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봄, 미얀마 국민은 군부독재 정권의 총칼에 맞서 목숨을 건 민주화운동을 벌이고 있습니다. <한겨레21>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미얀마 국민과 연대하고 그들을 지지하는 한국 시민의 글을 제1358호부터 미얀마어로 번역해 함께 싣습니다. #Stand_with_Myanmar
군부가 풀어놓은 개떼(쿠데타 세력인 군인과 경찰)가 거리를 배회한다. 집회에 나갔다가 삼엄한 단속을 피해 겨우 집에 돌아온 청년 세인은 턱밑까지 차오른 숨을 가쁘게 몰아쉰다. 세인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마인 삼촌은 불편한 몸을 일으켜 맨발로 마중을 나왔다. 코로나19에 감염됐다가 죽을 고비를 넘긴 삼촌의 핼쑥한 얼굴이 무사히 돌아온 조카를 보고서야 한시름 놓은 표정이 된다.
“세인아, 밖은 상황이 어떻더냐?”
“마인 삼촌 말도 마세요. 개떼가 발광하는 와중에 동에 번쩍 서에 번쩍 하며 기습 집회를 벌이는 게 스릴 넘치기 짝이 없다니까요.”
군경을 피해 어렵사리 집에 돌아온 세인은 괜스레 너스레를 떨었다. 한숨 돌린 세인이 묻는다.
“삼촌 컨디션은 좀 어때요? 뭐 한다고 집 밖으로 나오신데… 밖은 정말 난리도 아니에요. 1988년(이하 88년) 때도 이 정도로 심했어요?”
조카의 물음에 잠시 만감이 교차한 마인 삼촌은 금세 눈가에 눈물이 어린다. 붉어진 눈으로 삼촌은 조카를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88년에는 지금처럼 혁명이 오래가지 않았단다. 그리고 오늘날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지. 88년과 2021년이 어떻게 다른지 알고 싶더냐? 그렇담 뭐든 물어보렴. 삼촌이 아는 만큼 솔직하게 대답해주마.”
“좋지요.”
세인은 자리를 잡고 앉아 삼촌에게 질문을 던졌다.
세인 조카 “그러면 88년과 2021년 혁명은 어떤 유사점과 차이점이 있나요?”
마인 삼촌 “8888항쟁과 2021년 봄의 혁명은 군부독재에 저항하는 민중혁명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이라 볼 수 있단다. 지금처럼 그때도 민중은 거리로 나섰고 군부는 총탄으로 탄압했지. 수많은 시민이 끌려가 옥살이를 했고 젊은 세대는 국경으로 피신하거나 밀림으로 숨어들었단다.
근본적으로 두 혁명은 유사하지만 이번 봄의 혁명에서는 군부가 결코 예상하지 못한 강력한 변수가 나타났지. 바로 너희 Z세대란다. 높은 교육 수준, 국제적 조류를 따라잡을 수 있는 감각,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갖춘 너희는 그야말로 우리 역사의 특이점이자 독재자 무리가 결코 뛰어넘지 못하는 새로운 세대다. 우리 때는 지도자가 체포당하면 조직이 와해됐지만, 너희는 또 다른 출중한 청년이 다시 조직을 이끌어 저항을 계속해나가더구나. 온라인상에서도 캠페인을 조직해 독재자가 이루려는 바를 저지해내는 모습을 보고 나서 삼촌은 깨달았다. 우리 아이들이 우리 세대를 아득히 뛰어넘었구나. 88년 세대가 이루지 못한 일을 너희가 해내고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 때는 라디오 말고는 정보를 얻고 소식을 전할 길이 없었단다. 지금처럼 현장에서 서로 긴밀히 연락하고 정보를 공유할 방도가 없었지. 요즘 세상은 통신기술의 발전으로 소통 방식이 다양해졌는데 이는 너희 같은 젊은이들에게 큰 이점이 아닐 수 없어. 활용 방법을 알고 또 능숙히 다루니까 말이야. 무지한 저 독재자가 아무리 차단하고 억압하려 해도 그게 어찌 가당키나 하겠느냐? 총칼로 선량한 시민을 학살하는 모습을 사진과 영상으로 기록하고 심지어 실시간 라이브로 전세계에 중계까지 하니, 군부도 예전처럼 악행을 숨길 수 없게 됐지. 이게 다 청년들의 공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그런데 세인아, 너는 무엇 때문에 군부독재 타도 혁명에 뛰어든 게냐?”
