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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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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가장 오래된 내전 그리고 협상

혁명을 위해 산으로 들어갔지만 민중의 지지를 잃은 콜롬비아 무장혁명군,
5월 하순 ‘협상파’ 산토스 대 ‘소탕파’ 우리베의 선거 결과가 향방 결정
등록 2014-05-24 15:41 수정 2020-05-03 04:27

노벨문학상을 받은 가브리엘 마르케스는 ‘백년의 고독’이라고 했다. 콜롬비아에서 19세기에 시작된 내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인구는 4700만 명이지만 국토 면적은 한반도의 5배인 나라. 원유·니켈·구리 등 광물자원이 풍부하고, 꽃과 커피의 세계적 수출 국가인 콜롬비아.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내전, 가장 오래된 무장반군, 그리고 가장 오래된 평화협상이 현재 진행 중이다. 우리는 마르케스의 소설을 현실과 환상을 구분하기 어려운 ‘마술적 리얼리즘’이라고 부른다. 현실 같지 않은 현실, 어쩌면 오래된 내전의 역사 때문이리라.

1899년 내전, 비극의 시작

1819년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한 콜롬비아는 보수당과 자유당의 양당제를 유지했다. 문제는 반목과 대립이다. 유혈 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마르케스 소설의 무대였던 천일전쟁, 즉 1899년 8월의 내전은 이후 비극의 시작이었다. 전쟁 기간 중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내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끝났지만, 콜롬비아는 그 대가로 파나마 지역과 파나마 운하를 빼앗겼다.
증오는 세습되고, 복수의 사연은 넘쳐났다. 20세기에 들어와서도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물론 타협도 있었다. 1958년부터 보수당과 자유당은 권력의 동등 배분과 정권 교대제에 합의했다. 그들만의 타협이었다. 정치는 민중의 이해와 멀어졌다. 인구의 1%에 불과한 대지주들이 국토의 50%를 차지한 극심한 양극화는 그대로 유지됐다. 기득권 연합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들은 제도 밖으로 걸어나갔다. 그들은 총을 들었다. 그리고 산으로 갔다. 무장반군의 역사가 시작됐다.
국토는 넓었다. 정글과 산악지역 등 정부군이 접근하기 어려운 지형이 적지 않았다. 반군은 가난 속에서 번식했다. 무장반군들은 지역별로, 또는 운동계파에 따라 다양했다. 가장 대표적인 단체는 콜롬비아무장혁명군(FARC)이다. 1964년, 그들은 전사 48명으로 출발했다. 주로 공산당과 연결돼 있었던 농민반군 출신이다. 그들은 1950년대 토지개혁과 농촌발전을 주장해온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든 문을 두드렸지만 대답이 없어, 결국 총을 들기로 했다”고 선언했다. 2005년 무장혁명군은 약 1만8천 명까지 늘었다.
두 번째로 큰 단체는 민족해방군이다. 1965년 쿠바 혁명, 즉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 좌파 지식인, 학생, 해방신학을 받아들인 가톨릭 급진파가 주요 구성원이다. 무장혁명군과 비교해서 훨씬 이념적이며, 베네수엘라 국경지대를 근거로 활동하며, 2013년 2천 명 수준으로 줄어들었다.
좌파만 있는 게 아니다. 우익 민병대도 있다. 그들은 1980년대에 등장했다. 부유한 지주들이 반군으로부터의 안전을 위해 사병을 고용했다. 민병대라는 이름은 일종의 사병 연합을 의미한다. 우익 민병대는 1988년 1500명으로 시작했고, 2002년에는 1만2천 명까지 늘어났다.
냉전이 끝나면서 반군이 들었던 깃발의 색깔이 바랬다. 혁명은 길을 잃었다. 그 자리를 생존이 차지했다. 그들은 생계 수단으로 마약 거래, 납치, 테러 등 불법 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다. 1990년대 무장혁명군의 수입 중 48%가 마약업자로부터의 수금이었다. 마약 생산을 보장하고 가공공장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삥’을 뜯었다. 그들은 이 돈을 ‘혁명세’라고 불렀다. 그들은 민중에게서 멀어졌다. 진보적 지식인들의 지지도 잃었다. 학생운동으로부터의 충원도 끊겼다. 운동의 타락이 가져온 결과다.

