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코끼리, 석가모니의 어머니인 마야부인의 태몽에 등장한 영물이다. 불교국가인 버마(미얀마)에서 이 동물은 오랫동안 평화와 번영의 상징이었다. 버마의 수도 네피도에 가면 흰 코끼리를 볼 수 있다. 버마 정부는 이 동물을 화합의 상징으로 내세운다. 채찍이 아니라 피리를 불어서 조련한다는 흰 코끼리처럼, 과연 세계적인 다인종 국가이며 오랫동안 군부독재와 내전을 겪은 버마에서 ‘하모니’는 가능할까?
미국 아시아 귀환 정책의 상징 국가로
1950년대 후반부터 이어져온 군부독재, 60년이 넘은 소수민족의 무장투쟁, 그리고 1988년 8월8일 양곤의 봄, 그러나 시위자 수천 명에 대한 야만적 학살, 그래서 이어진 국제적 고립, 과연 이 나라에 민주주의의 꽃이 필 수 있을까? 2000년대 들어 군부가 민주주의를 말할 때, 국제사회는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1년 테인 세인 대통령 집권 이후 버마가 보여준 변화는 예상을 넘어서고 있다.
대통령은 4성 장군 출신이다. 그의 뒤에는 군부가 있다. 그러나 그는 취임 이후 민주화의 상징 인물 아웅산 수찌 여사를 만나 동반자 관계를 구축했다. 정치범을 석방했고, 노동조합의 파업권을 인정했으며, 시위와 집회의 자유를 보장하고, 언론 검열을 폐지하며, 야당의 정당 활동을 보장했다. 버마에서 마침내 존재하지 않았던 ‘정치’라는 공간이 생겼다.
외교관계도 급변했다. 부시 행정부 때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버마를 ‘폭정의 전초기지’로 불렀다. 그런데 2011년 11월 힐러리 클린턴이 미국의 국무장관으로는 56년 만에 버마를 방문했고, 다음해에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다녀갔다. 미국 대통령은 양곤대학 연설에서 “나는 대통령에 취임할 때, 공포정치를 하는 국가들이 주먹을 펴면 손을 내밀겠다고 말했다. 오늘 나는 그 약속을 지키게 됐다”고 했다. 버마는 이후 오바마 정부가 추진하는 아시아 귀환 정책의 상징 국가가 되었다. 미국 기업들이 들어오고, 경제제재가 해제되고 있다.
버마는 그동안 친중 국가였다. 1988년 민주화 시위에 대한 군사정권의 탄압으로 미국과 유럽 국가들이 외교관계를 끊고 경제제재를 취했을 때, 중국만이 손을 내밀었다.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정치적으로 버마 편을 들어주었고, 경제적으로도 차관을 지원하고 무역의 문을 열어주었다. 버마는 이제 중국과 미국 모두와 협력하는 균형외교를 추구하고 있다.
평화 만들기도 중요한 영역이다. 테인 세인은 취임사에서 “우리는 평화 없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고 선언했다. 버마는 135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 국가다. 버마족이 65% 정도를 차지하고 있다. 버마족과 소수민족의 갈등은 영국 식민지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영국은 버마를 인도에 편입시켜 통치했다. 또한 식민지 하부 관료들을 다수 종족인 버마족이 아닌 소수민족 출신에서 주로 충원했다. 전형적인 분할통치 전략이다. 군대에서도 소수민족 출신이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5개국 국경지대, 정글과 산악지역소수민족의 자치를 보장하는 다민족 연방국가, 그것이 독립 당시의 목표였다. 독립 한 해 전인 1947년 아웅산 장군은 팡롱(Panglong) 협정을 통해 연방제를 독립국가의 비전으로 제시했다. 독립전쟁에서 소수민족의 협력을 구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독립이 되자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다수 종족인 버마족이 모든 것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독립 초기 버마군은 버마족 부대와 소수민족 부대가 있었는데, 버마족의 영향력이 확대되면서 소수민족 부대는 총을 든 채 국경 지역의 산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무장투쟁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군부정권은 연방제를 국가 분열의 징조로 해석했다. 단일민족국가 건설을 강조하면서 지역의 언어와 문화를 억압했고, 지배세력인 버마족의 종교, 즉 불교를 국교 수준으로 강조했다.