세인 조카 “저희 생각은 단순해요. 삼촌 세대가 살아온 억압과 폐쇄로 가득한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제가 꿈꾸는 삶과 미래 목표를 빌어먹을 민 아웅 흘라잉이 쿠데타를 일으켜 산산조각 내버렸어요. 이대로 제 미래가 사라지게 놔둘 순 없습니다. 되찾아야죠! 이미 친구들과 동지들이 피를 흘리며 죽어갔고 또 끌려갔어요. 이만큼 피를 본 이상 타협은 없습니다. 군부독재의 뿌리를 뽑아 없애버리기 위해 저희는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저희가 거리로 나서 집회를 하자 공무원들도 군부통치를 거부하며 시민불복종운동(CDM)에 속속 참여했고 지금까지도 소신을 지키고 있어요. 경찰과 군인 수천 명 또한 시민의 편으로 돌아섰고요. 이런 움직임이 88년과는 확연히 다른 점이라고 생각해요. 군부를 지지하는 지식인과 사회 핵심 인력이 거의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군은 나라를 제대로 통치하지도 통제하지도 못하고 있잖아요. 코로나19 사태 하나만 봐도 의료진이 군부를 거부하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게 그 방증이죠. 삼촌, 그보다 저는 88년 혁명에서 왜 국민이 군부를 이기지 못했는지 궁금해요.”
마인 삼촌 “8888항쟁에서 우리는 군부를 이기지 못한 게 아니란다. 당시 군부는 국민의 강력한 저항에 못 이겨 민주적인 총선을 약속했고, 우리는 그 약속을 믿고 물러선 거였어. 총선 결과 NLD(민주주의민족동맹)가 압승을 거뒀지만 군부는 선거 결과를 인정하지 않았고 권력을 이양하겠다는 약속 또한 지키지 않았지. 다시 저항하려 했지만 이미 88년 항쟁을 이끌던 지도자 대부분이 체포되는 바람에 시위를 이끌 동력이 너무도 약해진 상황이었단다. 투쟁을 이어가기 위해 도시를 탈출해 국경으로 가던 수많은 동지가 체포됐지. 안타깝게도 1988년에는 지금 같은 전국적 시민불복종운동은 일어나지 않았단다. 세인은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니?
세인 조카 “8888항쟁 당시의 정치적 조류와 2021년 청년들이 이끄는 봄의 혁명의 정치적 조류가 다르다고 봐요. 1988년은 지금보다 권위주의가 기승을 부렸고, 사회적으로도 매우 폐쇄적이었잖아요. 1948년 해방 직후부터 한 세대 이상 군부가 일당 독재로 국민을 억압했죠. 그에 대한 불만이 폭발해 시민들이 민주주의를 요구하며 거리로 나선 게 8888항쟁이지요. 수많은 희생이 있었음에도 군부가 민주적인 총선을 실시해주겠다며 달콤한 말로 달래자, 국민은 만족하며 혁명을 중단했어요.
2021년 봄의 혁명은 단순히 억압에 대한 투쟁이 아니에요. 온 국민이 투표를 통해 민주적으로 선출한 권력을 찬탈한 군부를 단죄하려는 싸움이지요. 결코 저희가 NLD를 지지하기 때문에 싸우는 게 아니에요. 국민의 민주주의적 선택을 훼손하는 행위를 도저히 참을 수 없었어요. 독재자를 끌어내 죄상을 낱낱이 물을 수 있을 때까지 청년 세대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을 겁니다. 그런데 삼촌, 하나 물어볼게요. 88년에는 그렇게 치열하게 투쟁했던 X, Y세대는 왜 옛날처럼 혁명에 참여하지 않는 건가요? 봄의 혁명에서 어른들은 왜 이렇게 소극적인 거죠?”
물음에 답하는 삼촌의 표정이 어두워진다.
마인 삼촌 “그래, 네 말처럼 우리 세대 대다수가 침묵하고 있지. 요즘 아이들이 기성세대에 불만이 크다는 걸 우리도 안단다. 심지어 우리 X세대를 ‘X 같은 세대’로 부른다지. 그러나 기성세대가 어떤 정치적 신념을 갖고 있기 때문에 입을 닫고 있는 건 아니란다. 그저 가족이 다치거나 자신이 그간 이룩한 걸 잃을까봐 두려운 게다. 가령 봄의 혁명 기간에 청년들이 총탄을 피하려 모래주머니 방벽과 바리케이드를 쌓고 저항하고 있으면 그걸 가서 허무는 일을 이른바 ‘X 같은 세대’인 우리 88세대가 하곤 했지. 동네일을 돌봐야 하는 통장과 반장은 죄다 밀정과 첩자가 되어 쿠데타 세력에 자기 동네 사람들을 밀고하고 말이야. 모두가 선거 때만 되면 타성처럼 NLD와 아웅산 수치 여사의 이름을 외치지만 막상 군부와 맞설 때가 되자 우리 세대는 침묵했다. 심지어 너희가 화염병을 만들어 군경에 저항하는 때마저 우리는 나대지 말라, 모난 짓 하지 말라며 나무라기까지 했지. 나열하자면 한도 끝도 없겠구나. 삼촌은 기성세대 다수가 공포정치에 굴복했다는 점을 인정한다.”
세인은 삼촌의 고백을 들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기성세대에게는 맨몸으로 군부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인 경험과 연륜이 있다는 점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인 조카 “그러면 삼촌, 봄의 혁명이 성공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조언 좀 해주세요.”