민병대의 학살, 제도 진입의 실패

이 시기에 성공적으로 변신한 세력도 있다. 예를 들어 ‘M-19’라는 이름의 무장단체다. M은 운동을 의미하고, 19는 1970년 4월19일 보수당의 부정선거를 규탄하자는 뜻이다. 중산층 중심의 자생적 사회주의를 지향하던 이들은 1989년 정부와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정부는 이들의 과거 활동을 사면해주고, 제도권 정당으로 변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이 단체의 지도자는 지방선거에 출마해서 시장으로 당선됐다.
과거 무장혁명군도 제도 안으로 들어올 기회가 있었다. 벨리사리오 베탕쿠르 대통령 집권 기간(1982~86)에 평화협정이 맺어져, 무장혁명군은 정치 참여를 결정했다. 그들은 애국연맹이라는 정당을 만들었다. 1986년 대통령 선거에 참여했고, 1988년 지방선거에서는 지방의원 수백 명을 당선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이들의 정치 참여는 무자비한 보복에 직면했다. 1986년과 1988년 선거에 참여한 애국연맹의 후보자들은 우익 민병대의 공격 대상이 되었다. 2천 명 이상이 암살되고 납치됐다. 공개적인 학살이었다. 이 과정에서 애국연맹의 대통령 후보도 암살됐다. 무장혁명군은 정치 참여를 철회하고 다시 무장투쟁으로 돌아갔다. 총을 버릴 수 있는 기회를 우익 민병대는 허용하지 않았다.
협상이 실패하고 무장반군에 대한 대중의 반감이 고조됐을 때, 알바로 우리베라는 정치인이 등장했다. 그는 무소속으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강한 군사력으로 확실하게 반군을 소탕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웠다. 2002년 그는 국민의 기대를 업고 당선됐다. 그리고 집권 이후 반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우리베 정권은 테러와의 전쟁에 나선 부시 행정부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 미국은 평화유지군이라는 명목으로 군사기지 3곳을 만들었다. 2000∼2007년 미국은 콜롬비아에 50억달러 이상을 지원했다. 이 과정에서 콜롬비아 정부군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군은 1986년 7만6천 명에서 우리베 정권이 출범한 2003년 20만 명으로 늘었다. 우리베의 두 번째 임기가 끝난 2010년 군은 28만3천 명, 경찰은 15만9천 명으로 늘어났다. 1990년대와 비교해보면 거의 2배였다.
우리베 정권의 강경 전략은 효과가 있었다. 무장혁명군의 지도부가 일부 제거됐고, 반군의 점령 지역은 축소됐다. 납치도 줄어들었다. 1990년대 후반 무장반군에 의한 납치는 연간 3천 건에 달했으나, 2002년에서 2009년 사이 1년에 200건 정도로 줄었다. 우리베는 이런 성과를 바탕으로 콜롬비아에서 19세기 이후 최초로 연임에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무장반군의 약화는 두 가지 계기를 통해 확인됐다. 하나는 2008년 7월 잉그리드 베탕쿠르 구출 작전이다. 그녀는 2002년 ‘녹색산소당’의 대통령 후보였다. 무장혁명군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반군의 범죄를 고발했고, 그러다 유세 도중 납치됐다. 그녀는 프랑스인과 결혼해서 프랑스 국적도 동시에 갖고 있었다. 프랑스도 그녀의 구출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납치 이후 6년이 흐른 어느 날, 그야말로 영화 같은 구출 작전이 이루어졌다. 특공대를 실은 헬기가 정글로 날아갔고, 사전에 매수한 반군 일부의 협조로 그녀를 포함한 15명을 성공적으로 구출했다. 그중에는 미국인 사업가 3명도 있었다. 반군의 사기는 떨어졌고, 우리베 대통령의 인기는 치솟았다. 베탕쿠르 구출 작전 직후 그의 지지율은 한때 91%까지 치솟았다.

