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데이비드, 미국 워싱턴DC에서 북쪽 으로 120km 떨어진 곳이다. 1939년 프랭 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휴양캠프를 건설했 고, 1943년부터 대통령 전용 시설로 사용했 다. 그리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자신의 손자 이름을 따서 캠프 데이비드로 불렀고, 리처드 닉슨 대통령 때부터 주요 정 상회담 장소로 활용했다. 1978년 9월5일 별 장의 주인인 지미 카터 대통령이 안와르 사 다트 이집트 대통령과 메나헴 베긴 이스라 엘 총리를 불렀다. 중동 평화를 위한 역사적 인 회담이 시작됐다. 운명의 13일이 흘렀다. 협상의 승자는 누구일까? 그래서 평화가 왔 을까?
노벨평화상이 아니라 오스카상감 풍경
캠프 데이비드 협상은 중재자의 역할이 돋보인 사례다. 회담이 끝난 뒤, 언론에서는 ‘지미 카터의 회담’이라고 불렀다. 왜 미국이 적극적으로 나섰을까? 1973년 중동전쟁과 그 여파로 터진 오일쇼크로 중동 평화의 필 요성이 적지 않았다. 정치적 필요도 있었다. 지지율을 끌어올릴 성과가 필요했다. 카터는 중동 문제의 민감함을 고려해, 가능하면 집 권 초기에 진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래서 서둘렀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역시 협상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1970년에 대통령이 된 사다트는 1967년 이스라엘에 빼앗긴 시나이반도를 돌 려받아 민족적 자존심을 회복하고 싶었다. 경제적 이유도 있었다. 당시 이집트는 예산 의 절반을 서방국가의 차관에 의존했다. 사 다트는 특히 미국과의 관계를 중시했다. 미 국이 원하는 중동 질서를 선제적으로 만들 어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사다트가 1977년 11월9일 의회 연 설에서 “평화를 위해 땅끝, 심지어 크네셋(이 스라엘 의회)까지도 갈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해 이스라엘에서는 리쿠드당의 베긴이 집 권했다. 근본주의자라는 평판을 얻은 사람 이었지만, 집권 이후 달라졌다. 이집트와의 관계 개선을 약속했다. 베긴 총리는 사다트 의 의회 연설을 듣고 그를 초청했다.
사다트는 11월19일 이스라엘 텔아비브 공 항에 도착했다. 전격적인 방문이었다. 사다 트는 베긴과 악수를 했다. 그리고 1973년 전 쟁영웅인 아리엘 샤론과 농담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 장면을 보던 전 이스라엘 총리 골다 메이어는 “저들에게 노벨평화상을 줄 것이 아니라, 오스카상을 주어야 할 듯”이라고 조 롱했다. 다음달인 12월에 베긴 총리가 답례 로 수에즈운하가 지나는 이집트의 이스마일 리아를 방문했다.
그림은 좋았다. 그러나 차이는 분명했다. 사다트는 두 번의 만남 이후 “나는 베긴에게 모든 것을 주었다. 그러나 베긴은 나에게 아 무것도 주지 않았다”고 불평했다. 이스라엘 은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다만 국제 여론을 의식해서 대화와 협상을 거부하지 못했다.
순수한 사다트와 완고한 베긴 사이에서
캠프 데이비드에 모인 세 사람은 통역이 필요 없었다. 세 나라 모두 영국의 식민지였 기 때문에 영어가 공통어였다. 세 사람의 협 상 스타일은 달랐다. 사다트는 큰 것만 보고 구체적인 실무에 신경 쓰지 않는 스타일이었 다. 그의 측근들이 말하듯, 한마디로 단순 한 사람이었다. 베긴은 정반대였다. 그야말 로 디테일에 강했다. 다만 이스라엘의 전략 이 있었기에, 베긴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배 경 자료도 없이, 대안도 마련하지 않고, 캠 프 데이비드에 왔다. 필요하면 언제든지 털 고 일어날 생각이었다. 가장 철저하게 준비 한 사람은 카터였다. 해군 엔지니어 출신으 로 쟁점 현안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챙겨서 캠프 데이비드로 갔다. 물론 주석이 달린 성 경책도 한 권 챙겼다.
