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하고, 현재를 지배하는 자가 과거를 지배한다. 조지 오웰의 말이다. 민주주의가 흔들거리면, 언제나 독재세력은 과거를 장악하려고 한다. 특정 세력이 특정한 목적으로 기억을 독점할 수 있을까? 독재에서 민주주의로 이행한 국가에서, 기억의 정치는 다양하다. 독재자 프랑코의 사망 이후, 스페인의 좌우 정치세력은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선택했다. 과거를 묻지 말자는 망각협정에 좌우 정치세력이 합의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망각에서 기억으로 어떻게 전환할 수 있었을까?
모두의 사면, 모든 것의 망각
망각협정은 좌우 정치세력의 타협이다. 민주화 이행기의 산물이기도 하다. 스페인에서 1975년 11월 독재자 프랑코가 죽고, 1982년 사회노동당이 집권할 때까지를 우리는 ‘민주주의 이행기’라고 부른다. 스페인의 민주화는 성공한 모델이다. 민주적 선거가 자리를 잡았고, 민주주의 제도가 뿌리를 내렸다. 물론 폭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이행기 동안 400여 명이 좌우 테러로 희생됐다.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을까? 온건우파와 온건좌파의 협력 정치 때문이다. 온건우파는 바로 프랑코 체제 내의 개혁세력이다. 후안 카를로스 국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프랑코가 지명한 총리를 해임하고, 온건한 정치인 수아레스를 대신 임명했다. 수아레스 총리는 공산당을 합법화하고, 야당 세력과 타협하면서 민주화 이행 과정을 관리했다. 1977년 총선거를 성공적으로 치렀고, 노·사·정 협약인 몬클로아 협약을 체결했다.
민주화의 문턱에서, 좌우 협력의 정치에서, 역사가 문제였다. 프랑코 체제가 남긴 일그러진 인권침해의 역사 말이다. 1936년 7월에서 1939년 4월까지 스페인은 내전을 치렀다. 모든 이념의 전쟁터라고 불리는 내전은 바로 프랑코의 쿠데타로 시작됐다. 내전의 결과는 참혹했다. 사망자만 30만 명이다. 해외 추방자와 망명자도 30만 명 이상이다. 그리고 내전에서 승리한 프랑코는 철저하게 보복했다. ‘빨갱이 소탕’이라는 미명 아래, 내전 이후 10년 동안 5만 명 이상을 처형했다. 유례를 찾기 힘든 폭력의 정치다.
이 아픈 상처를 어떻게 할 것인가? 민주화의 길에서 과거 청산은 미래를 향한 출발이다. 그러나 스페인은 달랐다. 진실과 정의의 회복도, 청산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온건우파와 온건좌파는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기로 했다. 그래서 정의와 진실을 그냥 덮고, 화해하기로 했다. 침묵협정 혹은 망각협정(Pacto del Olvido)이라고 부르는 구두계약이다. 계약의 법적 형식은 1977년의 사면법으로 구체화됐다. 내전과 내전 이후 모든 정치범죄를 사면한다는 내용이다. 내전의 패자, 즉 공화주의자들에게도 연금을 지급하고, 해고자들의 복직을 허용했다. 피해자에 대한 보상이다. 그러나 사면 대상에 군·공무원·경찰 등 프랑코 체제를 유지해온 모든 공권력의 범죄행위도 포함시켰다.
망각에서 기억으로 전환 계기
바스크 민족당 대표의 말처럼, ‘모두의 사면, 그리고 모든 것의 망각’을 의미했다. 프랑코의 불법적 쿠데타를 비난하지도 않고, 반인권적 범죄에 대한 사법적 책임도 묻지 않았다. 프랑코 집권 기간에 처형되고, 감옥에서 질병과 아사로 사망하고, 강제수용소에서 죽어간 사람들의 억울한 원혼을 그냥 덮었다.
