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15일 미국 백악관에서 압둘라티프 알자야니 바레인 외교장관(왼쪽부터), 베냐민 네타냐후 이스라엘 총리,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압둘라 빈 자이드 아랍에미리트연합 외교장관이 ‘아브라함 협정’에 서명한 뒤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로이터 연합뉴스
2020년 9월15일은 갈등과 분쟁으로 얼룩진 중동 현대사에서 또 하나의 주요한 이정표로 기록될 것이다. 이날 걸프 왕정국인 아랍에미리트연합(UAE)과 바레인이 중동의 숙적 이스라엘과 전격적인 관계 정상화 협정을 맺었다. ‘아브라함 협정’으로 명명된 이 역사적 사건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정부가 중재했지만, 무엇보다 당사국들의 이해와 손익이 맞아떨어진 결과다.
아브라함 협정은 당장 주변 중동 국가들의 외교안보 정책을 시험대에 올려놓았을 뿐 아니라, 앞으로 중동 정세의 지각변동까지 예고한다. 아브라함 협정의 배경과 의미, 전망을 협정 당사국과 주변 아랍 국가들, 그리고 이란까지 서로 다른 시선으로 분석해본다._편집자주
2020년 10월19일 아침(현지시각), 이스라엘의 실질적 수도 텔아비브의 벤구리온 공항에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에티하드항공의 보잉787 여객기 한 대가 사뿐히 내려앉았다. 아랍·이슬람권인 걸프 지역 국가의 상업용 민항기가 ‘아랍의 공적’인 이스라엘 땅에 착륙한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최근 양국 관계 정상화에서 첫 가시적 결실이다. 아라비아반도 북부를 가로지르는 직항로 거리는 약 2100㎞. 비행시간은 3시간이 채 안 걸렸지만, 두 나라 사이에 하늘길이 열리기까지는 반세기 넘게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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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9월15일 미국 워싱턴 백악관에선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연합이 ‘관계 정상화’에 합의하는 서명식이 열렸다. 미국이 중재한 이 합의는 ‘아브라함 협정’으로 명명됐다. 유대교, 이슬람교, 기독교가 공통의 조상으로 여기는 인물의 이름을 땄다. 본디 한 뿌리인 후손끼리의 상생과 평화를 강조하는 의미가 담겼다. 10월18일에는 바레인도 이스라엘과 수교하기로 공식 합의했다. 바레인은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리 하나로 연결된 걸프만의 작은 섬나라로, 미국이 중동과 인도양을 관할하는 미 해군 제5함대 사령부가 주둔한다.
반이스라엘 공동전선에 구멍
아랍 이슬람 국가가 전체 아랍권의 ‘공적’인 이스라엘과 국교를 맺은 것은 이집트(1979년), 요르단(1994년)에 이어 세 번째다. 아브라함 협정은 중동의 지정학 구도를 뒤흔드는 중대 사건이다. ‘이스라엘-아랍권(이슬람 수니파)-이란(비아랍, 시아파)’이 서로 적대하는 ‘삼각 대립’ 관계에 균열을 낸 것이다. 이스라엘에 땅을 빼앗기고 짓눌린 팔레스타인은 격분했다. 이란도 “아랍에미리트연합이 이슬람 세계와 지역(중동) 국가들을 배신했다”고 강하게 비난했다. 아브라함 협정은 적대국들에 둘러싸인 이스라엘에 운신의 폭을 넓혀줬을 뿐 아니라, 향후 다른 아랍국들과의 관계 개선도 기대할 수 있게 했다. 반면 아랍 국가들로선 이스라엘의 팔레스타인 강점에 대한 반발과 이슬람 대의에서 강력한 결속 명분을 찾는 ‘반이스라엘 공동전선’에 큰 구멍이 생겼다.