소수민족의 무장투쟁은 장기간 지속되었다. 어떻게? 버마의 국경지대가 갖는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 버마는 중국, 인도, 방글라데시, 타이, 라오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국경지대는 대부분 정글과 산악지역이다. 버마 정부군이 지리적으로 접근하기 어렵고, 동시에 인접 국가가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소수민족의 무장투쟁을 지원해왔다. 방글라데시는 현재 분쟁이 가열되고 있는 로힝야 지역의 이슬람 반군을 지원해왔다. 인도도 동북부 소수민족 무장단체를 지원했다. 중국 역시 과거 버마 공산당을 지원했으며, 카친독립군과 연합와주군(UWSA)을 지원했다. 코캉족·와족·샨족·카친족은 대체로 중국계 소수민족으로 분류할 수 있다. 타이 역시 과거 버마 군사정권과의 껄끄러운 관계 때문에, 소수민족 무장단체에 일종의 완충지역을 제공해왔다.
평화의 길은 결코 쉽지 않다. 불신이 존재하고, 미래는 불투명하다. 한편에서는 정전협정이 맺어지고 다른 한편에서는 정전협정이 깨지는 현상이 공존한다. 2011년 정전을 유지해오다, 오히려 전투가 재개된 카친독립군의 사례도 있다. 최근 들어 확대되고 있는 종교 갈등은 짙은 먹구름이다.
과연 어떻게 될까? 결국 문제는 민주주의일까? 민주주의가 정착되면, 제도 밖의 무장투쟁이 제도 안으로 걸어 들어와 정치적 경쟁에 참여할 것인가? 장기적으로 그렇게 될 것이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평화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현재까지 버마에서 민주화와 평화의 관계는 때로는 긍정적으로, 혹은 부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트소네 댐 공사 중단은 긍정적 사례다. 이 댐은 소수민족 분쟁지역인 카친주에 있다. 중국이 윈난성의 전력난을 해소하기 위해 버마 정부와 30억달러 규모의 수력발전을 위한 댐 건설을 합작 방식으로 추진했다. 사업 추진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생산 전력의 90%를 윈난성에 송전하는 방식이 가져온 반중 정서, 그리고 카친족의 약 1만5천 가구가 수몰되는 인도적 문제 등이 겹쳐 반대 여론이 높았다. 특히 2011년 아웅산 수찌 여사가 공개적으로 댐 건설을 반대하면서, 결국 테인 세인 정부는 댐 건설을 중단했다. 국책사업을 중단한 것은 민주화 때문이다. 정부는 댐 건설 중단을 카친족과의 평화협상을 진전시키기 위한 명분으로 활용했다.
수찌조차 소극적인 로힝야 문제물론 평화의 과정은 순조롭지 않다. 2011년 1월 정부군과 카친독립군이 17년간 유지해온 정전협정을 깨고 전투를 재개했을 때, 군부는 대통령의 정전 명령을 3번이나 어겼다. 대통령은 자위권 차원을 제외하고 선제공격을 중단하라고 지시했지만, 군은 자위적 조치를 그야말로 자의적으로 해석해 대통령의 명령을 거부했다. 왜 그랬을까? 대통령과 군부의 평화협상에 대한 의견 차이를 드러낸 것일까?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카친독립군에 대한 공격은 군부의 상층부가 결정했다. 군의 공세가 강화된 2009년 무렵, 군은 소수민족 무장단체를 국경수비대로 통합하는 계획을 발표했다. 무장단체에 국방부의 지휘를 받는 국경수비대로 들어오라는 제안이었다. 대부분의 소수민족 무장단체는 정부의 제안을 거부했다. 그런 상황에서 군은 민주화 이행 과정에서 분쟁 요소들을 서둘러 해결하겠다는 의지의 과잉을 보인 것이다.
