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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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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림이 협상의 조건이 되다

33개국이 핵을 포기한 협상 ‘중남미 비핵지대 조약’
신뢰 수준을 높여 비준에 이른 과정이 동북아에 주는 교훈
등록 2014-05-04 07:09 수정 2020-05-03 04:27

틀라텔롤코 조약(Tlatelolco Treaty)은 중남미 지역의 비핵지대 합의다. 틀라텔롤코는 멕시코 외무부가 있는 지역의 이름이다. 인간 거주 지역에 ‘핵 없는 세계’를 만든 첫 번째 조약이다. 오랫동안 참여를 거부했던 쿠바가 2002년 이 협정을 비준함에 따라, 1967년 서명을 시작한 이후, 이 지역의 33개 국가가 모두 가입했다. 35년의 세월이 흘렀다. 협상은 어렵고, 복잡했으며, 여러 번의 고비가 있었다. 다시 북한 핵 문제가 요동치고, 동북아시아에 핵 확산의 경보가 요란스럽게 울린다. 우리는 중남미 비핵지대 협상에서 무엇을 배울 수 있을까?

쿠바 미사일 위기 겪으며 필요성 공감

비핵지대라는 개념은 1956년 소련이 중부 유럽을 대상으로 먼저 제안했다. 비무장지대의 개념을 빌려온 것이다. 중남미 지역의 비핵지대 주장은 1958년 코스타리카가 처음 제기했다. 이후 유엔 외교 무대에서 몇 번의 제안이 있었다. 그러다 때가 왔다. 바로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다. 이 과정에서 중남미 국가들은 핵전쟁의 가능성을 실감했다. 소련의 니키타 흐루쇼프 공산당 서기가 미사일을 싣고 쿠바로 향하던 배를 돌리고, 그래서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 브라질이 유엔총회에서 라틴아메리카 비핵지대 결의안을 제안했다.
그리고 지역의 다수 국가들과 관계가 좋고 미국과도 소통이 가능한 멕시코가 나섰다. 멕시코는 1964년 11월 17개국을 초청했고, 이 자리에서 비핵지대를 위한 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멕시코 외무차관인 알폰소 가르시아 로블레스가 위원장을 맡았다. 그는 유연하고, 헌신적이며, 성실한 자세로 협상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래서 ‘틀라텔롤코 조약의 아버지’로 불리며 이 공로로 198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협상이 시작된 1964년은 격변기였다. 소련에서는 흐루쇼프 서기장이 실각했다. 베트남전쟁이 시작되었고, 중국은 그해 10월 핵실험에 성공했다. 다른 지역이 전쟁의 계곡으로 들어갈 때, 중남미 국가들은 평화의 들판으로 나섰다.
1967년까지 4번의 회담이 있었다. 난관은 적지 않았다. 가장 우선적인 과제는 쿠바의 참여다. 로블레스는 피델 카스트로에게 편지를 보내 참여를 요청했다. 그러나 카스트로는 미국의 관타나모 기지 주둔을 비난하면서, 미국이 쿠바에 대한 적대정책을 포기하지 않는 이상 참여하지 않겠다고 알려왔다.

중남미 비핵지대화 구상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1962년 미사일 위기 중 카리브해에서 소련 상선을 쫓는 미국 해군 전투기.U.S. Navy National Museum of Naval Aviation

중남미 비핵지대화 구상은 쿠바 미사일 위기가 그 직접적인 동기가 되었다. 1962년 미사일 위기 중 카리브해에서 소련 상선을 쫓는 미국 해군 전투기.U.S. Navy National Museum of Naval Aviation

검증 방법 또한 쟁점 중 하나였다.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검증’이라는 개념이 제기되기도 했다. 국민이 직접 검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정부가 자신의 시민에게 스파이 노릇을 허용하겠는가?”라는 반론이 제기되었다. 검증은 각국이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안전협정을 체결해 추진하도록 했다.