다른 면에서, 아브라함 협정은 아랍의 이슬람 수니파 국가와 이스라엘이 이란이라는 공동의 적에 맞서 손을 맞잡은 모양새로 비치기에 충분하다. 대다수 아랍 국가들은 이스라엘보다는 이란을 최대 위협으로 본다. 특히 2017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집단인 이슬람국가(IS) 세력이 3년 전쟁 끝에 공식 소멸하고, 2018년 미국이 이란 핵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긴장이 위험수위로 높아진 이후 더욱 그렇다. 이란도 이슬람 국가이지만 주변 대다수 아랍 국가들과는 혈통과 언어가 다르다. 페르시아제국의 후예이자 독자적 핵개발 능력을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 중동 지역의 전통적 강국이다. 그러나 이란은 이슬람 소수 종파인 시아파 종주국으로, 세계 무슬림 인구의 85%를 차지하는 수니파 국가들과 종교적 신념뿐 아니라 역내 패권을 놓고 한 치 양보 없이 대립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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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세계의 눈길은 아브라함 협정이 중동의 지정학적 구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쏠린다. 이슬람 수니파 종주국이자 걸프 지역 최대 군사강국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자국과 국경을 맞댄 아랍에미리트연합의 행보와 역내 정세 변화를 주시한다. 아직 사우디 정부의 공식 논평은 나오지 않았지만, 왕실의 입김을 강하게 받는 관영 언론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내부의 복잡한 속내를 읽을 수 있다.

2019년 11월 아랍에미리트연합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 왕세제(오른쪽)가 자국을 방문한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와 환담을 나누고 있다. AP 연합뉴스
미국 동맹 사우디 행보에 눈길
이스라엘과 아랍에미리트연합의 평화 협상 소식이 흘러나온 2020년 9월12일, 사우디 최대 영문 일간 <아랍뉴스>는 ‘(협상) 과정은 충분, 우리에게 필요한 건 평화’라는 제목의 편집장 논설을 실었다. 아랍·이슬람 동맹의 근원인 팔레스타인 지도부의 “분열과 부패”를 강하게 비판하고, 아랍에미리트연합과 이스라엘의 평화 협상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내용이다. 이전까지는 상상하기 힘든, 매우 이례적인 논조였다. “그들은 협상 테이블을 외면할 때마다 파이가 작아질 뿐임을 언제 알게 될까?”라는 지적은 팔레스타인 지도부를 겨냥한 것이었다. 그러나 걸프 우방국과 이스라엘의 전격적인 수교가 기정사실화한 시점에서 ‘명분’보다 ‘실익’을 강조한 것은, 향후 사우디의 행보와 관련해 변화 가능성을 시사한 것으로도 해석됐다. 사우디는 미국의 중동 전략에서 핵심 동맹이지만, 그동안 이스라엘과 관계를 정상화하라는 미국의 요청은 무시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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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2021년 건국 50주년을 맞는 아랍에미리트연합은 중동의 강소국이자 역내 외교·안보의 중요한 플레이어로 부쩍 존재감을 키웠다. 2020년 9월 아랍에미리트의 안와르 가르가시 외교담당 국무장관은 아브라함 협정과 관련한 기자회견에서 “우리는 글로벌 플레이어가 되고 싶다. 장벽을 허물기 원하며, 이를 위해선 전략적 위험도 감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그 중심에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나하얀(58) 왕세제가 있다. ‘MBZ’라는 약칭으로 불리는 왕세제는 현 대통령 할리파 빈 자이드의 동생이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은 7개 토후국(에미리트)의 연합국가다. 수도 아부다비의 에미르(수장)가 국가수반을, 두바이의 에미르가 총리를 맡는다. 그런데 2014년 할리파 대통령의 건강이 크게 나빠져, 그 뒤 MBZ가 최고 통치자 구실을 하고 있다.
MBZ는 군 부총사령관, 1조3천억달러 규모의 국부펀드를 운용하는 슈퍼 리치, 공군 헬기 조종사 복무 경력, 약속 시각에 늦는 법이 없는 철저한 자기관리로 잘 알려졌다. 무엇보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야심 찬 국가 개조 작업을 진두지휘하는 혁신적 지도자라는 점이 주목된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은 국제 비즈니스의 허브이자 인기 관광지다. 중동 국가 가운데 드물게 정치와 사회가 안정됐고, 이슬람권 극단주의를 비롯한 종파 분쟁이 없다. 풍부한 석유자원 덕분에 살림살이도 넉넉하다. 그러나 경제의 석유 의존도가 높은데다, 인구 900만 명 중 800만 명이 이주노동자 등 외국인이라는 사회구조는 잠재적으로 심각한 불안 요인이다.
중동 강소국으로 보폭 넓히는 UAE
최근 10여 년 새 아랍에미리트연합은 경제적 번영과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국제 무대에서 위상 강화를 포함해 전면적인 혁신에 속도를 내고 있다. 건국 50주년을 도약의 분기점으로 세운 국가 어젠다 ‘비전 2021’은 지속가능한 환경과 인프라, 세계적 수준의 보건의료, 일류 교육 시스템, 지식 기반 경제, 공정한 사법, 사회통합과 정체성 보존 등을 아우른다. 2020년 7월에는 중동 국가로는 처음으로 화성 탐사선 ‘아말’(아랍어로 ‘희망’)호를 쏘아올린 데 이어, 2024년까지 무인우주선의 달 착륙 계획도 내놨다.
