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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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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단이 길면 통일이 멀다

남부 그리스계와 북부 터키계로 분단된 지중해 섬나라 키프로스… 40번 남북정상회담과 국경 개방 등 교류협력에도 통일협상 제자리인 이유는?
등록 2013-11-16 13:03 수정 2020-05-03 04:27

키프로스는 지중해 동쪽 끝의 아름다운 섬이다. 경기도보다 약간 작은 섬에 약 113만 명이 산다.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가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나 도착한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섬에 사랑은 없다. 키프로스는 분단국이다. 남쪽에는 그리스계가 살고, 북쪽에는 터키계가 산다. 통일협상은 늘 있었다. 유엔을 비롯한 중재자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성과는 없었다. 아름다운 풍경에 드리워진 그늘의 정체는 무엇일까? 그들의 협상은 왜 수십 년 동안 제자리걸음인가?

16세기 오스만 점령 뒤 터키계 이주

눈부시게 아름다운 섬에 분단의 철조망, 어울리지 않는다. 키프로스의 고난의 역사는 지정학적 위치 때문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교역로에 존재했기에 언제나 강대국 정치의 산물이 되었다. 16세기부터 오스만제국이 섬을 점령했다. 주민의 다수가 그리스계였지만, 그때부터 터키계가 이주해왔다. 그리스계와 터키계는 언어와 종교, 관습이 달랐다. 서로 소통하지 않았고 행정도 달리했다.
제1차 세계대전을 거치며 식민 모국이 영국으로 바뀌었다. 오랜 세월 억눌려 있던 그리스계가 어깨를 폈고, 소수인 터키계가 수세로 몰렸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키프로스는 독립했다. 그리스계는 아예 주권을 영국에서 그리스로 넘길 것을 요구했다. 그들은 자신을 그리스와 동일시했다. 갈등이 끊이지 않았다. 무력 충돌도 빈번했다. 1964년 양쪽의 충돌로 영국군으로 구성된 유엔 평화유지군이 진주했다.
1960년대 이후 그리스계와 터키계는 정치·경제적, 사회·문화적, 심리·종교적으로 분단됐다. 그리고 1974년 지리적 분단의 순간이 왔다. 그리스계가 그리스 군부정권의 지원을 업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스와 합병하자는 민족주의 세력이 권력을 잡은 것이다. 터키계는 바람 앞의 등불 신세가 되었다. 터키는 4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키프로스를 침략했다. 3천 명 이상의 그리스계가 사망했고, 1700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
터키군은 북부를 차지했다. 그리고 주민 교환이 이루어졌다. 북부 지역에 살던 그리스계 주민 20만 명은 남부로, 그리고 남부에 살던 터키계 2만 명은 북부로 이주했다. 사람들은 고향을 잃었다. 집과 토지도 잃었다. 그리스계가 살던 집과 토지는 터키 이주민들이 차지했다. 물론 남부에 살던 터키계도 집과 토지를 잃었다. 터키계는 섬 전체 인구의 18% 정도이지만 영토의 38%를 차지했다.
그리고 남과 북을 가르는 그린라인이 설치됐다. 섬의 허리를 가로질러 110마일의 비무장지대가 들어섰다. 수도인 니코시아도 분단됐다. 시내에서는 인공장벽이나 건물의 벽이 분계선이다. 시외로 나가면 철조망이 남과 북을 가른다.
분쟁이 있는 곳에 언제나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키프로스 사례는 평화협상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한다. 물론 당사자의 의지가 없으면 어떤 중재도 소용없음을 증명하는 사례이기도 하다. 키프로스 분쟁에서 핵심 중재자는 유엔이다. 유엔 사무총장의 핵심 과제 중 하나가 바로 키프로스 분쟁의 평화적 해결이다. 1970년대 중반의 쿠르트 발트하임 총장부터 현재의 반기문 총장까지 예외가 없다.

