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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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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중심 흔들려는 푸틴의 도박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으로 유럽 세계는 다시 불확실성 속으로
등록 2022-03-05 02:09 수정 2022-03-05 02:10
2022년 2월28일 우크라이나 북부 이반키우 근처에서 러시아군의 장갑차량 등 무기와 보급품 수송 트럭들이 긴 행렬을 지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미국의 위성사진에 포착됐다. REUTERS 연합뉴스

2022년 2월28일 우크라이나 북부 이반키우 근처에서 러시아군의 장갑차량 등 무기와 보급품 수송 트럭들이 긴 행렬을 지어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 쪽으로 향하는 모습이 미국의 위성사진에 포착됐다. REUTERS 연합뉴스

101년 만에 러시아군이 키이우를 에워쌌다. 폭격에 폐허로 변한 건물에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지하철역에선 피란민이 텐트를 치고 쪽잠을 잔다. 난민은 일주일 만에 100만 명을 넘어섰다.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제국이 무너지고 18세기 말부터 러시아 땅이던 우크라이나는 짧은 독립을 맞았다. 전열을 정비한 소련의 붉은 군대가 우크라이나를 다시 점령한 것이 1921년. 그 뒤 한 세기가 지나 다시 소련군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101년 만에 다시 쳐들어간 러시아군

2014년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에서 친러시아 대통령을 몰아낸 ‘유로마이단 혁명’이 일어나자 그 혼란을 틈타 크림반도를 병합했다. 우크라이나 동부 돈바스 지역에선 친러시아 반군이 정부군과 교전하면서 독립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후 우크라이나 동부는 ‘분쟁지역’이 됐고 이 위기를 둘러싼 서방과 러시아의 갈등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땅으로 밀고 들어가리라 생각한 이는 별로 없었다.

위기감이 고조된 때는 2021년이다. 미국에서 조 바이든 정부가 출범한 뒤 미-러 관계는 악화일로를 걸었다. 바이든이 취임 두 달도 안 된 2021년 3월 언론 인터뷰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살인자”라 부른 것에 러시아는 격렬히 반발했다. 2주 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접경지대로 군대를 이동시켰다. 그해 6월 두 정상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만났지만 대립점을 확인했을 뿐이다. 며칠 뒤 영국 군함이 굳이 크림반도 부근 흑해에 들어서자, 러시아는 경고사격을 했다. 미국은 맞받듯 30여 개국을 동참시켜 흑해에서 합동훈련을 했다.

7월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의 역사적 통합에 관하여’라는 긴 글을 발표했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한 민족, 전체가 하나”라며 우크라이나의 주권은 “러시아와 협력해야만” 지켜진다고 했다. 임박한 전쟁의 경고였을까. 10월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와의 협력을 모두 중단하고 우크라이나 국경 주변에 군사력을 증강했다. 푸틴은 경고 발언 수위를 계속 올렸고, 미국에 ‘안전보장 요구’를 적은 목록을 보냈다. 핵심은 우크라이나를 나토에 넣지 않겠다는 확약을 하고 동유럽의 나토군 병력과 무기를 철수시키라는 것이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푸틴은 러시아 전역에 방송되는 연례 회견에서 서방이 “우리 문턱까지” 미사일을 갖다놨다며 강경한 수사를 쏟아냈다.

해가 바뀌어 우크라이나 접경지대의 러시아군이 13만 명으로 불어났지만 여전히 세계는 위협에 그칠 거라고 여겼다. 군을 들여보내도 우크라이나 동부를 떼어내 러시아 세력권으로 확보하려는 목적이라고 봤다. 하지만 현실은 전면 침공이었다. 동·남·북쪽 3면을 포위한 뒤 쳐들어가 우크라이나 전역을 전쟁터로 만들었다.