베탕쿠르와 몬카조, 두 개의 드라마

또 다른 드라마도 있었다. 무장반군들이 여론에 굴복한 사건이다. 2007년 6월, 한 아버지가 길을 나섰다. 그의 아들은 10년 전 콜롬비아무장혁명군에 납치됐다. 구스타보 몬카조라는 이름의 교사 출신 아버지는 ‘아들을 석방하라’ ‘정부는 협상에 나서라’라는 구호를 외치며 걷기 시작했다. 그의 고향인 남부 지역에서 수도 보고타까지는 1186km, 46일간의 행진은 처음에는 외로웠다. 그러나 그가 지나간 길을 따라 물결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딸과 함께 걷고, 지나가는 마을에 들러 사연을 호소하고 지지 서명을 받는 그의 얘기가 알려지면서 사람들의 격려가 쏟아지고, 연대의 발걸음이 모이고, 정부와 반군 모두에게 압력의 바람이 불었다.
마침내 보고타의 볼리바르 광장에 도착했을 때 수천 명의 사람들이 그를 환영했다. 그중에는 우리베 대통령도 있었다. 이후 정부와 반군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 공방을 벌였지만, 아버지는 포기하지 않았다. 다시 1400km를 걸어서 베네수엘라까지 행진했고, 차베스 대통령의 지원을 약속받았다. 콜롬비아무장혁명군은 결국 여론의 압력에 굴복했다. 그들은 그의 아들을 2010년 3월 석방했다. 한 아버지의 집념이 만든 드라마는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렸다.
우리베의 후임은 후안 마누엘 산토스 대통령이다. 그는 우리베 정권에서 국방장관을 했고, 무장반군과의 전쟁에서 영웅이 되었다. 그는 우리베와 다른 길을 선택했다. 그는 평화 대통령이 되고 싶었다. 그래서 아주 신중하게, 그러나 진정성을 갖고 협상을 준비했다. 2010년 그는 베네수엘라의 차베스 대통령과 관계 개선에 나섰다. 차베스는 무장혁명군을 협상장으로 불러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산토스 정부는 2012년 8월 쿠바에서 무장혁명군과 협상했다. 처음에는 비밀협상으로 시작했다. 그리고 예비회담을 거쳤고, 그해 10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공식 회담을 했다. 이후 다시 쿠바로 옮겨 현재까지 협상을 계속하고 있다. 제3국이라는 장소는 협상의 과도한 열기를 진정시키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베네수엘라와 칠레, 쿠바와 노르웨이를 협상 과정에 참여시켜 심판을 보게 하고 약속 이행을 평가하도록 했다.
반군은 협상이 진행되는 동안 전투 중단을 요구했지만, 산토스 정부는 이를 거부했다. 반군이 단지 시간을 벌고 정치 선전의 공간으로 활용하는 전술에 말려들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산토스 대통령은 협상을 시작하면서 “과거 협상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형편없는 평판이 강력한 협상 무기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무장혁명군의 형편없는 평판은 산토스 정부의 가장 강력한 협상의 무기다. 협상이 성공하면 그는 새로운 역사를 만든 역사적 인물이 된다. 실패하더라도 그 책임은 반군에게 돌아갈 것이다. 2013년 5월 협상은 농업 발전에 대한 예비합의에 도달했고, 11월부터 반군의 정치 참여 문제에 대해 부분적으로 합의했다. 2014년 들어 가장 중요한 쟁점인 ‘이행기의 정의’를 논의하고 있다. 과거 범죄에 대해 사면권의 범위를 어느 수준에서 정할 것인지를 둘러싼 협상이다.
산토스 정부가 해결해야 할 과제는 적지 않다. 당장 5월 하순의 대통령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해야 한다.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우리베 전 대통령이다. 그는 평화협상을 강력하게 반대한다. 반군은 협상의 대상이 아니라 소탕의 대상이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가 지원하는 우익 후보가 당선되면 반군과의 평화협상은 차질을 빚을 것이다. 대선 결과가 아주 오래된 내전의 출구를 막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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