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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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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한 통일 이별의 평화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랜 22년의 내
전 끝에 2011년 분리독립 성공한 남
수단공화국… 그들은 왜 평화를 위
해 이별했을까?
등록 2013-10-24 18:35 수정 2020-05-03 04:27

평화가 없는 통일은 통일이 아니다. 화해가 없는 통일은 얼마나 허망한가? ‘뭉쳐야 산다’고 누가 말했나? 헤어져서 평화로운 사례가 있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가장 오랫동안 내전을 치렀고, 분쟁의 교과서에 빠지지 않는 단골이며, ‘풀기 어려운 평화’의 대명사였다. 내전의 출구는 남수단의 분리독립이었다. 2011년 7월9일, 아프리카의 54번째이며 지구상에서 193번째인 나라, 남수단공화국이 탄생했다. 그들은 왜 평화를 위해 이별했을까?

신뢰 없는 통일, 2차 내전으로

분리독립의 역사적 배경은 아주 길다. 오래전부터 남부 수단은 북부 수단의 내부 식민지였다. 7세기 중반 아랍인들이 이주해오면서 북부를 차지했다. 남부는 쫓겨난 토착 원주민들이 사는 주변으로 몰락했다. 북부는 아랍의 이슬람 문화가 지배했고, 남부는 아랍 이주 이전에 존재했던 기독교와 토착종교를 믿는 사람들이 살았다. 천연자원이나 농사지을 땅은 남부에 더 많았다. 그러나 북부만 발전했다. 왜일까? 남부는 북부의 착취 대상이었다.
영국 식민지 시기에 남·북부의 경계가 더 굳어졌다. 영국은 분리정책을 실시해서, 이슬람 상인과 성직자의 남부 접근을 금지했다. 남부는 아랍어 교육이 아니라, 대신 영어 교육을 장려했다. 그렇다고 영국이 남부를 분리독립시키지도 않았다. 남부가 떨어져나가면 북부의 경제력이 상실되고, 그러면 이집트에 흡수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1956년 1월1일 수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했다. 내전은 그때 이미 시작된 상태였다. 왜 독립도 하기 전에 내전에 돌입했을까? 독립국가에 대한 개념이 달랐다. 남부는 완전한 자치가 보장되는 연방제를 원했다. 그러나 북부는 단일국가를 선호했다. 그것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북부 수단이 독립을 주도했다. 독립 이후 북부 출신들이 남부의 행정 관료층을 차지했다. 북부는 남부의 아랍화·이슬람화를 추구했다. 대부분의 기독교계 학교를 폐쇄했고, 마을을 불태우기도 했다. 탄압이 강화되자 내전의 불길도 타올랐다. 기독교를 탄압했지만, 오히려 기독교로 개종하는 남부 사람들이 늘어났다.
계속 싸운 것은 아니다. 몇 번의 대화가 있었다. 그리고 1972년 2월, 에티오피아의 아디스아바바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수단 정부와 남부 수단인민해방군이 싸우지 않기로 합의한 것이다. 빛나는 성과였다. 아프리카에서 협상을 통해 평화에 이른 최초의 사례였다. 이스라엘과 우간다의 이디 아민 정권이 남부를 지원하는 등 내전의 국제 환경이 달라지자, 북부는 평화를 수용했다. 합의는 당시 상황에서 최선의 타협이었다. 그러나 깨지기 쉬운 것이었다.
싸우지 않기로 합의했지만, 그들은 상대를 신뢰하지 않았다. 특히 남부 사람들은 수단 정부가 단지 전술적 차원에서 합의했을 뿐 진정성이 없다고 판단했다. 불신은 협정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신뢰가 없으면 합의문은 논쟁의 근원이자 싸움의 발원지가 된다. 서로 다른 해석이 끝없이 반복되었다. 서로에게 지치고, 그럴 때마다 증오를 키웠다.
결정적 쟁점은 통일이었다. 내전은 폭력적 통일을 목표로 했지만, 평화협정은 제도적 통일을 지향했다. 제도 통합 과정에서 문제가 드러났다. 합의문에 적은 자치의 내용을 서로 다르게 해석했다. 남부는 완전한 연방제로 해석했지만, 북부는 단지 ‘낮은 수준의 자치’를 고려했다. 물론 합의에 참여하지 않은 남부 수단의 다른 반군단체들은 완전 독립을 주장했다. 그들은 자치를 독립 포기로 해석했다. 북부 수단의 강경파들은 그 정도의 자치도 강력하게 반대했다.

