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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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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완 시대’를 만든 힘

정치·경제 분리해 중국-대만의 교류 협력 전환기 된 1993년 ‘왕구회담’
정치·군사 위기에도 계속된 경제협력이 경제통합 낳아
등록 2014-03-21 16:34 수정 2020-05-03 04:27

최근 중국-대만의 관계는 눈부시다. 정경분리, 즉 정치와 경제를 분리하고 우선적으로 경제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은 성공했다. 양안은 경제통합으로 나아가고 있다. ‘차이완 시대’라는 말도 등장했다. 경제는 정치에도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 지난 2월에는 분단 이후 처음으로 양쪽의 장관급 회담이 열렸다. 한때 대포가 날아다니던 바다였다. 그러나 이제 교류의 바다, 협력의 바다로 변했다. 전환의 순간은 바로 1993년의 ‘왕구(王辜)회담’이다.

민주화와 탈분단 결단 내린 장징궈

왕구회담은 중국 해협양안관계협회(해협회)의 왕다오한 회장과 대만 해협교류기금회(해기회)의 구전푸 회장의 회담을 말한다. 1949년 분단 이후 최초의 접촉이다. 해기회와 해협회는 정부기관이 아니다. 그렇다고 민간기관도 아니다. 정부와 민간 사이, 혹은 반관반민이다. 양 기관의 정치적 위상은 간단하지 않다. 해기회는 대만 행정원 대륙위원회의 권한을 위임받아 협상에 나섰다. 구 회장은 당시 리덩후이 총통의 최측근으로 국가통일위원회 위원이며, 경제부 고문을 역임한 인물이다. 중국의 해협회 역시 당의 관련 기구, 그리고 국무원의 대만사무판공실과 연결돼 있었다. 왕 회장은 상하이 시장을 했고, 당시 총서기인 장쩌민과 대학 동문(상하이교통대학)이었다. 한마디로 최고지도자의 측근 인사였다.
왜 반관반민 기구를 만들었을까? 대만이 정부 차원의 접촉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만은 당시까지 ‘3불 정책’(접촉하지 않고, 회담하지 않고, 타협하지 않는다)을 고수했다. 그런데 양안 사이의 교류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대만이 해기회를 만든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국 정부와 공식적으로 접촉하지 않으면서 교류 과정에서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양안의 교류는 중국이 개혁·개방을 시작하면서 먼저 제안했다. 중국은 1979년 1월 양안 사이의 3통(통신·교통·우편)과 4류(경제·과학기술·문화·체육)를 실현하자고 제안했다. 대만과 인접한 푸젠성 등에 경제특구를 만들면서 대만 자본을 유치하고 싶어 했다.
힘이 약한 대만은 움츠렸다. 대만은 3불 정책을 유지했다. 그러다 전환의 시점이 왔다. 심장박동기를 달고 죽음을 눈앞에 두고 있던 장징궈 총통이 결단을 내렸다. 1987년 7월 계엄령을 해제했고, 10월에는 대만 주민의 대륙 친척 방문을 허용했다. 아버지 장제스가 묶은 매듭을 아들은 풀고 싶었다. 자신이 죽기 전에 말이다. 하나는 민주화의 길이고, 다른 하나는 탈분단의 길이었다. 장 총통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사적 책임’을 회피하지 않았다.
장징궈의 뒤를 이은 리덩후이 총통은 1990년 6월 국시회의(國是會議)를 열었다. 야당과 지식인, 사회 각계의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 중화민국의 시대적 쟁점을 토론하고 합의했다. 이 회의에서 개헌을 통해 정치민주화를 하기로 합의했다. 그리고 중국의 정치 실체를 인정하고 새로운 상호 관계를 구축할 것을 결정했다. 1990년 10월 ‘국가통일위원회’를 만든 이유도 대중국 정책에서 사회적 합의를 중시했기 때문이다. 총통이 직접 위원장을 맡았고 사회 각계의 대표들이 위원회에 참여했다.
양안의 인적 교류는 급속하게 늘기 시작했다. 대만인의 대륙 방문은 1990년 85만 명에 불과했으나 1991년에는 100만 명을 넘어섰다. 양안 사이의 무역액은 1991년 기준으로 50억달러를 넘어섰다. 교류가 증가하면서 문제도 많아졌다. 밀수 행위, 대만으로의 밀입국 문제도 계속 발생했고 어업 분규도 끊이지 않았다.

