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일 관계에서 과거는 ‘현재의 정치’다. 역사와 화해하지 않으면 미래의 문도 열기 어렵다. 기회가 있었다. 바로 1965년 한-일 협정이다. 중단과 재개를 7번 반복했고, 1500회 이상 만난 마라톤 협상이었다. 1952년에 1차 회담을 했으니 14년이나 걸렸다. 다양한 평가가 있다. 그러나 묻고 싶다. 국교를 정상화할 때, 왜 역사 문제를 매듭짓지 못했을까?
국제법적 전쟁 배상 자격 못 얻은 한국한-일 협정에서 핵심은 기본조약과 청구권 문제다. 기본조약의 핵심 쟁점은 구조약의 무효 시점이다. 한국은 1910년의 한-일 합방조약과 그 이전의 협약이 무효라는 입장으로, 식민지 지배의 불법성을 강조했다. 그러나 일본은 총독부의 통치가 합법적이라고 주장했다. 양쪽은 차이를 얼버무렸다. 기본조약 제2조에서 양쪽은 “1910년 8월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 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고 합의했다. ‘이미’라는 표현으로 차이를 봉합했다. 협상의 기술이 발휘된 것이다. 한국은 ‘이미’의 시점을 1910년 체결 시점으로 해석했다. 그러나 일본은 일본의 패전 이후로 해석했다. 일본 정부는 비준 국회에서 이 조항을 “지금은 무효이나 당시는 유효하고 합법적이었다”는 뜻으로 보고했다.
처음부터 일본의 역사적 성찰은 없었다. 회담 과정에서 이른바 망언이 지속적으로 반복될 수밖에 없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구보다 망언’이다. 1953년 10월 3차 회담에서 수석대표인 구보다는 “일본이 진출하지 않았다면, 한국은 중국이나 러시아에 점령되어 더욱 비참한 상태에 놓였을 것”이라고 말했다. 청구권을 요구하는 한국 쪽의 주장에 ‘총독 정치가 조선에 공헌한 점’을 강조했다. 그는 “산림녹화, 철도 부설, 항만 건설 등”을 예로 들었다. 개인의 의견이 아니라, 일본 정부의 공통된 인식이었다. 구보다 망언으로 회담은 4년 동안 중단됐다.
왜 한-일 협정에서 과거사 문제를 소홀히 다루었을까? 근본적인 한계가 있었다. 한반도의 서글픈 현대사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전후 처리 과정에서 주체로 인정받지 못했다. 1948년 12월 배상 문제를 검토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폴리 특사는 “한국은 대일전 승리에 공헌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배상받을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 결국 한국은 1951년 샌프란시스코 조약에 서명국으로 참여할 수 없었다. 한국과 대만은 연합국이 아닌 ‘분리지역’으로 분류됐다. 전쟁 중에는 일본의 통치 아래 있었지만, 일본의 패전으로 일본에서 분리된 지역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분리지역은 배상 개념이 아니라, 분리에 따른 상호 재산 및 청구권 처리 개념이 적용됐다.
한국은 사실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대비해서 전쟁 배상 항목을 준비했다. 1949년에 작성된 500여 쪽의 보고서는 현물뿐만 아니라 채권과 전쟁의 물적·인적 피해, 그리고 일본의 저가 수탈에 의한 손해 배상 및 보상을 포함했다. 총액은 약 310억엔(종전 직전 환율 15엔대 1달러 기준으로 약 20억달러)에 달했다. 그러나 한국은 초대받지 못했고, 국제법적으로 전쟁 배상을 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지 못했다.
1952년 1차 회담에서 한국 쪽은 1949년 작성한 조서에서 전쟁의 인적·물적 피해와 민간의 보상 요구를 축소했고, 일본 정부의 수탈에 의한 피해를 삭제했다. 그럼에도 일본은 역청구권 개념으로 맞섰다. 한국의 청구권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협상 전술이었다. 조선에 살았던 일본인들의 재산에 대한 권리를 주장한 것이다. 일본은 전후 복구 과정에 있었고, 배상에 대한 경제적 부담을 걱정했다. 조선에서 살다 돌아온 50만 명 수준의 일본인들도 고려했다.