민주화 회피 명분 된 22년의 내전

그리고 결국 군대의 통합이 문제가 됐다. 1972년 협정에서 반군은 정규군에 흡수되기로 했다. 그들은 누구인가? 서로 총부리를 겨누던 사이였다. 일부 반군은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그만큼 상대를 신뢰하지 못했다. 정규군에 흡수된 반군들도 계급 부여 과정에서 차별을 겪었다. 섞이지도 못했다. 군대 통합 과정에서 폭력과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반군 출신들은 통합을 거부하고 원래의 망명지였던 에티오피아 국경으로 돌아갔다. 2차 내전이 재발했을 때, 그들이 반군의 주력이 되었다. 통일은 평화를 가져오지 않았다. 신뢰가 없는 통일, 화해가 없는 평화는 다시 내전으로 가는 잠깐의 휴식이었을 뿐이다.
2차 내전이 1983년부터 시작되었다. 22년간 계속되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싸웠을까? 양쪽 모두 군사적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었다. 내전이되 동시에 국제전의 성격을 띠면서, 시기별로 각자에게 유리한 환경이 조성되기도 했다. 수단 정부 입장에서 내전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다. 주로 남부 지역에서 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북부의 희생을 줄이고 남부 내부의 갈등을 부추겼다. 수단 정부군과 남부 반군 사이의 전투보다, 남부 내부 투쟁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민중은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얻을 것이 더 많았다. 수단 정부와 반군 모두에게 내전은 민주화를 피하는 명분이었다. 수단 정부는 언제나 내전을 이유로 초과 예산을 지출했다. 수단인민해방군 역시 모든 재정을 비밀로 유지했다. 평화가 오면 전쟁을 주도했던 자들이 자리를 지킬 수 있을까? 평화로 잃을 것이 많은 세력이 전쟁을 지속했다.
그러면 어떻게 평화가 더 얻을 것이 많다고 생각을 바꿀 수 있었을까? 2004년 합의문에 서명하면서, 반군 지도자인 존 가랑은 “전쟁을 계속하는 것이 전쟁을 멈추는 것보다 훨씬 비용이 많이 들었다. 우리는 외부의 압력으로 합의에 도달했다”고 고백했다. 국제사회의 평화 노력과 적극적 개입이 결정적이었다. 그동안 수많은 평화 구상이 제시되었다. 주변국을 포함해 웬만한 국가는 모두 한 번쯤 수단의 평화를 위해 나선 경험이 있다.
2000년대 들어 국제사회의 노력이 흩어지는 소음이 아니라 어울리는 화음으로 모아지기 시작했다. 우선적으로 동아프리카 주변국들이 평화적 해결을 원했다. 수단과 국경을 인접한 국가들은 내전 과정에서 쏟아져나오는 난민 부담에서 벗어나고 싶어 했다. 국경지대가 불안해지자 무기 거래나 불법적 행위도 늘어났다. 동아프리카 정부간개발기구(IGAD)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의장국인 케냐의 역할이 돋보였다. 케냐는 1998년 나이로비의 미국대사관 폭탄테러 사건 이후 반테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물론 이집트처럼 분쟁 해결에 소극적인 주변국도 있었다. 이집트는 북부 수단과 오랫동안 협력 관계를 유지해왔기 때문에, 만약 남부 수단이 독립하면 협력 관계를 재조정해야 하는 부담이 있었다.