다자 협상은 양자 협상보다 훨씬 어렵다. 의견이 여러 갈래로 나뉘고, 그래서 조정 과정도 복잡하다. 대체로 두 편으로 갈렸다. 한쪽은 멕시코가 주도했다. 집단적 규범을 강조했고 실용적 접근을 중시했다. 다른 쪽에는 브라질과 아르헨티나가 있었다. 브라질은 처음에 비핵지대 조약에 적극적이었지만, 1964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입장이 변했다. 아르헨티나에서도 1966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났다. 양국의 군사정부는 멕시코가 주도하는 협상에서 공동전선을 펴기 시작했다. 양국은 집단적 규범이 아니라, 각국의 재량권을 허용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3차 실무회담에서 브라질은 엄격한 전제조건을 제시했다. 이 지역의 모든 국가와 중국을 포함한 모든 핵 보유국, 그리고 영토적 이해를 지닌 모든 국가가 비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브라질의 주장대로 하면, 이 조약은 출발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미 쿠바가 불참을 통고했고, 중국의 참여도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멕시코의 유연하고 실용적인 중재

또한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는 핵무기를 실은 항공기나 배의 통과를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파나마운하 통과를 문제 삼은 것이다. 당시 미국과 영국은 통과 조항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협상 막바지에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평화적 핵폭발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고속도로를 만들고 항구와 운하를 만들 때, 핵폭발을 허용하자는 주장이다. 미국·영국·소련은 비핵지대 조약에서 ‘평화적 핵폭발’을 허용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군사적 목적과 평화적 목적을 구분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유였다.

수많은 쟁점을 헤치고 나간 것은 로블레스의 협상력이었다. 파나마운하 통과 문제는 주권을 앞세워서 각국의 재량권에 맡기는 것으로 절충했다. ‘평화적 핵폭발’에 관한 조항은 원칙적인 수준에서 허용했지만, 각국이 다르게 해석할 수 있도록 했다. 멕시코를 비롯한 대다수 국가는 평화적 목적과 군사적 목적을 구분할 수 있을 때까지 ‘평화적 핵폭발’을 금지해야 한다고 해석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평화적인 용도라면 가능한 것으로 해석했다. 1990년 양국이 모든 핵실험 금지에 동의할 때까지 해석의 차이는 지속되었다.

로블레스는 차이는 절충하고, 타협이 어려운 쟁점은 시간이 해결할 수 있는 여지를 두고자 했다. 가장 중요한 협상의 기술은 바로 조약 발효에 관한 신축성이다. 조건부 유보, 즉 웨이버 조항을 둬서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체면을 살려주었다. 3분의 2의 지지로 개정할 수 있는 조항도 만들어 양국이 주장하는 몇 가지 원칙적 주장의 가능성도 열어주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아르헨티나는 서명했으나 비준을 유보했다. 브라질과 칠레는 조건부로 비준했다. 조건이란 모든 라틴아메리카 국가, 영토적 이해를 지닌 국가, 핵 보유국 모두 비준할 때까지 효력을 유보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쿠바가 불참한 가운데, 틀라텔롤코 조약은 출발했다.

조약은 서문, 본문 그리고 두 개의 부속의정서로 이루어졌다. 의정서1은 중남미에 영토적 이해를 지닌 국가들의 의무에 관한 것이고, 의정서2는 핵 보유국들이 이 지역 국가들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하거나 위협하지 않는다는 내용이다. 1970년대를 거치면서 해당 국가 모두 조약에 참여했다.

공동의 적에 대응하다 정이 들다

조약의 운명은 결국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에 달려 있었다. 두 나라는 왜 조약 비준에 소극적이었을까? 그들은 핵개발을 추진했고, 그래서 시간을 벌고자 했다. 양국은 이 지역의 전통적 라이벌이다. 19세기 영토 분쟁이 끊이지 않았고 전쟁을 겪기도 했다. 이들이 핵개발에 집착한 이유 역시, 상대에 대한 불신과 군사적 경쟁 때문이었다.

아르헨티나는 1950년 5월 원자력위원회를 설립했다. 그리고 나치 독일에서 핵개발에 참여했던 과학자를 초빙해 대규모 연구시설을 제공했다. 리히터라는 이름의 과학자는 1951년 3월 소규모지만 핵분열 실험에 성공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연구 결과가 사기로 밝혀져 쫓겨났다. 이후에도 지속적인 노력으로 1960년대 중반 시점에 아르헨티나는 핵 재처리 기술을 보유했다. 브라질도 경수로형 원자로와 우라늄 농축을 병행 추진했다.

