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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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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긴 분쟁 가장 긴 대화

제국주의와 불평등조약으로 300년 동안 지속된 중소 국경 분쟁, 꾸준한 대화와 협상으로 타결
성과 없는 대화가 낳은 빛나는 성과
등록 2014-01-04 16:16 수정 2020-05-03 04:27

일반적으로 영토 분쟁은 협상으로 해결하기 어렵다. 그러나 중-소 국경 협상을 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 6681km에 이르는 두 나라 국경은 지구에서 가장 길었다. 국경을 둘러싼 역사도 파란만장했다. 제국주의와 불평등조약이라는 낯익은 영토 분쟁의 역사적 배경이 있었다. 대립과 갈등을 거쳐, 전쟁을 겪었다. 그리고 대화와 협상으로 마무리했다. 폭력에 의한 일방적 조정이 아니다. 서로 양보했다. 국경을 대립의 선이 아니라, 교류의 지점으로 만들기 위해. 300년 이상의 시간이 걸렸다. 동북아에서 영토 분쟁의 바람이 다시 불고 있다. 영토 협상이란 얼마나 어려운가? 중국과 소련(러시아)은 어떻게 선의 개념에 갇히지 않고, 민족주의를 넘어서, 국경 협상에 성공할 수 있었을까?

국경 충돌, 미-중-소 삼각 체제 전환 계기

국경은 근대국가의 산물이다. 중국과 제정러시아가 대략의 국경을 합의한 것은 1689년 네르친스크조약 때다. 이후 국경은 국력을 반영해서 변했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청나라의 국운이 쇠락할 때, 서구 열강과 함께 제정러시아도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불평등조약들이 맺어졌다. 아이훈조약(1858)에서, 러시아는 하천의 가운데가 아닌 중국 쪽 연안을 국경으로 정했다. 하천에 있는 모든 섬이 러시아 관할 지역이 되었다. 그리고 베이징조약(1860)으로 중국은 연해주를 잃었고, 두만강을 통해 동해로 나갈 수 있는 권리를 잃었다. 러시아혁명이 일어났지만, 국경의 이해관계는 달라지지 않았다. 물론 1919년 소련의 카라한 외교장관이 과거 제정러시아가 강탈했던 중국 영토를 무조건 포기한다고 선언했다. 이른바 ‘카라한선언’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의 국경지역은 백군이 차지하고 있었다. 적군이 다시 이르쿠츠크를 탈환하고 극동 통제권을 회복하자, 소련은 슬그머니 카라한선언을 철회했다.
1949년 붉은 중국이 등장했을 때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연대가 국익 갈등을 잠재우진 못했다. 중-소 관계는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1956년 흐루쇼프가 소련 공산당 20차 대회에서 스탈린의 개인숭배를 비판하면서, 중-소 분쟁이 본격화했다. 중국은 소련을 수정주의라고 비판했고, 소련은 중국을 교조주의로 몰아세웠다.
관계가 악화되면서, 국경에 긴장이 흘렀다. 1960년 여름 신장 지역에서 소련 국경수비대가 국경을 넘어 침략했다. 중국 유목민들의 월경을 단속한다는 명분이었다. 1965년 이후 소련은 국경지역에 병력을 늘렸다. 소련군이 우수리강과 아무르강 근처에서 중국 어선을 공격해, 어민들을 강제 구금하는 사례도 늘어났다. 1968년 소련이 체코의 ‘프라하의 봄’을 탱크로 짓밟자, 중국은 소련과의 전쟁이 임박했다고 판단했다. 그런 가운데, 1969년 전바오섬(珍寶島·소련은 다만스키섬이라 부름)에서 국경 충돌이 벌어졌다. 당시 소련은 실제로 중국에 대한 예방적 선제공격을 검토했다. 중국도 소련이 핵무기로 공격할 수 있다고 판단했고, 대응 공격을 준비했다.
물론 양국은 전쟁을 원하지 않았다. 국경 충돌 이후 저우언라이 총리와 코시긴 외교장관이 베이징 공항에서 긴급 회동을 했다. 코시긴은 당시 베트남의 호찌민 장례식에 참석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누구도 전쟁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확인했다. 그리고 국경의 평화 유지를 위한 협정이 필요하다고 합의했다. 때때로 대화는 성과가 없더라도 분위기를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 1969년 중-소 국경 충돌은 중국이 미국과의 관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계기가 됐으며, 미-소 양극 체제에서 미-중-소 삼각 체제로 세계 질서가 전환하는 결정적 사건이었다.