부시 행정부와 9·11 테러 결정적

역설적이지만, 부시 행정부의 등장과 9·11 테러가 결정적 계기였다. 부시 행정부는 9·11 테러 이후 알카에다의 배후 거점국가로 수단을 지목했다.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보면서 수단 정부는 겁을 먹었고, 미국의 반테러 활동에 적극적으로 협조했다. 수단 정부는 테러 용의자들을 미국에 인도하기도 했고 관련 정보를 넘겼다. 그 과정에서 남부 수단의 분리를 강력히 반대해왔던 이슬람 급진세력과 결별했다.
동시에 부시 행정부의 강력한 지지 세력이던 미국의 우파 기독교계는 수단 내전을 이슬람의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해석했고, 남수단에 대한 인도적 개입을 강력히 요구했다. 유럽 국가들도 동참했다. 영국은 식민지 역사에 대한 책임이 있었다. 9·11 테러 이후 미국과 유럽은 수단 문제 해결에 공조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평화협상의 이행 결과를 인도적 지원과 연계했다.
물론 수단 내부의 변화도 있었다. 막대한 채무로 대외의존성이 높고 국제사회의 인도적 지원에 기대야 하는 수단 정부는 변화된 국제 환경을 수용했다. 남부 수단에서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남수단의 시민사회는 수단인민해방군의 군사주의와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교회 지도자들도 적극적으로 평화를 촉구했다. 내전으로 250만 명 이상이 사망했고, 수백만 명이 고향을 잃었다. 지칠 만큼 싸웠을 때, 달아났던 평화가 찾아왔다.
남수단의 분리독립은 오랫동안 논의된 것이다. 과거 통일을 지향하다 내전이 재발한 기억도 참조했다. IGAD의 중재가 시작된 것은 이미 1989년부터였다. 평화협정의 기본 원칙이 합의된 이후에도 2년 이상의 집중 협상 기간을 거쳤다. 그리고 6년의 과도 기간을 거쳤다. 이제 헤어져서 평화로운가? 그럴 리가 있겠는가? 2003년 초에 발생한 다르푸르 사태는 평화가 얼마나 멀리 있는지를 다시 깨닫게 해주었다. 정부군이 지원하는 이슬람 민병대가 인종청소에 나서 7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이슬람이 이슬람과 싸우고, 부족과 부족이 싸우면서, 내전의 복잡성이 재확인되었다.
다르푸르의 상처를 안고 남북 수단은 갈라섰다. 이제 다른 나라가 되었다. 그러나 관계는 끝나지 않았다. 여전히 청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그중에서 석유를 둘러싼 이익의 배분이 쟁점이다. 수단은 아프리카에서 5위의 석유 생산 국가다. 분리독립 이전 원유 수출은 수단의 총수출액에서 95%, 정부 수입의 60%를 차지했다.
원유의 70~80%는 남부에 매장돼 있다. 그런데 과거 수단 정부는 5개 정유시설과 송유관, 그리고 항구를 모두 북부에 건설했다. 남수단이 분리독립했지만, 원유를 수출하려면 북부를 통과해야 한다. 중심이 주변에 쳐놓은 덫이다. 2011년 5월에는 석유 매장지면서 분쟁 지역인 아비에이를 수단 정부가 무력으로 장악하기도 했다. 타보 음베키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고, 유엔안전보장이사회의 결정으로 이 지역에 에티오피아 평화유지군이 파견되기도 했다. 2013년에도 북부가 송유관 이용료를 인상해서 갈등을 빚었다. 다행히 남북 정상회담을 통해 합의에 도달했다.

적대적 의존을 무엇으로 메울까?

오래 싸우다보면, 싸움의 원인을 잊어버릴 수 있다. 매듭을 찾아야 풀 수 있는데, 너무 많이 꼬이면 알 수 없다. 수단 내전이 그랬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결국 헤어졌다. 가야 할 길이 멀다. 오랜 내전이 뿌려놓은 분열·증오·복수가 호시탐탐 평화의 길목에 도사리고 있다. 중심과 주변의 불평등한 관계를 분리독립으로 해소했지만, 여전히 그들은 협력해야 한다. 내전 기간에 적의 존재는 나의 결함을 숨기는 명분이었다. 이제 적대적 의존관계는 사라졌다. 두 국가 모두 스스로의 힘으로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이뤄야 한다. 가야 할 길이 멀어 보인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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