어떻게 망각에 합의했을까? 좌도 우도 ‘오래된 상처를 다시 드러내는 고통’을 피하고 싶었다. 우파야 자신들이 한 일이 있기에 ‘화해를 위한 망각’을 주장했다. 그런데 좌파는 왜 진실과 정의를 포기했을까? 우익 쿠데타의 두려움이 컸다. 프랑코는 죽었지만, 프랑코의 국가는 그대로 존재했다. 좌파는 정의·자유·진실이 아니라 평화·질서·안정을 선택했다. 내전에 대한 책임감도 작용했다. 백색테러가 더 많았지만, 적색테러도 부정할 수 없었다. ‘우리 모두가 죄인’이고, 그래서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다시 전쟁은 안 된다’에 합의했다. 1981년 일부 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시도했을 때, 망각협정의 현명함에 안도했다. 1979년 이후 좌파가 집권한 일부 지방정부에서 망각협정을 깨고, 공화파의 집단 매장지를 발굴한 사례가 있었다. 그러나 쿠데타 시도 이후, 전국적으로 발굴이 일제히 중단됐다.
1982년부터 1996년까지 사회노동당 정부를 이끈 곤살레스 총리는 “망각이 내전의 승자와 패자의 화해를 가능케 했다”고 회고했다. 역사에 대한 침묵과 망각의 시간은 오래 유지됐다. 1986년 스페인 내전 50주년이 되는 해, 총리는 “내전은 역사일 뿐이다. 더 이상 현실세계에 존재하지 않는다”고 선언했다. 그것이 2004년까지 사회노동당의 공식 입장이었다.
스페인 국민 다수는 망각협정에 동조했다. 정치 엘리트들의 타협만은 아니었다. 프랑코 사망 이후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61%가 ‘모두의 사면’을 찬성했다. 왜 그랬을까? 대중도 마찬가지로 과거의 아픈 역사가 재연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국민 다수의 일상의 삶을 프랑코 체제와 분리하기 어렵다. 어렸을 때부터 각종 파시스트 단체에 소속되고 선동에 동원된 기억이 있으며, 일부는 이웃이나 친척 혹은 가족을 고발한 경험이 있다. 부끄러운 과거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망각은 정치 영역, 언론 영역, 그리고 일상의 저녁 식탁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됐다.
내전에 대한 집단기억도 작용했다. 프랑코 정권은 내전의 기억을 지배했고, 그것을 정권의 정당성 기반으로 삼았다. 쿠데타는 스페인을 무질서로부터 구원하는 구국의 결단이고, 민족 반역자 공화파에 대항하기 위한 애국전쟁으로 규정됐다. 대중은 반복적인 역사 왜곡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1970년대라는 시대적 특성도 작용했다. 냉전 시기였고, 인권 개념이 보편적 가치로 부상하기 전이었다.
어떻게 망각에서 깨어날 수 있었을까? 바로 1996~98년 칠레의 독재자 피노체트 사건이 결정적 계기다. 1996년 스페인 법원은 국외에서 저질러진 스페인 국민에 대한 살해·테러·고문에 법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냈다. 그래서 아르헨티나 군부와 칠레의 피노체트를 기소했다. 궐석재판이었지만, 희생자 가족들이 참여해 법정에서 증언하는 절차가 진행됐다. 그리고 1998년 피노체트가 병 치료를 위해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 스페인 법원은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영국 경찰은 이를 근거로 피노체트를 체포했다.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국제적 기소권을 인정한 것이다. 이때부터 약 1년간 피노체트의 재판 관할권을 두고 영국·칠레·스페인이 떠들썩했다. 영국은 그를 스페인이 아닌 칠레로 돌려보냈다. 피노체트는 휠체어에 실려 숨 넘어갈 듯 칠레로 돌아갔지만, 도착하자마자 벌떡 일어나 마중 나온 군부의 친구들과 악수했다.
봇물처럼 쏟아진 기억투쟁
그러나 피노체트는 스페인 국민을 깨웠다. 소동을 겪으며 망각의 저편에 있던 기억이 돌아왔다. 국민의 압도적 다수가 피노체트 체포를 찬성했다. 피노체트는 무덤에 누워 있는 프랑코와 동일시됐다. 특히 진보 야당은 집권당인 보수 국민당의 소극적 태도를 비판했다. 더 이상 망각협정은 유지되지 않았다. 기억이 정치의 중심으로 귀환했다.