‘독립 축하금’ 혹은 ‘경제협력 자금’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에 대해 1952년 한국은 미국 정부에 해석을 요청했다. 회담 기간에 한-일 양국은 지속적으로 미국에 중재를 요청했다. 그래서 한-일 협정을 양자 협상이 아니라, 아예 3자 협상으로 규정하는 의견도 있다. 미국 국무성은 주미 한국대사관에 답신을 보냈다. 이른바 1952년 4월의 러스크 서한이다. 미국은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 제4조에 따라 일본의 역청구권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답했다. 동시에 한국의 대일 청구권은 일본인의 재산 처분으로 상쇄됐다는 의견도 적었다. 미국이나 영국 등 강대국들은 식민지 지배에 대한 배상에 인색했다. 자신들에게도 부메랑으로 돌아올 수 있는 선례를 남기지 않으려 했다.
한-일 회담은 냉전이라는 무대 위에서 전개됐다. 미국은 아시아에서 확고한 반공 전선을 구축하기 위해 한-일 관계의 정상화를 원했다. 경제적 측면도 작용했다. 1950년대 후반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가 증가하면서 대외 무상 원조를 차관으로 전환했다. 일본에 경제적 책임 분담을 요구했고, 한-일 협상에 적극적으로 임하라고 촉구했다. 1960년대 들어 케네디 행정부는 한국에는 실질적 이득을, 일본에는 지원의 명분을 줘서 차이를 좁히려고 했다. 당연히 역사 문제를 중시하지 않았다. 청구권 개념에서 경제협력 자금으로 성격을 변경한 것도 미국이고, 3억5천만달러에서 4억5천만달러의 협상 금액을 제시한 것도 미국이다.
1964년 말부터 한-일 협정을 둘러싼 한-미-일 3국 관계가 더 빨리 돌아가기 시작한 것도 정세 변화 때문이었다. 8월 통킹만 사건을 계기로 미국은 북베트남에 폭격을 시작했다. 1965년 2월부터 한국의 비전투부대의 베트남 파견이 시작됐다. 10월에는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했다. 존슨 행정부는 한-일 협정을 서둘렀다.
일본은 ‘청구권’이라는 개념엔 과거 식민지 역사에 대한 평가가 개입되기 때문에 회담 기간 내내 돈의 명목을 ‘독립 축하금’ 혹은 ‘경제협력 자금’이라고 주장했다. 1962년 11월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외상의 회담에서 대략적인 액수가 합의됐다. 무상 3억달러, 유상 2억달러, 민간 신용공여 1억달러 이상이었다. 일본의 협상 전략은 철저한 증거 논쟁으로 한국의 청구권 요구를 단념시키고, 그 대신 경제협력 방식으로 타결하는 것이었다. 경제협력 방식은 일본 기업들에 새로운 기회이기도 했다. 당시 외무성 조약 국장이던 나카가와는 “상대국에 공장이 생기고 일본의 기계가 돌아가면, 수리를 위해 일본에서 부품을 수입하게 되고, 그렇게 되면 일본의 손해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박정희 정부도 경제적 측면에서 한-일 협정을 서둘렀다. 수출 지향 산업화를 위해서는 한-일 양국의 국제분업 체계를 강화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대일청구권의 법적 근거가 부족하고 증빙자료가 불충분해서 청구권 금액이 감액되는 것보다 경제협력 방식이 훨씬 유리하다는 판단도 했다.
독도 문제, 협상의 마지막 고비박정희 정부의 협상 전략을 어떻게 평가할까? 명분보다 실리를 우선했다는 평가가 있다. 과연 그럴까? 청구권의 성격과 액수를 다른 동남아 국가와 비교해볼 필요가 있다. 유상차관과 상업차관을 제외한 무상 금액만 비교해보자. 버마는 3억4천만달러(1954년 2억달러, 1963년 추가 협정으로 1억4천만달러), 필리핀은 5억5천만달러를 배상받았다. 인도네시아도 1957년 4억달러(2억2300만달러, 무역 채권 1억7천만달러 포기)를 배상받았다. 명칭도 버마와 필리핀의 경우 ‘배상’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잘된 협상으로 보기 어렵다.
더 큰 문제는 개인청구권의 근거를 봉쇄한 점이다. 한-일 협정은 “청구권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됐다”고 규정했다. 일본은 이 조항을 근거로 전쟁 피해자들의 개인 청구권이 소멸됐다는 입장을 취한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조선인 원폭 피해자, 징용·징병 피해자, 그리고 종군위안부는 보상받지 못했다. 박정희 정부는 민간인의 대일 보상 문제를 한국 내에서 일괄처리한다고 밝혔지만, 절차가 까다로워 실제 보상받은 사람이 거의 없다.