사다트는 카터와 친하기 때문에, 카터가 자신의 의견을 들어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안타깝게도 사적인 관계와 공적인 관계를 구분하지 못했다. 협상에서 가장 피해야 할 원칙이다. 사다트는 카터가 자기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이 가진 모든 패를 처음부터 노출했다. 첫날 사다트는 11쪽의 강경하고 비타협적인 평화 구상과 3쪽의 양보안을 카터에게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카터는 사다트의 모든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각국의 정책 결정 구조도 협상 방식에 영향을 미쳤다. 이집트는 사다트에게 모든 권한이 집중돼 있었다. 그래서 미국이나 이스라엘 쪽은 모든 문제를 사다트와 협의했다. 이집트의 외무장관을 비롯한 실무자들과 협상할 필요가 없었다.
이스라엘은 달랐다. 베긴은 완고한 협상가였고, 속내를 드러내지 않았다. 협상팀의 구조도 복잡했다. 베긴이 집권했을 때, 그는 연립내각을 꾸렸다. 그래서 다비드 벤구리온 내각에서 국방장관을 지낸 전쟁영웅 모셰 다얀을 외무장관에 임명했다. 그는 노동당 출신이다. 국방장관인 에제르 바이츠만 역시 리쿠드당을 탈당하고 무소속으로 당선됐다. 협상팀 자체가 연립정부였기 때문에 각자 발언권이 있었고, 협의 과정이 필요했다. 당연히 미국이나 이집트가 양보를 얻어내기 어려운 구조였다.
그리고 민주국가일수록 협상력이 높다. 국내 정치, 즉 여론과 의회를 근거로 상대의 양보를 얻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캠프 데이비드에서도 그랬다. 한번은 사다트가 베긴에게 ‘이집트의 여론’을 거론하자, 베긴이 말했다. “당신이 이집트 국민의 생각과 믿음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정부가 언론을 통제하며 계엄령이 지속되는 정치 구조를 비꼰 것이다.
중재안을 마련해야 하는 카터 입장에서는 양쪽의 주장을 조정해야 한다. 당연히 완고한 베긴보다는 유연한 사다트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 쉬웠다. 사다트는 개인적 친분이 득이라고 생각했지만, 현실은 독이었다. 오히려 카터가 그것을 활용해서 사다트를 설득했기 때문이다.
협상은 불안한 안개 속에서 시작됐다. 둘쨋날 3자회담을 시작했을 때, 험난의 실체가 드러났다. 사다트는 카터도 알고 있는 가장 강경한 구상을 먼저 말했다. 이스라엘의 모든 정착촌을 철거하고, 점령지역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다. 베긴은 듣고만 있었다. 기가 찬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카터가 “이대로 서명하면 시간을 절약하겠네”라고 말해서 다들 한바탕 웃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격렬하게 토론하기 시작했다. 책상을 두들기고 소리를 지르고 얼굴을 붉혔다. 카터는 뒷짐을 지고 먼 산을 바라보았다. 결국 두 사람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을 때, 카터가 판을 깨지 말 것을 간절히 요청했다. 3자회담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시간을 볼모로 잡아
협상은 카터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특히 이스라엘의 완고한 협상 전략 때문에 한 걸음도 전진하기 어려웠다. 사다트가 캠프 데이비드에 올 때, 시나이반도의 반환은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다. 이미 양국의 사전 협상 과정에서도 이스라엘 쪽이 넌지시 그런 의사를 비쳤고, 미국의 구상에도 당연히 들어가 있는 핵심 사항이다. 그래서 사다트는 캠프 데이비드에서 팔레스타인 문제를 논의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예상을 깨고 시나이를 반환할 수 없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시나이반도는 1967년 6일전쟁 때 이스라엘이 이집트로부터 뺏은 땅이다. 1978년 당시 이스라엘은 국내에서 소비하는 원유의 50%를 이곳에서 채취했다. 공군기지를 이곳에 둔 이유도 전략적으로 중요했기 때문이다. 이집트나 미국이 예상했던 것보다 이스라엘이 훨씬 강하게 나온 것이다.