각자 핵개발을 추진하던 양국은 1970년대 후반부터 공동대응을 모색한다. 양국의 핵 문제에 대한 신뢰 구축 과정은, 한마디로 공동의 적에 맞서다 정이 든 경우다. 핵 공급 국가들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에 대해 강력한 수출 통제를 취해왔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이 본격적으로 핵 협력에 나서게 된 계기 역시 미국과의 관계 때문이다. 1977년 1월 브라질의 아르투르 다 코스타 이 시우바 대통령이 독일에서 우라늄 농축 기술을 도입하고자 했을 때, 지미 카터 대통령은 월터 먼데일 부통령을 직접 보내 이 거래를 막았다. 즉각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은 외무장관 회담을 열어 양국 원자력위원회의 기술 공유를 선언했다. 아르헨티나 역시 경수로 원자로 도입 문제로 미국과 갈등을 겪고 있었다.

1980년대 양국에서 차례로 민주화가 이루어지고 민간 정부가 출범하면서 협력의 성격도 달라졌다. 민주화 이후 시기인 1985년과 1986년 사이 양국 대통령은 8번 만났고, 31건의 협정에 서명했다. 군사독재 시기인 1976년에서 1982년 사이 단지 3번 만난 것과 비교해보면 확실히 양국 관계는 달라졌다. 포괄적인 협력관계가 구축되었다.

1987년 7월 아르헨티나의 라울 알폰신 대통령은 필카니예우 지역의 우라늄 농축 시설에 조제 사르네이 브라질 대통령을 초청한다. 그동안 비밀을 유지했던 시설을 경쟁국에 과감히 개방한 것이다. 브라질 역시 화답했다. 1988년 아르헨티나의 알폰신 대통령을 아라모 지역의 농축시설로 초청했다. 양국 대통령은 과학기술 관련 장관뿐만 아니라 전문가들과 함께 상대 지역의 핵시설을 방문했다. 가장 확실한 신뢰 구축 조치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1990년 브라질의 페르난두 콜로르 지 멜루 대통령은 아마존 정글에 비밀리에 만든 핵실험 갱도를 공개하고, 폐쇄했다. 브라질 군부가 비밀리에 추진했던 핵무기 개발은 이로써 실질적으로 중단되었다.

그리고 1990년 양국의 국경지역에 걸쳐 있는 이구아수 폭포에서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열린다. 아르헨티나의 카를로스 메넴 대통령과 브라질의 멜루 대통령은 중남미 비핵지대 구상을 지지하고, ‘평화적 핵폭발’을 포기하며, IAEA 안전조치를 준수하기로 합의했다. 또한 양국은 핵물질 통제를 위한 공동기구(ABACC)를 만들었다. 책임자는 양국이 1년씩 돌아가며 맡고, 50명의 조사관은 양국이 각각 25명으로 구성하며, 상대 국가의 시설을 검증하도록 했다. 동시에 IAEA와 안전협정을 체결함으로써 핵무기 개발 의혹을 완벽하게 불식시켰다.

동북아 비핵지대도 가능할까?

1992년 8월 아르헨티나, 브라질, 그리고 칠레와 멕시코는 틀라텔롤코 조약의 개정을 요구했다. 조약의 검증 방법을 더 구체적이고 엄격하게 하자는 제안으로 다수 국가의 지지를 얻었다. 이로써 아르헨티나·칠레·브라질은 개정 조항을 명분으로 1994년 최종 비준을 한다. 미국의 태도를 문제 삼던 쿠바도 이때 조약에 서명한다. 조건부 참여의 길을 열어놓은 조약은 엄격한 법적 규범으로 완성되었다.

중남미 비핵지대에 이어, 아프리카와 중앙아시아에서도 비핵지대 조약이 체결되었다. 동북아시아에서는 불가능할까? 상황의 차이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알고 보면 중남미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걸렸다. 교훈은 분명하다. 관계를 개선하면, 그래서 신뢰 수준이 높아지면, 핵을 포기할 수 있다.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처럼 말이다. 북핵 문제로 우리는 전환기에 서 있다. 어쩌면 가장 어려울 때가 가장 근본적인 해법을 선택할 때가 아닐까? 그래서 한반도를 넘어 동북아 비핵지대를 상상해본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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