마인 삼촌 “혁명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명확한 정치적 원칙과 목적이 필요하단다. 민족이나 분파로 편을 가르지 않고 연방주의를 지향한다든가, 군부가 개정한 헌법을 힘을 모아 폐지하는 등 명확한 원칙과 공동의 목표가 필히 있어야만 해. 그 원칙과 목표가 최전선에서 싸우는 시민이 공감하고 따를 수 있는 정치적 슬로건이 되어야 한다. 국민적 연대와 공감, 철저한 보안 유지를 위한 신호체계와 안전장치 고안 등 모든 일을 철저한 전략 아래 진행해야 한다. 작은 집회부터 시작해 전쟁에 이르기까지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늘 위태롭기 마련이야.
또 신념을 갖고 시민불복종운동에 참여하는 공무원과 그 가족이 겪는 고통을 당연시하고 외면해선 안 된다. 그들이 저항을 계속할 수 있게 지원할 방안을 반드시 모색해야 해. 지금 수많은 지식인과 사회의 핵심 인력이 국민의 편에 섰지 않느냐? 이들을 적재적소에 잘 활용해 군부에 맞설 방법도 분명 고민해야 할 문제란다.
다행히 국민통합정부(NUG)가 존재해 국민이 기댈 곳이 있으니 참 힘이 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NUG도 혁명 정부로서 역할에 더욱 집중할 필요가 있어. 지금 NUG의 행보를 보면 마치 평상시에 정부를 운영하듯 과업을 나누고 아직 불필요한 부처를 신설해 장관까지 임명하는데 참으로 허황되다는 생각이 들지 않느냐? 그런 건 혁명이 성공한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지금은 군부독재 타도라는 최우선 과업을 위해 체계적인 계획을 세우면서 현장과 최전선에서 활동하는 시민과 견고한 연결고리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때다. 구체적 전략 없이 혈기와 분위기에 휩쓸려서 과거 88년 버마연방 망명정부(NUGUB)가 실패했던 전철을 그대로 밟게 될까 걱정되는구나. 심지어 88년 때는 많은 사람이 망명정부 존재 자체를 몰랐어. 지금은 정보화 시대가 되어 누구나 NUG를 알고 있지.
그리고 연방 민주주의 국가 건설과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민족 전체가 힘을 모아야만 해. 그러려면 소수민족과 그들의 무장단체와 협상해야 하는데, 우선 우리(버마족) 마음속에 있는 계산적인 생각을 버려야만 협상이 가능할 게다. 동등한 입장에서 소수민족을 존중해야 진정한 대화가 가능한 게지. 지금은 군부라는 공공의 적 때문에 우리와 소수민족이 연대하고 있지만 진정한 연방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면 함께 추구할 공공목표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 같은 변덕스러운 마음으로 소수민족을 대하면 평화는 요원할 뿐이다. 국경(소수민족)과 도시(버마족)가 반드시 합심해야 한다. 한데 봄의 혁명이 성공하고 새 나라를 세운다면 조카는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으냐?”
세인 조카 “평등을 기초로 세워진 연방 민주주의 국가지요. 무슬림, 로힝야족, 소수민족이라는 이유로 차별받는 일이 없었으면 해요. 당연히 평화로운 나라가 돼야 하고요. 미얀마가 싱가포르만큼은 아니더라도 타이만큼은 발전한 국가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평등을 기초로 세워진 연방 민주주의 국가. 그 가슴 벅찬 단어에 삼촌은 다시 눈시울이 붉어진다.
마인 삼촌 “그래, 세인아. 아직 끝나지 않은 8888 민중해방 혁명을 우리 함께 이룩하자꾸나.”
고개를 끄덕이는 세인의 눈에 굳은 결의가 현현하다.
독재자 네윈에 맞선 1962년 7월7일 항거, 1974년부터 1976년까지 목숨 바쳐 저항한 학생운동가들이 시작한 혁명을 2021년 봄의 혁명이 계승했다. 우리 민족의 혁명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미얀마는 지난 10년간 민주주의를 경험하고 다시 군부독재 70년으로 회귀해버렸다. 그나마 맛본 민주주의마저 순금 같은 ‘진짜 민주주의’가 아닌 군부독재 위에 민주주의를 얇게 덧칠한 ‘도금 민주주의’였다.
그간 군부독재가 시민에 가한 탄압과 억압, 수탈과 박해에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민중이 피땀과 목숨을 바쳐 저항해왔다. 88세대 ‘마인’ 삼촌, Z세대 조카 ‘세인’은 바로 그 표상이다. 각 세대를 대표하는 둘의 대화를 통해 “아직 끝나지 않은 8888 민중해방 혁명을 우리 함께 이룩하자”라는 시대적 소명을 다시금 되새겨본다. 미얀마 민주주의 만세.
제이 파잉 <미얀마 포토프레스 통신>(MPA)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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