연방제 통일 국민투표, 남부 반대 무산

그중에서도 코피 아난 총장의 중재는 적극적이고 구체적이었다. 연방제 통일을 위한 아난의 계획은 양쪽 의견을 수렴하고, 몇 년에 걸쳐 계획 I에서 시작해 IV까지 수정·발전됐다. 연방정부 구성부터 영토 조정, 군사적 신뢰 구축 그리고 과거사 문제까지 대부분의 현안 쟁점을 망라했다. 내용이 구체적이고 복잡하고 아주 길다.
아난 총장은 준비를 많이 했다. 미국과 영국은 말할 것도 없고 그리스와 터키의 지원도 얻었다. 그리고 마침내 키프로스의 유럽연합(EU) 회원 가입 시점을 결정적 기회로 활용했다. 통일 키프로스를 EU 회원국으로 가입시키고, 키프로스 문제 해결을 터키의 EU 가입 문제와 연계할 생각이었다. 아난의 계획은 국민투표에 부쳐졌다. 양쪽 모두 찬성하면 연방제 방식으로 통일이 이뤄지는 것이다. 남북 양쪽에서 시민사회가 나섰다. ‘예스(Yes) 캠페인‘은 그린라인을 가로지르는 이성의 연대였다.
국민투표는 북부에서 조용한 혁명이었다. 64.9%가 찬성했다. 왜 터키계는 다수가 찬성했을까? 경제적 기대감이 컸다. 1974년 분단 이후 북키프로스는 외교적으로 고립됐다. 그래서 남쪽보다 훨씬 가난하게 살았다. 2004년 당시 남쪽의 1인당 소득은 2만2천달러였지만 북쪽은 7천달러 정도였다. 여전히 남쪽 사람들을 믿을 수 없었다. 과거에 설움받은 기억도 남아 있었다. 그러나 다수가 미래를 선택했다. 통일이 되어 EU 회원국이 되면 지금보다 잘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남부의 그리스계는 달랐다. 75.8%가 반대했다. 결정적으로 당시 남키프로스의 파파도풀로스 정권이 반대를 선동했다. 아난의 계획을 거부한다고 해서 EU 가입이 거절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았다. EU 회원국들의 입장 차이가 있었기 때문에 아난의 생각처럼 EU 가입 문제가 강력하게 연계될 수 없었다. 결국 EU 가입 시점이라는 변수는 역효과를 가져왔다.
남부의 다수는 왜 반대했을까? 민족주의 우파가 들고일어났고, 보수 정부는 통일을 선호하는 좌파세력과 연대할 생각이 없었다. 통일의 주체 세력이 허약했다. 아난 계획의 약점도 있었다. 바로 그리스계의 오만을 과소평가한 것이다. 그리스계는 키프로스의 유일한 합법 정부라는 정당성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여전히 그리스 민족주의자들은 완전한 통일을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다. 대중의 안보 우려도 작용했다. 그리스계는 터키군의 완전 철수를 원했다. 그러나 아난의 계획은 단계적 철수 방안을 권고했다. 군대 감축과 평화 보장 방안도 구체적이지 못했다. 그리고 젊은 세대 중에는 통일하지 말고 이대로 살자는 사람이 더 많았다.
결국 유엔의 중재는 실패했다. 당사자가 화해할 생각이 없으면 어떤 중재도 성공하기 어렵다. 물론 중재자의 능력도 부족했다. 유엔은 경제적으로 당근을 줄 능력도 없고, 외교적으로 EU의 단일 결정을 유도하지 못했으며, 더 중요한 것은 채찍을 휘두를 압력 수단도 없었다. 미국의 입장이 중요하지만, 미국 역시 키프로스 문제에는 소극적이었다. 그리스와 터키 모두 전략적 이해관계를 맺고 있어서 누구 편을 들려고 하지 않았다.
아난의 중재는 실패했으나, 그렇다고 성과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쟁점은 이후 협상의 근거가 되었다. 통일에 대한 성찰의 계기도 제공했다. 2005년 북키프로스에서 통일에 우호적인 메흐메트 알리 탈라트가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리고 2008년 남쪽에서도 통일 문제에 적극적인 디미트리스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이 집권했다. 그의 정당은 바로 공산당이다. 그동안 보수 정당은 통일에 반대했다. 그리고 EU에 가입하면 찬란한 미래가 보장될 것이라고 떠들었다. 시간이 흘렀지만 다가온 미래는 찬란하지 않았다. 대중의 실망감이 컸다. 그래서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북부와의 대화를 통해 실용적 해결 방안을 찾겠다는 공산당을 선택했다. 