2022년 3월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경찰이 체포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2022년 3월2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항의하는 시위를 벌이던 시민들을 경찰이 체포하고 있다. REUTERS 연합뉴스

소련의 옛 세력권 되찾으려는 의도

나토 가입을 막거나 동부 지역을 떼어내자고 이런 규모의 전쟁을 시작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푸틴의 목표는 그보다 훨씬 광범위하다고 전문가들의 분석이 달라지고 있다. 우크라이나에 친러시아 정부를 세워 서방의 영향력을 지우고, 예전만은 못하다지만 여전히 ‘세계의 중심’인 미국의 패권을 흔들고, 러시아의 옛 세력권을 재확립하려는 목적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역설적이지만 ‘레짐체인지’(정권교체)는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명분이었다. 그 뒤 미국이 아프간과 이라크에서 어떻게 진창에 빠졌는지 푸틴은 모두 지켜봤다. 그런데도 그런 시도를 할까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상황은 며칠 새 180도 바뀌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내가 러시아의 살해 대상 1순위”라고 말했다. 푸틴은 우크라이나를 ‘탈나치화’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레짐체인지라는 목표를 사실상 공식화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파시즘으로 몰면서 유로마이단 혁명 이후의 우크라이나를 파시스트 정권으로 비난해왔다.

푸틴의 거대담론과 관련해 늘 거론되는 사람이 극우파 이론가 알렉산드르 두긴이다. 동서양을 잇는 거대한 러시아가 세계의 중심이 돼야 한다고 주장한 인물이다. 나치 독일의 ‘레벤스라움’(생활권) 개념에 민족주의와 포퓰리즘을 합친 듯한 두긴의 구상은 흔히 유라시아주의로 불린다. 그는 푸틴의 측근도 아니고 푸틴 체제에서 공식적 역할을 맡은 적도 없다. 하지만 드미트리 로고진 전 부총리를 비롯한 푸틴 주변 인사들과 접촉하고 클럽 이즈보르스키 같은 고위층 모임을 만들어 영향력을 미쳤다. 동쪽 카자흐스탄에서 서쪽 벨라루스까지 이어지는 광대한 지역을 정치적·경제적으로 ‘재구성’한다는 두긴의 사상은 푸틴이 주창해온 유라시아경제연합이나 ‘강한 러시아의 부활’과 맞아떨어진다.

유럽 국가들, 군사력 강화 나설 수도

우크라이나 침공은 그 구상이 필연적으로 불러온 군사적 과정의 시작일까. 푸틴이 러시아 부활을 주장하며 지지 기반을 다지고 민족주의 선동을 위험한 수준까지 끌어올린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이다. 그러나 전쟁을 마음먹고 준비에 들어간 것이 언제부터였는지는 알 수 없다. 나토 문제로 미국의 의지와 대응 수준을 시험한 뒤 목표치와 도발 강도를 끌어올렸을 수도 있다.

유라시아를 묶는 대제국의 부활을 구상해 오래전부터 큰 그림을 그려왔을 수도 있다. 러시아는 2010년 대대적인 국방개혁을 마무리하면서 볼가-우랄·시베리아·극동 등 6개로 나뉜 군구를 조정해 서부·남부·중부·동부 4개 군구로 만들었다. 육군 40%가 배치된 서부군구는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포함한 핵심 지역이며 핵전력을 총괄한다. 남부군구에는 러시아 해군의 중심축인 흑해함대와 카스피선단이 있다.

푸틴은 총리로 잠시 내려앉아 있던 2008~2011년 낡고 병든 군을 뜯어고치고 무기체계를 현대화했다. 첫 집권 때 미국에 시비 거는 냉소적인 ‘안티’였던 푸틴은 2012년 재집권 뒤 부쩍 강경해진 모습이 됐다. 흑해함대의 모항이 있는 크림반도를 병합하며 서방과의 대결을 불사했고, 우크라이나를 위해 전쟁에 나서줄 ‘서방’이 없다는 점을 계속 확인했다. 결과론적인 해석이지만 그는 진작부터 제국의 그림을 그려놓고 시기를 보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쨌든 1년 전 우크라이나 주변에 무기와 병력을 늘렸을 때부터 전쟁 시계를 돌리기 시작한 것은 분명하다. 무리하게 나토에 들어가려던 우크라이나가 문제라거나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의 실책이라는 식으로 피해자를 탓하는 건 도덕적으로도, 논리적으로도 초점이 빗나간 주장이다.