쉬운 문제 먼저 풀고 어려운 문제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만나서 해결해야 한다. 1986년 5월, 대만 중화항공공사의 화물기 기장이 비행기를 몰고 광저우의 비행장으로 망명한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승무원 중 2명은 대륙 잔류를 거부하고 대만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결국 홍콩에서 양쪽의 국영 항공사 간 회담이 열렸다. 당연히 양쪽의 최고지도자인 덩샤오핑과 대만의 장징궈 총통의 결단이 작용했다. 이 밖에도 사안별로 접촉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계속 발생했다.
해기회와 해협회는 교류 과정에서 발생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창구다. 1992년 중국의 해협회가 먼저 만나자고 제안했다. 양쪽은 17차례 서신을 주고받았다. 그해 4월 대만 해기회의 비서장이 대륙을 방문했다. 예비회담을 열기 위해서다. 대만은 민간 차원이라는 형식을 강조했고, 사무적인 분위기에서, 경제 문제에 집중하고자 했다. 민간 교류에서 파생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어디 그런가? 경제 문제에 집중한다고 정치 문제를 피할 수는 없었다. 정치와 경제는 언제나 서로 얽혀 있다. 당장의 문제는 ‘하나의 중국 원칙’이었다. 중국은 대만이 이 원칙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원칙’을 수용해야 회담을 할 수 있다고 강하게 나왔다. 이 문제는 단지 추상적인 원칙만은 아니었다. 구체적 현안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시 양안의 핵심 현안은 공증문서 사용과 등기우편 문제였다. 중국은 양안 관계가 국가와 국가 관계가 아니기 때문에, 다시 말해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따라 기존 국내 부서에서 이 업무를 취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만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당장 정부기관과 접촉하지 않는다는 3불 정책과 부딪혔다. 대만은 이러한 업무들이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번째 고비를 어떻게 넘겼을까? 그들은 중국의 고전적 협상의 지혜를 따랐다. 쉬운 문제를 먼저 풀고 어려운 문제는 나중에 해결한다는 협상의 기술 말이다. 양쪽은 ‘하나의 중국 원칙에 동의하되, 서로 다르게 해석한다’고 합의했다. 이것이 바로 ‘92인식’이다. 정치적 주권이라는 어려운 문제는 나중으로 미루고, 서로에게 실질적 이득을 줄 수 있는 교류협력에 집중하자는 타협이었다.
예비회담에서 또 다른 쟁점은 회담 장소였다. 대만은 회담 장소로 중국을 피했다. ‘대등한 정치적 실체로 인정받는 것’이 중요한 협상 목표였고, 중국에서의 회담을 굴복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3국 개최를 고집했다. 강자는 형식을 양보할 수 있지만, 약자는 형식에 집착한다. 대만 내부에서는 ‘공산당에 대만을 팔아먹는 회담’이라는 비판 여론도 적지 않았다. 국민당 정부 사람들은 과거 두 차례의 국공회담을 잊지 않고 있었다. 공산당에 놀아났다는, 심리적 패배감 말이다. 대만은 회담 장소뿐만 아니라 회담 과정에서 의자의 배치, 대표의 입장 순서, 호칭, 그리고 발언 시간의 대등성 등 세세한 부분에서 형식을 중시했다.