1986년, 고르바쵸프의 역사적 연설

중국과 소련은 1969년 10월부터 1978년 6월까지 15차례 국경 협상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40번의 준비회담과 156번의 대표회담이 열렸다. 9년간의 협상은 성과가 없었다. 결국 소련이 1979년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하면서 협상은 중단되었다. 1980년대가 시작되었지만, 양국 관계는 여전히 냉랭했다. 대화의 채널도 없었다.
그러던 중 1982년 소련의 브레즈네프 서기장이 타슈켄트를 방문해서 연설했다. 상투적으로 중국을 비난했지만, 연설 내용에 새로운 요소가 있었다. 중국의 주권을 존중하고, 중-소 관계 개선 의지가 있다고 밝힌 것이다. 중국은 소련의 미묘한 변화를 읽었다. 덩샤오핑은 외교부에 반응을 보이라고 지시했다. 중국도 원론을 앞세웠지만, ‘주목’과 ‘중시’라는 단어를 사용해 대화 재개의 기대감을 드러냈다.
그래서 1982년 10월 베이징에서 중-소 관계 개선을 위한 협상이 재개되었다. 덩샤오핑은 당시 협상대표단에 “조급해하지 마라. 성과에 집착하지 마라”고 당부했다. 협상은 겉돌았다. 중국은 중-소 관계를 개선하려면 3대 장애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① 중-소 국경과 몽골에서 소련군 철수, ② 아프가니스탄 철군, 그리고 ③ 베트남의 캄보디아 철수 설득이라는 조항이었다.
소련도 대화에 나섰으나, 양보할 생각은 없었다. 당시 협상 대표였던 첸지천은 그의 회고록에서 “소련의 주장은 ‘물속의 달’이나 ‘거울 속의 꽃’처럼 공허했다”고 비판했다. 협상은 1년에 2차례 서로 오가며 꾸준히 이루어졌다. 끝을 알 수 없는 마라톤 협상이었고, 인내력을 시험할 만큼 지루했으며, 말싸움에 지지 않기 위해 온갖 논리가 동원되었다.
성과 없는 대화였다. 그러나 대화를 하지 않는 것보다 나았다. 상대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고, 입씨름이라도 하는 동안 상황은 더 나빠지지 않았다. 더 중요한 것은 입씨름이 진행되는 동안 교류가 조금씩 늘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의 성과 없는 대화는 이후 대화의 성과를 위한 밑거름이 되었다.
교착은 소련의 정치 상황 때문이었다. 병든 지도자들이 교대로 정권을 승계했다. 당연히 줄초상으로 이어졌다. 브레즈네프(1982년 11월), 안드로포프(1984년 2월), 체르넨코(1985년 3월)가 연이어 사망했다. 중요한 정책 결정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다만 중국은 세 차례 장례외교의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리고 때가 왔다. 고르바초프가 역사의 무대에 올랐다. 1986년 7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는 중요한 연설을 했다. 고르바초프는 이 연설에서 중국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3대 장애 중 두 가지를 해소했다. 아프가니스탄 철수라는 역사적 선언을 했고, 중-소 국경지대에서 병력을 감축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또한 중국의 누구라도 만나겠다고 했다. 그리고 고르바초프는 중-소 국경과 관련해, 주항로 중심선을 경계로 하자고 제안했다. 중국이 오랫동안 주장했던 원칙이다. 이 원칙은 수로의 경계를 정할 때, 배가 다닐 수 있는 하천은 가장 깊은 곳을 국경으로 정하고, 그렇지 않은 하천은 중앙선을 기준으로 정하는 것이다. 블라디보스토크 선언은 소련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새로운 국경이 ‘평화와 우호의 경계’가 되기를 희망한다”고 말했다.