러시아도 쉽게 이기지 못할 전쟁

냉전 시절에도 없었던 전면전에 핵위협까지 버젓이 꺼내놓는 푸틴을 보며 세계는 충격에 빠졌다. 특히 경악한 유럽은 ‘유럽의 9·11’로 받아들인다. 러시아의 군사행동을 예방한다는 전제 아래 짜놓은 서방의 경제제재 패키지는 효과가 없었다. 러시아 제재는 크림반도 병합 때부터 계속됐고, 거기에 수백 쪽의 제재 목록을 덧대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부터의 제재는 다를 수 있다. 측근만 겨누던 제재 대상에 푸틴 본인도 포함한 것은 상징적이다. 무엇보다 국제 금융망에서 러시아를 몰아내다시피 했다. 비록 침공은 막지 못했지만, 세계경제에서 축출하는 수준의 고립으로 몰아가 전쟁 ‘비용’을 높이겠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침공 뒤 러시아와 거리를 두는 중국 정부가 경제적 타격을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도 제재 강도가 매우 높음을 보여준다.

유럽은 반러시아 물결로 덮였다. 중립국들도 나토에 들어가자는 여론이 높아졌고, 제2차 세계대전에도 끼어들지 않던 스웨덴이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보냈으며, 독일의 재무장에 힘이 실리고 있다. 미군이 아프간에서 빠져나갈 때 유럽 국가들은 “며칠만이라도 철군을 늦춰달라”고 사정했지만 거절당했다. 유럽은 이를 ‘웨이크업 콜’(경종)로 받아들였고 더는 미국만 믿고 있을 수 없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이번 사태가 불러일으킨 위기의식은 그것과 비교가 안 될 만큼 크며, 미국의 안보우산 속에 머물러온 유럽의 의식구조를 바꿔놓을 것이다.

이 전쟁의 지정학적 파장을 점치기에는 아직 이르다. 모든 것은 앞으로의 전쟁 양상에 달렸다. 미국의 아프간·이라크 침공은 일방적이었고, 두 나라 정권은 별반 저항도 못하고 쫓겨났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결사항전으로 맞서고 있다. 탱크 앞에서 화염병으로 저항하는 시민들, 조국을 지키겠다며 귀국하는 사람들. 전 국민 총동원령이 내려졌고 할머니들까지 총을 들었다. 남부 소도시에선 핵발전소를 장악하지 못하도록 시민들이 도로로 나와 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압도적인 화력을 자랑하던 미국도 아프간과 이라크의 수렁에서 빠져나오기가 그토록 힘들었는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쉽게 끝낼 수 있을까. 개전 초반 키이우로 진군한 속도는 빨랐지만 우크라이나의 제공권을 순식간에 무력화할 것이라던 예측은 빗나갔다. 러시아군의 전투 능력이 예상보다 떨어진다는 얘기도 나온다.

항공모함과 폭격기도 중요하지만, 여전히 전쟁에서는 지상군 투입이 관건이다. 미국과 유럽국들은 우크라이나를 위해 러시아와의 전쟁에 들어갈 것인가. 바이든은 우크라이나 ‘주변국’에 지상군을 배치했지만 전쟁에 말려드는 것은 기피한다. 전쟁에서 발을 뺀다는 것은 버락 오바마 정부 때부터 미국의 지향점이기도 했다. 유럽국들도 마찬가지다. 동맹도 아닌 나라에 자국군을 들여보내는 걸 찬성할 국민은 없다.

세계 시민들의 단결된 목소리는 힘이 세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저항이 거세다는 건 치열한 지상 교전이 벌어지고 이는 곧 인명 피해가 커질 수 있다는 뜻이다. 1990년대 옛 유고연방 내전 때 유럽은 무기력하기 짝이 없었다. 결국 미국이 나섰고 나토 공습이 시작됐다. 만일 우크라이나에서 인명 피해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 미국과 유럽국들의 여론이 달라질 가능성이 있다. 그렇다 해도 군사적 대응이 쉽지 않다. 키이우 같은 대도시를 폭격하거나 지상군을 투입했다가 자칫 보스니아 내전 때처럼 오히려 더 큰 피해를 부를 수 있다. 잔인하게 들리겠지만, 결국 얼마나 많은 이가 희생되느냐의 문제다.

푸틴은 우크라이나 사람들의 목숨을 가지고 도박을 벌이고 있다. 그리고 그 도박이 더 큰 반인도범죄로 귀결되는 것을 막기 위해 세계의 시민들이 피켓과 촛불을 들고 있다. 시위로 전쟁을 막지 못한다 해도, 감시와 압박은 때로 무엇보다 강력한 수단이 된다. 하나로 합쳐진 세계 시민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하다.

구정은 국제 전문 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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