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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멘 통일 슬픈 아라비안 나이트

한 번의 합의와 한 번의 전쟁으로 이룬 통일, 예멘은 왜 통일 뒤 다시 분단을 원하는가
등록 2013-12-07 14:36 수정 2020-05-03 04:27
남예멘의 사회당 대표 알리 살렘 알베이드(왼쪽)와 북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1990년 5월22일 통일헌법에 합의한 뒤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한겨레 자료

남예멘의 사회당 대표 알리 살렘 알베이드(왼쪽)와 북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대통령이 1990년 5월22일 통일헌법에 합의한 뒤 손을 들어 보이고 있다.한겨레 자료

예멘은 ‘천일야화’의 무대다. 서부에는 높은 산맥, 중부에는 넓은 사막, 그리고 동부에는 협곡이 있다. 자연이 분열의 운명을 부른다. 예멘 현대사는 아주 슬픈 아라비안나이트다. 한때는 분단국이었다. 그러나 통일을 이루었다. 한 번은 합의로, 다른 한 번은 전쟁으로, 두 개의 서로 다른 통일의 길을 경험했다. 그런데 분단시대에 통일을 외친 그들이, 왜 통일시대에 다시 분단을 원할까? 통일, 어디서부터 문제였을까?

폭탄가방·기관총 사살… 어지러운 정세

예멘의 분단은 강대국 정치의 산물이다. 1904년 영국과 오스만제국의 협정으로 분단이 시작됐다. 북쪽은 오스만제국이, 남쪽은 영국이 지배했다. 1905년 영국이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를 그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북예멘은 오스만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남예멘은 1967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북예멘은 자본주의를, 남예멘은 사회주의를 지향했다. 북예멘은 사우디아라비아에 의존했고, 남예멘은 소련과 협력 관계를 구축했다. 지리적 분단에 이어, 체제의 분단이 이루어졌다. 냉전이 분단을 재촉했다.

분단된 남북 예멘은 전쟁과 통일 사이를 분주히 넘나들었다. 1970년대는 전쟁, 관계 개선, 갈등, 다시 전쟁의 반복이었다. 1972년 전쟁이 일어난 뒤 남북은 총리회담을 열어 통일 원칙을 합의했다. 그러나 곧바로 강경파들의 엄청난 저항에 직면했다. 북예멘의 보수적인 부족장들은 협정 비준을 거부했다. 보수적인 사우디아라비아는 원조를 중단하겠다는 압력을 행사했다. 결국 북예멘 총리가 실각했다. 첫 번째 통일 합의는 갈등을 불러왔고, 대립만 키웠다.

1977년에도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다. 이번에 양쪽은 통일이 아니라, 평화 공존을 합의했다. 그러나 내부의 강경파들은 화해 자체를 반대했고, 협력을 거부했다. 이 과정에 대남 포용 정책을 추진했던 함디 대통령이 암살됐다. 정상회담을 위해 남예멘의 수도 아덴으로 출발하기 하루 전날이었다. 1978년에는 남예멘 대통령의 특사를 면담 중이던 아메드 알가슈미 대통령도 암살됐다. 특사의 가방에서 폭탄이 터진 것이다. 암살 사건은 남예멘 권력 갈등의 결과였다. 친소파가 남북협력을 추진하는 친중파를 제거하기 위해 특사의 서류가방을 폭탄가방으로 바꿔치기한 것이다. 사건 직후 친소파가 쿠데타를 일으켜, 대북 협력 정책을 추진하던 알리 의장을 처형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어떻게 통일의 길로 접어들었을까? 양쪽 모두 국내 정치의 출구를 통일에서 찾았다. 북예멘의 알리 압둘라 살레 정권은 보수적인 부족 세력, 사우디아라비아의 간섭, 그리고 폭력이 빈번한 정치 현실이라는 도전에 시달렸다. 남예멘의 정치는 더 혼란스러웠다. 마치 무협영화를 보는 듯하다. 1986년에도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남예멘 출신으로 실용주의 노선을 추진하던 알리 나셀 총리가 친소 강경파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해버렸다. 회의 소집으로 유인한 다음, 일망타진한 것이다. 물론 그도 오래가지 않았다. 쿠데타가 일어났고, 나셀은 북예멘으로 망명했다. 집권당인 예멘사회당은 1986년의 얼룩을 통일로 씻고자 했다. 통일이라는 고귀한 정통성이 필요했다.

