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제3자의 중재는 중요하다. 풀기 어려운 분쟁일수록 더 그렇다. 어떤 경우에 중재는 실패할까? 바로 당사자의 해결 의지가 없을 때다. 카슈미르도 마찬가지다. 몇 번의 협상이 있었다. 그러나 불신의 늪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했다. 1966년 타슈켄트 정상회담은 당사자의 의지가 없을 때, 중재란 얼마나 허망한지를 보여준다.
아주 오래된 분쟁의 시작인도와 파키스탄, 같은 뿌리에서 나왔지만, 적대의 골은 깊다. 그 한가운데 카슈미르가 있다. 히말라야산맥의 서쪽 끝에 있는 카슈미르는 전략적 요충지요, 경쟁하는 힘들의 완충 공간이다. 북쪽 국경에 소련, 중국, 아프가니스탄이 있다.
비극은 인도대륙이 인도와 파키스탄으로 분리독립될 때 시작했다. 영국은 서둘러 떠났다. 수백 년 동안 독립 공국으로 존재했던 카슈미르는 독립 혹은 자치를 희망했다. 그러나 피바람이 몰려왔다.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될 때, 수백만 명의 힌두와 무슬림이 각자 자기편을 찾아 국경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약 50만 명이 살해됐다.
길목에 있는 카슈미르에도 광풍이 몰아닥쳤다. 1947년 8월 잠무 지역에서 힌두와 시크교도들이 먼저 무슬림을 공격했다. 석 달 동안 무슬림 20만 명이 살해됐다. 그러자 파키스탄의 파슈툰족이 복수를 위해 이 지역으로 왔다. 카슈미르에 언제든지 개입할 틈을 엿보던 인도는 정규군을 파견해서 이들을 진압했다. 그렇게 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벌어졌다. 잠깐의 휴전이 있었고, 1948년 2차 전쟁이 일어났다. 영국군이 완전히 철수하지 않은 상황에서 전쟁이 벌어졌기 때문에, 양쪽 지휘부 모두 영국군 장교들이 맡는 희한한 전쟁이었다. 1949년 1월 유엔 안전보장이사회가 개입해서 휴전이 선포됐다.
휴전선이 그어졌고, 카슈미르는 분단됐다. 휴전 당시 인도가 카슈미르의 3분의 2를 차지했고, 파키스탄은 3분의 1을 차지했다. 아주 오래된 분쟁의 역사는 그렇게 시작됐다. 파키스탄은 무슬림이 다수인 카슈미르 전체가 자신들에게 병합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도 역시 카슈미르를 양보할 수 없는 영토라고 강조한다.
인도는 3분의 2를 점령하고 있기 때문에 현상 유지를 원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달랐다. 파키스탄은 유엔 안보리에 카슈미르 문제를 제기하고, 끊임없이 제3국의 중재를 요청했다. 1965년 결국 참지 못하고 파키스탄은 다시 전쟁을 시작했다. 타슈켄트 정상회담은 바로 3차 전쟁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성사됐다.
양국의 정상회담이 왜 우즈베키스탄의 수도인 타슈켄트에서 열렸을까? 소련이 적극적으로 만남을 주선했기 때문이다. 소련은 비동맹 노선을 채택하고 있는 인도와 가까웠다. 중국-소련 분쟁이 시작되면서 인도의 전략적 가치는 더 커졌다. 1965년 소련의 인도에 대한 경제원조는 10억달러가 넘었고 군사원조도 3억달러에 달했다.
파키스탄과의 관계도 좋았다. 파키스탄은 미국, 중국 그리고 소련과 동시에 우호관계를 유지하고자 했다. 대립적인 강대국 사이의 중재자가 되는 것, 그것이 외교 목표였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혹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서, 파키스탄은 삼각외교를 전개했다.