시간만 흘러갔다.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 문제로 발을 묶어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팔레스타인 문제를 회피하고자 했다. 사다트도 인내의 한계를 드러냈다. 아랍국가들의 원망도 들려오기 시작했다. 11일째 되는 날 사이러스 밴스 국무장관이 놀라서 카터에게 뛰어왔다. 사다트가 떠난다는 것이다. 카터는 일단 기도를 했다. 그리고 짐을 챙겨 나오는 사다트를 다시 방으로 데려가 강력하게 경고했다. 이대로 떠나면 미국과 이집트의 관계는 종말을 고할 것이라고. 이집트의 벼랑 끝 전술은 너무 늦었다. 아랍국가와 미국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받는 상황이 돼버렸다. 결국 사다트는 떠나지 못했다.
미국이 이스라엘을 대신해서 양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카터는 결국 시나이의 공군기지를 네게브사막으로 옮기는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30억달러에 달하는 거금이었다. 이스라엘은 양보 카드인 시나이를 끝까지 움켜쥐고 미국의 지원을 얻어냈고, 팔레스타인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버렸다.
시간은 점점 더 중요한 협상의 변수로 부상했다. 미국 대통령이 모든 업무를 팽개친 채, 숲 속 통나무집에서 2주 이상 보낼 수는 없었다. 점증하는 이란의 위기도 카터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결국 카터가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의 평화협정은 합의할 수 있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 문제를 포함한 쟁점들은 모호하게 처리했다. 이스라엘의 생각대로였다. 최종 합의문이 나온 것은 두 번째 일요일 밤 10시30분이었다. 사다트와 베긴을 태운 헬리콥터가 백악관의 기자회견장으로 날아갔다. 그들은 10일 만에 다시 만났다. 정치인들답게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그렇게 회담은 끝났다. 불가능할 것 같은 중동의 평화협정이 체결됐다는 소식이 세계를 흥분시켰다. 카터의 지지율은 합의 발표 직전 13%였지만, 발표 뒤 51%로 껑충 뛰었다. 그리고 사다트와 베긴은 1978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모호한 합의를 자의적 해석한 이스라엘
1982년 이스라엘은 시나이반도에서 철수했다. 이집트와 이스라엘 사이에는 평화가 왔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은?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요르단 서안, 가자지구, 그리고 골란고원, 즉 그들이 전쟁을 통해 얻은 영토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모호한 합의를 자의적으로 해석해서, 본격적인 정착촌 건설의 근거로 활용했다. 새로운 분쟁을 잉태하고 원한을 만들면서. 이스라엘의 의도대로 이집트는 아랍세계로부터 고립됐다. 캠프 데이비드의 승자는 이스라엘이었다. 그런데 평화는?
이후 캠프 데이비드의 장면은 몇 번이나 재연됐다. 1993년 오슬로협정도 마찬가지다. 협상 결과로 1994년 이스라엘의 이츠하크 라빈 총리와 시몬 페레스 외무장관, 그리고 팔레스타인해방기구의 야세르 아라파트 의장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빌 클린턴 대통령의 중재 역할도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1978년 캠프 데이비드의 주역이던 사다트가 1981년 이슬람 원리주의자에게 암살을 당했듯, 1995년 라빈 총리도 유대 극우파에 의해 살해됐다. 최근 중동 평화협상이 재개된다는 뉴스가 환청처럼 들린다. 그러나 중동에 평화는 오늘도 오지 않았다. 간절히 희망하지만 여전히 오지 않는 고도처럼.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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