국경지역에서 발견된 석유는 경제적 명분을 제공했다. 북예멘은 전쟁으로 석유를 잃고 싶지 않았다. 빈곤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래서 살레 대통령이 1988년 5월 남예멘을 방문해서 석유가 발견된 국경지역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고, 남북이 공동개발을 하자고 제안했다. 남북 합작회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양쪽은 국경 왕래에 관한 합의서를 채택했고, 7월부터 서로 오고 갔다.

통일의 씨앗은 갈등의 씨앗으로

공존이 이루어졌고, 교류가 시작됐다. 물론 통일은 시간이 걸리고 점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실은 달랐다. 통일이라는 물꼬가 터지자, 속도를 조절하기 어려웠다. 남예멘 사회당이 즉각적인 통일을 주장했을 때, 야심가인 살레가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남예멘은 왜 통일을 서둘렀을까? 고르바초프의 개혁이 본격화되면서, 소련의 남예멘에 대한 경제 원조가 중단됐다. 위기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남쪽 주민들도 통일이 되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기대했다. 1989년 11월 살레 대통령이 아덴을 방문했을 때, 남예멘 사람들은 열렬히 환영했다. 그리고 통일을 외쳤다. 통일은 언제나 희망의 미래였다. 학교에서 통일을 배웠고, 통일이라는 구호는 아주 오랫동안 일상의 구호였다. 정치인들도 늘 통일을 말했고, 작가들도 통일의 미래를 상상했다.

남북 예멘은 통일헌법에 합의했다. 북예멘은 느슨한 연방제를 주장했으나, 남예멘은 단일정부를 주장했다. 다만 남예멘은 50:50의 권력 배분을 요구했다. 1990년 당시 북부의 인구는 1100만 명이고, 남부는 250만 명이었다. 4배 이상의 인구 차이였다. 그러나 살레 대통령은 남쪽의 안을 수용했다. 강경파들이 통일을 반대하는 가운데, 1990년 5월22일 아덴에서 통일선포식이 열렸다.

통일예멘의 대통령은 살레였고, 부통령은 남예멘의 사회당 대표인 알리 살렘 알베이드였다. 총리는 남부 출신이 맡고, 행정집행기구는 북쪽 3명, 남쪽 2명으로 구성했다. 총리를 포함해서 남북의 비율이 3:3이었기 때문에 최종 결정은 대통령의 몫이었다. 장관직은 북부와 남부가 공평하게 나누었다. 장관을 북부 출신이 맡으면, 차관은 남부 출신이 맡았다. 기계적인 균형이었다. 그러나 정부 청사에서 북부 출신과 남부 출신은 끼리끼리 어울렸다. 쉽게 섞이지 않았다.

통일을 앞당겼던 석유는 갈등의 씨앗으로 변했다. 통일 이후 남예멘에서도 석유가 발견됐는데, 그곳은 바로 알베이드의 고향이었다. 남예멘 출신들은 석유 자원의 공정한 배분을 요구했다. 알베이드는 자기 측근을 석유장관에 임명했다. 그러나 석유 수출 대금은 재무부 관할이었다. 당연히 재무부 장관은 살레의 측근이었고, 석유부보다 서열이 높았다.

통일 이전 군복을 그대로 입은 채

경제위기가 재화의 분배를 둘러싼 갈등을 부추겼다. 1991년 걸프 전쟁이 일어났고, 예멘은 쿠웨이트를 침공한 이라크를 지지했다. 오판의 대가는 참혹했다. 사우디아라비아를 비롯한 대부분의 아랍 국가들은 예멘 노동자들을 추방했다. 8만 명의 해외 노동자가 일자리를 잃고 귀국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예멘에 지원했던 연평균 6억달러의 재정 지원도 중단했다. 1991년부터 1993년까지 1인당 소득은 석유의 증산에도 불구하고 46% 감소했다. 실업률은 1990년 4%에서 1993년 25%로 증가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폭동이 일어났다.

그리고 제도 통합이 삐거덕거렸다. 결정적으로 군대 통합이 문제였다. 예멘사회당은 남예멘 군대에 대한 통제력을 포기하지 않았다. 몇몇 남쪽 부대가 북쪽으로 가고 북쪽 부대도 남쪽으로 왔지만, 대부분의 부대는 통일 이전의 군복을 그대로 착용한 채 자신의 주둔지를 유지했다. 이런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남부 출신 정치인들에 대한 암살 사건이 잇달아 발생했다. 암살자들은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했던 북예멘 출신의 군인들이었다. 소련과 맞서 싸웠던 이들은 대부분 북예멘 보안부서에서 일했다. 이들은 남부의 소련파인 정치인들을 증오했고, 소련군에 의해 죽임을 당한 동료들의 복수에 나섰다.