정부군의 공세 배후에는 국경의 경제학도 작용했다. 버마 해상에서 시작한 가스 파이프라인이 카친반군 지역을 통과해 윈난성으로 가게 되어 있는데, 버마 정부는 가스 수송의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해 군사적 개입을 서두른 측면도 있다.
그리고 평화협상에서 소수민족 사이의 차이도 존재한다. 최근 종교분쟁이 격화된 로힝야 지역 문제에 정부가 소극적인 이유는 정치적 계산 때문이다. 8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로힝야족은 방글라데시에서 넘어왔다. 그러나 이미 몇 세대가 흘렀는데도 버마 국민으로 인정받지 못한다. 공격적인 불교도들이 이들을 학살하고 있지만, 아웅산 수찌 여사조차 문제 해결에 소극적이다. 소수의 인권이 아니라, 다수의 민족 정서 혹은 종교 정서에 편승하고 있다. 당장의 정치적 득실만 계산하는 동안 평화가 멀어지고 있다.
테인 세인 정부는 평화협상을 3단계로 계획하고 있다. 첫째는 정전 합의, 둘째는 정전협정 이행, 셋째는 정치 대화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신뢰 형성이다. 오랫동안 대결했기 때문에 불신이 깊다. 현재 정부 쪽 대표로 평화협상을 주도하는 아웅 민 대통령실 장관도 신뢰 형성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처음 그가 소수민족 무장단체를 방문했을 때 “그들은 반드시 무기 검색을 했고, 우리가 가져간 음식에 손대지 않았으며, 어떤 선물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음식에 독을 타거나, 선물에 폭탄을 숨겼을 것으로 의심했다는 것이다.
2013년 네피도에서 필자가 대통령실 장관을 만났을 때, 그는 “소수민족들이 정부의 진정성을 신뢰하기 시작하면서 협상의 속도가 빨라졌다”고 말했다. 물론 항구적인 평화협정으로 전환하려면 해결해야 할 과제가 적지 않다. 우선적으로 자치권을 보장할 수 있는 헌법 개정이 필요하다. 자치에서 핵심은 소수민족 정부의 결정 권한이다. 소수민족들은 권력 분점을 헌법에 명문화할 것을 요구한다. 자원의 합리적인 배분도 요구한다. 현재 소수민족 무장단체가 장악한 국경지역은 목재와 광물자원이 풍부하다. 합리적인 배분이 이루어져야 한다.
버마 정부는 소수민족 무장단체에 이제 총을 내려놓고 제도 안으로 들어오라고 권고한다. 그러나 오래된 내전은 언제나 전선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내전 안의 내전도 존재한다. 카렌족의 경우 기독교와 불교 신자 사이의 종교적 분열이 존재한다. 카친족의 경우 언어가 다른 북부와 남부가 이미 내분을 일으키고 있다. 무장단체와 해당 소수민족 사회, 그리고 이들의 이익을 대변하는 정당 조직 사이의 역동적 관계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15년 선거가 변곡점버마에서 민주적인 연방국가의 꿈이 실현될까? 2015년 선거가 변곡점이 될 것이다. 테인 세인 대통령은 불출마를 선언했기에, 결국 아웅산 수찌와 군부 대표의 한판 승부가 될 것이다. 정당한 절차로 선거가 치러지면 아웅산 수찌 여사가 이끄는 민주민족동맹(NLD)이 집권할 것이다. 그런데 버마 군부는 오랫동안 누려온 기득권을 내려놓을 수 있을까? 군부는 ‘질서 있는 변화’를 원한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는 것’이다.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는 누군가에 의해 관리되지 않는다. 호랑이가 달리기 시작하면, 내리고 싶어도 내릴 수 없다. 평화는 어떨까? 어쩌면 정전, 즉 내전을 중단하는 것은 쉽다. 그러나 제도 안에서 경쟁하는 정치는 훨씬 어렵다. 군부도 소수민족들도 언제든지 제도 밖으로 걸어가고 싶은 유혹을 느끼는 순간이 적지 않을 것이다. 이 전환의 계곡을 지나야 항구적인 평화와 만날 수 있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한겨레21 인기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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