작은 이익보다 중-러 관계 미래 중시

양국은 즉각 외무장관 회담을 열었다. 국경 협상을 재개했다. 그리고 마침내 1989년 5월 고르바초프가 중국을 공식적으로 방문했다. 1959년 흐루쇼프와 마오쩌둥의 불쾌한 만남 이후 30년 만의 정상회담이었다. 덩샤오핑은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를 열자”고 말했다.
국경 협상의 우호적 환경이 조성되었다. 그러나 해결해야 할 현안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양쪽은 잠정협정(Modus Vivendi)의 지혜를 발휘했다. 특정 지역에 대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을 때, 그 문제는 보류하자는 것이다. 다른 지역의 협상과 연계하지 않고, 우선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부터 집중하자는 원칙이다. 이러한 의도적 모호함은 양쪽의 오랜 성과 없는 대화에서 터득한 지혜였다.
1991년 5월 장쩌민이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 국경에 대한 최초의 협정문서가 체결되었다. 양쪽은 아무르강과 우수리강 등 하천지역 섬들의 주권을 우선적으로 확정했다. 당시 섬들은 약 1845개에 달했다. 협정을 통해 소련 쪽이 945개, 중국 쪽이 896개의 섬을 갖기로 했다. 그리고 협정 체결 이후 구체적인 국경선 획정을 위한 실무협상이 이어졌다. 1993년 4월부터 시작된 협상에는 대체로 1천 명 이상이 참여했다. 지질학자, 국경수비대, 양쪽 국경지역의 주민대표 등이 망라되었다. 작업은 5년 정도 걸릴 것으로 예상했다. 양국 공동 국경 탐사위원회는 육지와 하천에 각 2~3km마다 경계를 표시했다. 1183개의 표시판이 설치되었다.
중국의 서쪽 국경과 관련해서 1991년 소련의 해체는 새로운 도전이었지만, 흐름을 바꾸진 못했다. 서쪽 국경 2978km 중 러시아 연방의 55km를 제외한 나머지는 카자흐스탄·키르기스스탄·타지키스탄의 국경이 되었다. 1992년부터 러시아를 포함하는 4개국과 동시에 국경 협상이 추진되었다. 1994년 중국-카자흐스탄 협정이 맺어지고, 차례로 협정이 타결되었다.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추진했던 국경 협상은 이후 상하이협력기구로 발전했다. 국경에 대한 합의 형성 과정이 다자간 안보 협력의 필요성으로 발전한 것이다.
물론 중-러 국경 협정 과정에서 반발도 있었다. 삶의 터전을 중국에 넘겨야 하는 러시아의 지역정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하바롭스크 시장은 국경 협정을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조정 과정에서 얻는 자가 있으면 잃는 자도 생긴다. 그러나 러시아 지도자들은 극동 지역의 작은 이익이 아니라, 새로운 중-러 관계의 미래를 더 중시했다.
1997년 11월 동부 국경의 98%가 해결되었다. 마지막으로 대표적인 분쟁지역만 남았다. 2004년 푸틴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고, 장쩌민과 회담했다. 마지막까지 분쟁지역으로 남아 있던 세 지역에 대한 해결 방안을 최종적으로 합의했다. 인룽섬은 중국 영토로 하고, 헤이샤쯔섬과 아바가이투섬은 분할하기로 했다. 양국은 해당 지역을 동등하게 나누고, 공동으로 협력하자고 합의했다. 함께 개발하고 발전시켜서 서로 이익을 보자는 것이다. 남은 실무 문제를 마무리하고, 2005년 마침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중-러 동쪽 국경에 관한 보충협정이 체결되었다. 300년 이상 오래된 협상이 마침내 성공적으로 타결되었다.

협상 효과는 폭력보다 오래간다

시간이 많이 흘러도 의지가 있으면 된다. 문제가 복잡할 때는 우선 쉬운 문제부터 해결해야 한다. 합의가 어려운 민감한 현안들은 잠정협정을 추진해서 여지를 남겨야 한다. 조정의 과정은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인내심이 필요하다. 그러면 오래된 분쟁이라도 이성으로 해결할 수 있다. 영토 협상이 어려운 만큼, 성공을 위해서는 더 많은 지혜를 요구한다. 합의를 만들어가는 과정은 복잡하다. 그러나 협상의 효과는 폭력의 결과보다 훨씬 오래간다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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