타슈켄트에서 열린 이유1965년 인도와 파키스탄이 전쟁을 시작하자, 소련은 적극적으로 평화 정착 노력을 전개했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코시긴 연방 각료회의 의장은 전쟁 직후 양국 지도자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는 전쟁을 중단하고 평화를 회복할 것을 호소했다. 그리고 1965년 말 양국에 타슈켄트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인도는 소련과의 관계를 고려해서 제안을 받아들였다. 파키스탄은 처음에 주저했지만 결국 수용했다. 인도가 유엔에서 카슈미르 논의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에서 달리 대안도 없었다.
1966년 1월3일 파키스탄의 모하메드 아유브칸 대통령과 인도의 랄 바하두르 샤스트리 총리가 타슈켄트에 도착했다. 양쪽은 신경전부터 시작했다. 쟁점은 카슈미르 문제였다. 인도는 이번 회담에서 카슈미르 문제를 논의하지 않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달랐다. 모든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전의를 불태웠다.
회담이 시작됐다. 첫날 아유브칸은 ‘카슈미르’라는 단어를 언급하지 않았다. 관중석이 들썩거렸다. 인도 언론은 아유브칸을 칭찬했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는 불만의 소리가 삐져나오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파키스탄 쪽 대변인은 결국 “카슈미르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것”이라고 배수진을 쳤다.
파키스탄 대표단에는 강경파인 베나지르 부토 외무장관이 있었다. 부토는 인도 국방장관에게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는 어떤 합의도 없다”는 점을 분명하게 전달했다. 샤스트리 총리는 부토의 거친 개입을 코시긴에게 항의했다. 코시긴은 아유브칸에게 “당신의 외무장관을 협상에서 배제하지 않으면 아무런 진전이 없을 것”이라고 질책했다. 물론 코시긴은 “카슈미르 문제를 논의해야 한다”고 샤스트리 총리를 설득했다.
인도의 회담 목표는 ‘더 이상 전쟁은 없다’는 부전협정에 합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카슈미르 문제부터 논의하자고 했다. 서로가 입장을 좁히지 못한 채 시간이 흘렀다. 신경전은 계속됐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면서 6일이 흘러갔다. 대부분의 언론들은 결렬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7일째 되는 날, 반전이 일어났다. 14시간에 걸친 코시긴의 마지막 조정이 시도됐다. 강도 높은 압력과 달콤한 설득이 병행됐다. 그날 코시긴은 아유브칸을 전투기 생산 공장에 데려갔다. 매년 ‘소비에트연방’에서 전투기와 탱크, 대포가 얼마나 생산되는지를 설명했다. 그리고 말했다. “이제 제3세계에서 전쟁은 더 이상 분쟁을 해결하는 수단이 될 수 없다.” 한마디로 까불지 말라는 무언의 압력이었다. 물론 코시긴은 “만약 파키스탄이 무력으로 카슈미르를 장악하려 하면, 소련은 인도를 지원할 것”이라는 말을 빼놓지 않았다. 코시긴은 인도에도 압력을 행사했다. 만약 샤스트리 총리가 조정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앞으로 소련은 유엔에서 인도 편을 들지 않겠다고 협박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9개 항이 합의됐다. 바로 ‘타슈켄트 선언’이다. 상호 내정 불간섭, 비방 금지, 포로 교환, 경제·문화 교류, 지속적인 대화 등에 양국은 합의했다. ‘우호’ ‘친선’ ‘평화’라는 단어가 난무했다. 대부분 추상적인 원칙이었다. 합의문은 모호함으로 가득했다. 가장 중요한 쟁점은 어떻게 합의했을까? “잠무와 카슈미르 문제가 논의됐고, 양쪽은 각자의 입장을 밝혔다.” 그게 전부였다. 다만 구체적인 합의도 하나 있었다. 양쪽 군대는 1965년 전쟁 이전 위치로 철수한다는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반전, 샤스트리의 죽음타슈켄트 선언이 발표되자, 국제사회는 박수를 보냈다. 미국도 소련의 중재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중국을 견제하고 이 지역의 안정을 바라는 전략적 입장이 소련과 다르지 않았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제3세계 국가들도 소련의 중재를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이 불길한 드라마의 끝에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었다. 1월11일 밤 환송 만찬이 끝나고, 잠자리에 든 샤스트리 총리가 갑자기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멀쩡한 사람이, 아무런 증상도 없이, 갑자기 죽었다. 음모론이 난무했다. 그러나 근거는 없었다. 다만 “협상의 스트레스가 얼마나 컸을까?” 주위 사람들이 탄식했다.