아랍에미리트연합은 국제분쟁 현안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개입의 보폭도 넓혀왔다. 겉으로 도드라지지 않았을 뿐이다. 1999년 코소보 내전 때 아랍에미리트연합은 현지에 적신월사(이슬람권의 적십자사)를 파견해 난민캠프를 세우고 인도주의 지원 활동을 했다. 2000년대 후반엔 미국 주도 서방 연합군의 아프가니스탄전쟁에 전투 부대를 파병해 격전을 치르기도 했다. 당시 짐 매티스 미국 국방장관은 아랍에미리트의 소수정예 부대에 “작은 스파르타”라는 별칭을 붙였다고 한다. 2015년에는 사우디아라비아와 함께 예멘 내전에도 개입했다가 역풍을 맞고 슬그머니 빠져나왔다.
한 달 전인 2020년 9월엔 그리스 크레타섬으로 전투기와 군함을 파견해 그리스와 합동 군사훈련을 했다. 동지중해 가스전 개발을 두고 터키와 분쟁이 일어날 가능성을 염두에 둔 행보였다. 최근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는 ‘안보 불안 제거’에 더해 ‘군사력 강화’까지 노린 포석이다. 당장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최신예 전투기 F-35를 아랍에미리트에 팔겠다고 나섰다. 미국이 중재한 아브라함 협정 성사의 보상이다. F-35는 첨단 스텔스 기능을 갖춘 차세대 주력 기종으로, 현재 중동에선 이스라엘만 보유하고 있다.
MBZ는 이런 변화를 이끄는 국가 지도부의 핵심 인물이다. 그러나 그 역시 세습 왕정국가의 ‘금수저’ 출신이다. 민주적 의사결정보다 톱다운 방식의 리더십을 선호한다. 미국과는 전통적 우호관계였지만 진보 성향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과는 불편한 관계였다. 반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는 친분이 깊다.
“아랍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 MBZ”
2020년 8월 이스라엘의 진보 성향 일간 <하레츠>는 ‘아랍에미리트의 MBZ는 마키아벨리인가 무솔리니인가, 아니면 둘 다인가?’라는 제목의 ‘분석’ 기사를 실었다. 신문은 “이스라엘-아랍에미리트연합의 협정이 ‘평화협정’인지 단순한 ‘관계 정상화’인지를 놓고 기묘한 논쟁이 벌어지는 동안, MBZ는 그것이 평화협정임을 의심하지 않았다”고 보도했다. 또 “그 목표는 아랍에미리트의 이익을 추구하는 중장기 전략의 일부”이며, “2020년 11월3일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가 패배하고 바이든이 당선할 경우를 대비한 보험 정책일 수도 있다”고 짚었다.
MBZ는 자국 정부에 문화적 다양성과 공존 업무를 담당하는 장관급 부처인 ‘관용부’ 신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을 본뜬 국립박물관 설립, 미국 뉴욕대학 분교 개설을 주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2011년 ‘아랍의 봄’을 비롯한 중동과 자국의 민주화운동은 극도로 경계하고 탄압하며 조금도 ‘관용’을 보이지 않았다. MBZ의 이름은 2016년 미국 대선에 러시아가 개입한 사건을 수사한 로버트 뮬러 특별검사의 조사 보고서에도 등장한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인 러시아 금융가와 트럼프 선거캠프 핵심 인물들의 만남을 주선한 인물 중 하나였다.
2019년 6월 미국 <뉴욕타임스>는 “MBZ가 아랍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지도자이자,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외국 인사”라고 보도했다. 이 신문은 미국 싱크탱크 브루킹스연구소 선임연구원 브루스 라이델의 말도 인용했다. “MBZ는 자신이 마키아벨리라고 생각하지만, 무솔리니처럼 행동한다.” 앞서 소개한 이스라엘 <하레츠>의 분석 기사 제목은 이 말을 재인용한 것이다. 미국 중앙정보국(CIA) 요원 출신의 국제안보 전문가인 라이델의 평가가 타당한지는 아랍에미리트연합의 차기 지도자로 유력한 MBZ의 행보로 판가름 날 것이다.
조일준 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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