공산당은 분단에도 불구하고 북부의 노동조합과 우호적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리스계 비례, 터키계 동등 원칙 대립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은 집권하자마자 적극적으로 남북 정상회담을 추진했다. 2008년 7월부터 2009년 8월까지 정상회담이 정확히 40번 열렸다. 많은 쟁점이 논의됐다. 통일 방안은 연방제로 모아졌다. 연방제의 수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가 있었다. 그리스계는 중앙정부의 권한이 강력한 연방제를 선호했다. 그러나 터키계는 소수파인 자신들의 자치가 보장되는 국가 연합 혹은 ‘느슨한 연방제’를 주장했다. 정부 구성에 대해서도 남쪽은 인구 비례 원칙을 내세웠다. 그러나 북쪽은 연방정부는 양쪽 동수로 구성하자고 맞섰다.
빈번한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부분도 많았다. 그러나 여전히 차이는 컸다. 그리스계는 다수였기 때문에 비례 원칙을 강조했고, 터키계는 소수지만 동등성을 강조했다. 대화 과정에서 건설적인 제안도 있었다. 크리스토피아스 대통령이 제안한 교차 투표 같은 것이다. 남쪽 대통령 선거 때 북쪽 주민들에게도 투표권을 주고 일정 비율을 반영한다고 상상해보라. 그러면 당연히 상대에게 적대적인 정책을 추진하기 어렵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좋은 방법이 아닌가? 평화 정착에 상당한 도움을 줄 수 있는 방안이다.
그러나 2009년 북키프로스에서 우파가 집권하자 남북 정상회담은 동력이 떨어졌다. 이후에도 통일협상은 계속되고, 국제사회의 중재 노력도 끊이지 않았다. 이 과정에서 긴장이 완화되고 교류가 활발해졌다. 특히 2003년에 시작되고 2008년에 확대된 국경 개방이 중요하다. 양쪽 주민들은 서로 왕래가 가능하다. 상대 지역에 90일까지 체류할 수 있다. 실향민들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옛날 집을 보러 갔다. 단지 점심을 먹으러 국경을 넘는 사람도 있다.
그래도 통일은 여전히 멀다. 통일은 서로의 마음을 얻는 것이다. 화해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무적으로 기술적으로 차이를 좁히는 데 한계가 있다. 남키프로스에서 그리스 민족주의가 엷어지고 있음은 긍정적이다. 그리스 사람이 아니라 이제는 키프로스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그리스계가 늘고 있다.
그리고 2011년 남키프로스 해안에서 석유와 가스가 발견되면서 지역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정치적 관계로 보면, 그리스까지 해저 파이프라인을 연결해서 유럽으로 가야 하지만, 그럴 수 없다. 수심이 깊고 거리가 길어서 경제성이 없기 때문이다. 터키로 넘어가는 것이 경제성이 있다. 터키~오스트리아의 나부코 파이프라인 프로젝트에 연결하면 서로에게 도움이 된다. 터키에는 경제성을 높일 수 있는 결정적 기회고 EU 가입에도 유리하다.

‘평화로운 분단’의 교착이 답인가?

교착의 시간이 길어지면, 제도적 분단은 굳어지고 분쟁 해결은 어려워진다. 여론은 언제나 흔들거린다. 과거의 증오와 미래의 협력 사이에서 말이다. 그리고 분단과 통일 사이에 멈춰서 있다. 해결은 어렵지만, 그렇다고 위험하지도 않은 ‘평화로운 분단’ 말이다. 그래서 절박하게 노력하지 않고 당연히 비용을 지불할 생각도 없는 교착 말이다. 평화가 지켜진다면, 교류가 이어진다면 그런 분단을 받아들일 수 있을까? 분단이 길어지면 통일은 참 어렵다. 키프로스 사례는 통일의 외피가 아니라 통일의 내용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고 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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