독도 문제도 한-일 협정의 쟁점 중 하나였다. 일본은 처음부터 독도가 자신들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그래서 일본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하자고 한국을 설득했다. 국제사법재판소는 분쟁 당사국이 합의해야만 조정 절차가 이루어진다. 김종필-오히라 회담에서 오히라는 “양쪽이 국내 정치적인 문제로 독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어렵다면, 국교 정상화 교섭 후에는 반드시 이 건을 국제사법재판소에 제소한다는 약속을 한국 쪽이 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때 김종필은 ‘제3국 조정안’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당시 박정희 의장의 훈령과 다른 것이었다. 훈령은 “이 문제가 한-일 회담의 현안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하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왜 김종필은 이렇게 주장했을까? 미국을 염두에 둔 3국 조정 방안이라는 것이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점을 생각한 것이었다. 실효적 지배를 하고 있는 한국의 입장에서, 독도 문제를 미해결 상태로 유지하기 위한 작전상의 대안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시 미국은 독도 문제와 관련해 분쟁을 피해야 한다고 생각했고, 필요하다면 한국과 일본의 공동 소유 방안도 검토할 수 있다는 입장이었다.
독도 문제는 협상의 마지막 고비였다. 분쟁 해결에 관한 교환 공문을 작성할 때, 일본은 “다케시마 주권에 관한 분쟁을 포함하며”라는 문구를 고집했다. 물론 이 구절은 한국 쪽의 반발로 삭제됐다. 최종적인 문안은 “양국 간의 분쟁은 우선 외교상의 경로를 통해 해결하고, 해결할 수 없는 경우에는 양국 정부가 합의하는 절차에 따라 조정을 통해 해결하기로 한다”는 것이다. 한국은 독도가 분쟁 해결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 조항에 독도가 포함된다고 해석했다. 그래서 일본은 처음에는 ‘중재’라는 단어를 집어넣으려 했고, 그것이 안 되자 결국 ‘조정’이라는 단어를 삽입했다. 이 조항을 둘러싼 양쪽의 협상은 1965년 6월22일 오전 협정 조인식 25분 전에야 끝났다.
협상가는 이익만큼 역사 책임 인식해야한국은 너무 서둘렀다. 일본은 그런 한국의 입장을 이용해서 합의의 최종 순간까지 최대한 양보를 끌어내려고 했다. 한-일 협정은 한국에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박정희 정권은 국내 협상의 중요성을 무시했다. 국제적 냉전 상황에도 불구하고, 국내 여론을 협상의 지렛대로 삼았다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리고 한-일 협정은 ‘청산되지 않은 역사’를 물려주었다. 당시 경동교회의 강원룡 목사는 한-일 회담을 ‘정상화가 아니라 비정상화를 위한 회담’이라고 비판했다. 현재까지도 반복되는 일본 정치인의 망언과 한국 국민의 분노가 끝없이 계속되는 악순환을 예측한 말이다. 어설프게 역사의 상처를 봉합하면, 역사는 반드시 복수한다. 그래서 협상가는 당장의 이익만큼이나 역사의 책임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한겨레 인기기사
[영상] “내란 세력 선동 맞서 민주주의 지키자”…20만 시민 다시 광장에
‘내란 옹호’ 영 김 미 하원의원에 “전광훈 목사와 관계 밝혀라”
경호처, ‘김건희 라인’ 지휘부로 체포 저지 나설 듯…“사병이냐” 내부 불만
청소년들도 국힘 해체 시위 “백골단 사태에 나치 친위대 떠올라”
“제주항공 사고기 블랙박스, 충돌 4분 전부터 기록 저장 안돼”
‘적반하장’ 권성동 “한남동서 유혈 충돌하면 민주당 책임”
김민전에 “잠자는 백골공주” 비판 확산…본회의장서 또 쿨쿨
윤석열 지지자들 “좌파에 다 넘어가” “반국가세력 역내란”
연봉 지키려는 류희림, 직원과 대치…경찰 불러 4시간만에 ‘탈출’
천공 “국민저항권으로 국회 해산”…누리꾼들 “저 인간 잡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