과 최고 지휘부에 대한 기소 물증으로 채택되기 쉽지 않은 이유다.
전례가 없지는 않다. 1999년 옛 유고슬라비아 연방이던 세르비아의 자치주 코소보가 인접국 알바니아와 민족·종교 갈등으로 충돌한 전쟁에서 세르비아가 자행한 인종학살을 심판한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에서도 영상 촬영물이 큰 몫을 했다. 미국의 전쟁범죄 전문 검사 클린트 윌리엄슨은 “당시 코소보에서 알바니아로 밀반출된 (학살 촬영) 비디오 영상이 재판에 매우 도움이 됐다”며 “당시 사람들은 투박한 VHS 카메라를 사용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가진 스마트폰으로 같은 일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윌리엄슨은 현재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전쟁범죄에 대한 미국·유럽연합 합동수사를 이끌고 있다.
법정에서 소셜미디어의 역할도 점점 커지는 분위기다. 2017년 국제형사재판소는 2011년 리비아 내전 당시 민병대 사령관 마무드 알웨르팔리의 전쟁범죄 행위를 휴대전화로 촬영한 영상이 페이스북에 올라온 것을 근거로 그를 기소하고 체포령을 내렸다. 영상에는 웨르팔리가 부하들에게 두건을 쓰고 팔이 묶인 수감자 33명을 살해하라고 지시하고 일부는 직접 사살하는 장면이 담겼다. 수배 중이던 웨르팔리는 2021년 리비아에서 괴한의 총격에 살해됐다.
국제변호사협회의 ‘목격자’ 프로젝트를 이끄는 웬디 베츠 변호사는 “2011년 시리아 내전은 디지털 화면으로 포착·기록된 첫 전쟁 중 하나지만, 소셜미디어 게시물을 전쟁범죄 기록물로 인정하는 데는 장래성과 함정이 공존한다”고 지적했다. 사진과 영상이 사건 발생 순간과 조사관의 사후 현장 감식의 거리를 좁힐 수 있지만, 디지털 기록물은 쉽게 조작될 수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기록물의 효율적이고 유용한 활용을 지원하는 비영리 국제단체 니모닉의 ‘시리아 아카이브’를 보면, 10년 넘는 내전 동안 수집된 360만 개 영상 중 분석이 끝난 기록은 65만여 개, 그중 ‘진짜’ 판정을 받은 것은 8249개(약 0.013%)뿐이다.
국제형사재판소가 푸틴 러시아 대통령, 또는 러시아군 지휘관들을 전쟁범죄나 집단학살 혐의로 기소할지는 충분한 증거 수집과 국제 여론의 향방이 어느 정도 영향을 미치겠지만, 그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러시아는 군사 강국이며,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향후 전개와 평화협상, 국제사회의 정치적 판단과 의지가 훨씬 더 중요하게 작용할 전망이다.
‘정보 제공 금지 법’까지 제정했던 미국의 변화이와 관련해 4월11일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푸틴을 단죄하려 20여 년 만에 국제형사재판소를 지원하는 방안과 법적 가능성을 검토 중이라고 전했다.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 회원국이 아니다. 2000년 빌 클린턴 정부 시절 국제형사재판소 설립 협약에 서명했지만 자국민이 기소당할 수 있다는 이유로 비준하지 않았다. 이어 2002년 조지 부시 행정부는 협약 자체에서 탈퇴했다. 당시 공화당 다수 의회는 국제형사재판소가 미군의 잔혹 행위 조사를 추진한다는 이유로 자금과 물품 지원, 정보 제공을 금지하는 법까지 제정했다. 다만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범죄에 국제사회의 단죄에 대한 지원이 가능하다는 예외 조항을 두었다. <뉴욕타임스>는 바이든 정부가 현행법 테두리 안에서 지원 방안을 검토하고 있지만 필요하다면 법 개정도 추진할 수 있다고 전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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