양안 중재하는 리콴유의 등거리 외교

싱가포르라는 제3국에서 회담이 열린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싱가포르의 리콴유 총리는 오랫동안 양안의 실질적인 중재로서 노력을 기울여왔다. 싱가포르는 이미 1981년부터 양안 사이를 중재하는 등거리 외교를 시작했다. 리콴유는 중국과 관계를 개선하면서, 동시에 대만과의 관계를 소홀히 하지 않았다. 중국을 공식 방문하는 해에는 반드시 휴가를 대만에서 보냈다. 중재자가 되려면 반드시 양쪽에서 동시에 인정받아야 한다. 쉬운 일이 아니다. 치밀하고, 꾸준해야 하며, 균형을 잃지 않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싱가포르의 중재는 해외 화교들의 기대를 반영했다. 양안의 교류와 협력을 바탕으로 해외 화교를 포괄하는 중화경제권의 꿈 말이다.
왕구회담은 1993년 4월27일부터 29일까지 사흘간 열렸다. 원래 회담 기간은 이틀이었지만 하루 연장됐다. 왕다오한 회장은 “장쩌민 선생의 안부를 리덩후이 선생에게 전한다”는 말로 인사말을 시작했다. 중국은 대만의 3불 정책을 돌파하려 했다. 반면 대만은 3불 정책을 카드로 투자보장협정과 중국의 무력 사용 포기 등을 얻으려 했다.
왕 회장은 공식 회담이 시작되자, 대만이 동의하기 어려운 3통 문제를 들고나왔다. 대만의 투자보장협정 체결 주장을 좌절시키기 위한 카드였다. 중국은 투자보장협정을 ‘국가와 국가 사이에 체결할 수 있는 사안’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1년 뒤인 1994년 3월 중국은 ‘대만동포 투자보호법’을 통과시켰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현실을 수용한 것이다.
‘절반의 성공’ 혹은 ’절반의 실패’라고 평가할 수 있었다. 당장 합의하기 어려운 부분은 이후 오랜 시간을 거치면서 하나씩 현실화됐다. 첫 만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회담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가장 중요한 성과는 양쪽의 연락 체계 구축과 회담의 정례화였다. 회장급은 연 1회, 비서장급 회담은 연 2회, 실무자급은 3개월마다 한 번 만나기로 합의했다. 문서 공증은 중국공증원협회와 대만의 해기회, 그리고 우편은 중국통신학회우정전업위원회와 해기회 사이에 하기로 했다. 민간 차원에서 해야 한다는 대만의 주장을 중국이 수용했다.
왕구회담을 연 1회 열자는 양쪽의 합의는 지켜지지 않았다. 회담 이후 양안 관계가 순조롭지 않았기 때문이다. 적대 관계가 협력 관계로 전환하려면 과정이 필요하다. 그 과정은 전진과 후퇴, 그리고 과거와 미래가 충돌하는 혼란스러움으로 그득하다. 협력의 틈에서 적대감이 고개를 들 때, 특히 조심해야 한다. 1995년 리덩후이 총통의 미국 방문으로 양안 관계가 경색됐을 때가 고비였다. 당시 미국은 자신의 모교인 코넬대학을 방문하겠다는 리 총통에게 일반인 자격의 입국비자를 허용했다. 중국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대만해협에서 군사시위를 하고, 미사일 실험 발사를 강행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다. 양쪽은 정치·군사적 위기에도 불구하고 민간의 교류협력을 제한하거나 축소하지 않았다. 1995년 중국이 군사시위를 하는 동안 푸젠성에서 대만 기업인들을 대상으로 한 투자설명회가 취소되지 않고 열렸다. 얼음장 밑의 흐르는 물처럼, 경제협력은 중단되지 않았다. 2000년부터 민진당 집권 8년 동안 양안 관계가 경색됐을 때도 마찬가지다.

국민당 재집권, 양안 관계 획기적 변화

마침내 2008년 국민당이 다시 집권하면서 양안 관계는 획기적으로 변했다. 2008년 5월 대만 정부는 끈질기게 거부해온 양안의 3통을 사실상 허용했다. 양안 사이에 직항 전세기가 운항되고, 중국인들의 대만 관광이 허용됐다. 그리고 2010년 양안은 양안경제협력기본협정을 맺었다. 자유무역협정의 출발이다. 해협회와 해기회의 역사적 임무가 서서히 정부 차원의 협상으로 전환하고 있다. 왕구회담에서 서로 확인한 ‘분리되면 서로 손해고, 합치면 서로 이익이다’(分則兩害, 合則兩利)라는 말은 여전히 유효하다. 개성공단을 제외하고 모든 남북 경제협력이 끊어진 한반도도 이 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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