가장 놀란 것은 아유브칸이었다. 두 사람은 양국의 구조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신뢰를 쌓았다. 서로의 입장도 이해했다. 외교에서 지도자들의 개인적 신뢰는 얼마나 중요한가? 아유브칸은 샤스트리를 ‘인도-파키스탄의 우호를 위해 생명을 바친 평화의 인물’이라고 추모했다. 그리고 인도항공의 비행기에 그의 관을 실을 때 직접 운구에 참여했다. 또한 샤스트리 총리의 관을 실은 비행기가 파키스탄 영공을 통과해서 직선 노선으로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타슈켄트 선언이 인도에 알려졌을 때 강경 힌두 정당들은 비난했지만, 전반적인 여론은 우호적이었다. 샤스트리 총리에 대한 추모의 감정도 일어났다. 샤스트리의 뒤를 이은 인디라 간디 총리는 타슈켄트 정신을 강조했다. 죽은 자에 대한 예의였다. 실제 타슈켄트 선언으로 인도가 잃을 것은 없었다. 인도의 주요 언론들은 인도 외교의 승리라고 평가했다.
물론 인도는 파키스탄과의 관계를 진전시킬 의지가 없었다. 전쟁의 후유증도 남아 있었고, 경제위기와 식량 부족은 지속됐고, 경험 없는 총리의 등장으로 정국은 어수선했다. 국내 정치가 더 중요해지면서 파키스탄과의 관계는 우선순위에서 밀렸다.
파키스탄에서의 후유증은 훨씬 컸다. 타슈켄트 선언이 합의됐을 때, 인도 대표단은 웃고 파키스탄 대표단은 침울했다. 대조적인 표정이 실린 신문을 보고, 파키스탄 국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파키스탄은 얻은 것이 없었다. 전쟁 이전 상황으로 돌아갔을 뿐이다. 거리로 나선 시위대는 “대통령이 카슈미르를 힌두교도에게 팔아먹었다”고 비난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으면 곪을 뿐반인도 정서에 기름을 부은 것은 바로 부토 외무장관이었다. 부토는 타슈켄트 회담 자체에 부정적이었다. 1965년의 전쟁은 사실 그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전쟁으로 얻은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인기 정치인으로 부상했다. 대통령이 서명을 결심했을 때, 부토는 말했다. 사임하게 해달라고. 그래서 이 합의를 부정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부토는 결국 귀국해서 대통령과 갈라선다. 그는 1967년 파키스탄 인민당을 만들었다.
타슈켄트로 가는 비행기에서 대표단의 한 명이던 라피 장군이 아유브칸에게 물었다. “만약 합의가 이루어지면 우리 국민이 그것을 받아들일까요?” 대통령은 말했다. “나는 대통령이고, 결정할 권한이 있소. 국민이 그게 싫으면, 자기들한테 맞는 대통령을 뽑으면 될 것 아니오?” 그의 말처럼 1969년 그는 실각했다.
인도와 파키스탄의 관계에서 카슈미르는 목에 걸린 가시다. 나머지를 점령할 수도, 자신의 것을 양보할 수도 없다. 외부의 개입 혹은 중재도 소용없다. 힘으로 해결하려는 시도, 즉 전쟁은 어떨까? 더 깊은 상처를 남기고 분노의 나이테만 늘렸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분쟁은 끊이지 않고 비극은 계속되고 있다. 카슈미르의 평화는 여전히 멀다. 오랫동안 방치된 분쟁은 얼마나 해결이 어려운가? 상처를 치유하려는 노력이 없으면 곪아갈 뿐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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