어떻게 망각에서 기억으로 전환할 수 있었을까? 세대가 달라졌다. 2000년대가 되면서, 달라진 세대는 과거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 트라우마가 없는 내전의 손자 세대가 출현한 것이다.
시민사회도 깨어났다. 그중에서도 ‘역사 기억의 회복을 위한 모임’(ARHM)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모임을 주도한 실바는 2000년 어느 날, 레온 지역 신문에 “프랑코 세력에 의해 총살당한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고 싶다”는 내용의 투고를 했다. 억울하게 죽은 원혼을 달래고 싶다는 소박한 소망이었다. 내전의 희생자들은 죽어서도 차별이 계속됐다. 프랑코 쪽 희생자들은 기념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공화 진영의 희생자들은 이름 모를 장소에 집단으로 매장된 채 방치됐다.
2000년 스페인 전역에 집단 매장된 주검은 4만 구에서 6만 구로 추정됐다. 할아버지의 유골을 찾아 정식으로 재매장하겠다는 손자·손녀들의 희망이 들불처럼 타올랐다. ARHM이 중요한 단체가 됐다. 급속하게 지방 지부가 설립됐다. 그리고 이 시민단체는 2002년 유엔에 청원을 했다. 스페인 정부가 내전과 독재 기간의 실종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 나서줄 것을 권고해달라는 요청이었다. 유엔이 청원을 받아들였고, 스페인 정부에 권고했다.
망각의 시간 동안 억눌린 기억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기억과 관련된 사회운동이 조직되고 체계화됐다. 보수적인 국민당이 집권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기억투쟁은 보수 정부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졌다. 2000년을 기점으로 내전에 관한 ‘기억의 홍수’라고 부를 정도로 영화·소설·다큐멘터리·전시회 등이 봇물처럼 터져나왔다.
그리고 2004년 다시 사회노동당이 승리했다. 기억 정치가 날개를 달았다. 국민당 정권에 의한 당파정치, 우경화에 대한 사회적 불만이 선거 결과에 반영됐다. 선거를 승리로 이끈 사파테로 총리는 적극적으로 기억을 정치 무대로 불러왔다. 그의 할아버지가 내전 초기 프랑코 세력에 의해 처형됐다. 그는 총리 취임 연설에서 할아버지의 유서를 인용했다.
의회는 2006년을 ‘역사 기억의 해’로 지정했다. 2007년에는 ‘역사기억법’이 1년여의 논의와 협상 끝에 마침내 통과됐다. 내전 희생자들에 대한 보상을 확대하고, 공공시설에서 프랑코 시대의 상징을 제거하며, 내전과 독재시대의 기록물을 수집·보관하고 공개토록 했다. 가톨릭 교회에 새겨져 있는 프랑코 시대의 구호도 철거 대상에 포함시켰다. 또한 친프랑코 시위를 범죄로 규정했으며, 프랑코주의는 어떤 형태로든 표현이 금지됐다. 프랑코 시대의 잘못된 판결도 재심을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사회노동당은 국민에게 ‘정의’를 돌려주었다. 그리고 진실의 문을 열었다.
역사는 반드시 청산된다
가해자는 기억이 아니라 망각을 말한다. 불행했던 과거를 잊고, 미래를 위해 협력하자 한다. 독재세력은 언제나 과거의 기억을 장악해서 현재의 불의를 유지하려 한다. 그러나 망각은 영원하지 않다. 정의와 진실을 영원히 막을 수 없다. 스페인의 사례처럼, 망각은 일시적이고, 기억은 반드시 부활한다. 민주주의는 정의와 진실이 뒷받침될 때 지속 가능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진실과 화해를, 독일에서 기억과 성찰을, 스페인에서 정의와 기억을 강조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불행한 과거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다. 기억하지 못하면, 비극은 반복될 뿐이다. 청산되지 않은 역사는 단지 ‘청산의 시대’를 기다릴 뿐이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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