파국의 절정은 1993년 4월 통일헌법에 따라 실시된 총선이었다. 살레의 국민의회당이 40%, 북부 기반의 이슬람정당이 21%, 남부에 기반을 둔 예멘사회당이 18%를 얻었다. 나머지는 무소속과 소수 정당들이 차지했다. 예멘사회당은 남부 지역을 거의 싹쓸이했지만, 전국적으로 보면 초라한 성적이었다. 선거 이후 사회당은 연방헌법의 개정을 요구했다. 여전히 50:50의 권력 분점을 법적으로 보장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렇지만 살레는 이슬람당의 실체를 인정하는 삼자연합을 주장했다. 합의가 어려웠다.

서둘러 합의한 헌법이 문제였다. 헌법은 권력 분점을 명확하게 규정하지 않았다. 5분의 1에 불과한 인구의 남부가 50:50의 권력 배분을 요구한 것은 모순이었다. 분단시대에 만들어진 정당이 상대 지역에서 지지를 받기도 어려웠다. 권력 분점 합의와 총선 결과 사이에 모순이 발생한 것이다. 알베이드 부통령은 남부 출신을 이끌고 아덴으로 돌아가버렸다. 통일 수도 사나에는 결국 북부 출신만 남았다.

요르단 국왕이 중재에 나섰고, 남북 예멘의 시민사회가 이성의 연합을 호소했다. 그런 상황에서 1994년 4월 남부 군대 야영지에서 남북 군대의 충돌이 발생했다. 쌓여 있던 불만을 활활 타오르게 하는 불씨였다. 결국 전면전으로 이어졌다. 전쟁은 두 달 동안 지속됐고, 5천~7천 명이 사망했다. 전쟁은 북부의 일방적 승리로 끝났다.

살레는 전쟁에서 승리한 뒤, 남예멘의 사회당과 정치 엘리트들을 한꺼번에 제거했다. 전쟁 직후 2만여 명의 남예멘 군인들은 즉각 해고됐다. 대부분의 공무원도 일자리를 잃었다. 남예멘 경제도 붕괴됐다. 1994년 이전 남예멘에서 75개의 공장이 가동됐지만, 전쟁 이후 3개로 줄었다. 대부분의 국유재산이 민영화됐고, 살레의 측근들이 전리품으로 나눠가졌다.

준비 없는 통일은 분단이나 다름없어

남부 사람들에게 통일은 북부의 식민화를 의미했다. 보수적인 이슬람정당의 남부 진출은 아덴의 오랜 개방성을 침식했다. 남부의 박탈감은 점차 조직화됐다. 2007년부터 ‘남부운동’이라는 이름의 반정부 단체가 등장했다. 처음에는 통일국가를 인정하면서, 남과 북의 평등을 요구했다. 그러나 정부의 탄압이 강화되자 ‘남부운동’은 과격화됐다. 알카에다와 협력하면서 무장이 이뤄지고 테러가 빈번해졌다. 2009년부터는 과거 남예멘의 국기가 남부 전역에서 다시 나부끼기 시작했다. 남부는 다시 분단을 요구하고 있다.

통일 이후 20년이 흘렀다. 분열의 현실은 크게 나아지지 않았다. 그러다 2011년 ‘아랍의 봄’이 예멘을 덮쳤다. 예멘 군부가 살레 충성파와 반대파로 분열됐고, 시위와 탄압이 반복되면서 국가가 비틀거렸다. 결국 걸프협력이사회(GCC)가 나서서 살레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었다. 33년, 아랍에서 가장 오래된 독재자 중 한 명이 물러났다. 그러나 그는 무대에서 완전히 퇴장하지 않았다. 독재 시절 그가 행했던 악행을 사면받았고, 여전히 집권당에서 영향력을 유지하고 있다.

형식뿐인 통일은 얼마나 허망한가? 분단시대 통일은 희망이었다. 그러나 통일 이후 희망이 없음을 확인했을 때 느낀 절망은 얼마나 치명적인가? 예멘의 통일은 ‘우리는 하나’라는 민족적 정체성을 만들지 못했다. 경제적으로 나아지지도 않았다. 주권이 국민에게 돌아가지도 않았다. 예멘은 통일을 이루었지만, 실패한 국가로 남아 있다. 서두른 통일의 복수에 직면해 있는 예멘이 우리에게 말한다. 통일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고. 준비 없는 통일은 분단이나 다를 바 없다고.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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