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19 공동성명은 한국 외교의 절정이다. 해방 이후 한국이 한반도 문제를 논의하는 국제무대에서, 그렇게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있는가? 그리고 성공한 적이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강대국 정치에 희생되거나, 혹은 사대에 의존해서 살아왔다. 그런 점에서 9·19 공동성명은 하나의 가능성이다. 북핵 협상이 길을 잃은 채 표류하고 있다. 너무 멀리 왔지만, 9·19 공동성명의 정신으로 다시 돌아가야 하지 않을까?
“그 팩스, 고장 난 것은 아니지?”
2005년은 비관으로 시작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다. 미국 부시 행정부는 여전히 협상을 ‘보상’으로 여겼다. 2005년 1월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은 인준청문회에서 북한을 ‘폭정의 전초기지’로 불렀다. 북한은 2월10일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2004년 베트남에 체류했던 탈북자 486명이 한꺼번에 입국하면서, 모든 남북대화도 중단된 상태였다.
어디서부터 매듭을 풀어야 할까? 남북관계부터 풀어야 한다. 북한과 소통해야, 북한에 영향력을 가진다. 국제무대에서의 비중은 북한을 설득할 수 있는 능력에 비례한다. 필자는 2004년 7월 남북대화가 중단된 시점에 통일부 장관의 정책보좌관이 되었다. 그해 가을, 편지를 자주 썼다. 발신자는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었고, 수신자는 북한의 림동옥 통일전선부 부장이었다. 통일부, 청와대, 국가정보원 관계자들이 모여 편지의 내용을 조율했다. 전달 통로는 국정원과 통일전선부 사이의 팩스였다. 몇 번이나 편지를 보냈지만, 답은 없었다. 하루는 장관이 내게 물었다. “그 팩스, 혹시 고장 난 것은 아니지?” 답답했다.
정동영 장관은 편지에서 2005년의 역사적 의미를 강조했다. 광복 60년이 되는 해를 이런 식으로 보내서는 안 된다고 설득했고, 우리는 남북관계의 청사진이 있음을 내비쳤다. 북한 쪽은 나중에 대화가 재개되었을 때, 답장을 하지 못해 미안했다고 말했다. 편지의 효과는 적지 않았다. 통일전선부는 편지를 들고 김정일에게 보고할 수 있었고 자신들의 입지를 강화했다. 나중에 북한의 한 인사는 “정 장관 선생이 림동옥을 살렸어”라고 말했다.
남북관계는 그해 5월 차관급 회담으로 재개되었다. 그리고 평양에서 열리는 ‘6·15 통일대축전’에 정동영 장관이 대통령 특사로 참여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을 직접 만나 6자회담 참여를 설득할 수 있는 기회였다. 면담은 애를 태우고 나서야 성사되었다. 우리는 김정일 위원장을 설득할 수 있는 ‘카드’를 들고 갔다.
바로 ‘중대 제안’이다. 남쪽의 전기를 북쪽에 송전하겠다는 구상이다. 왜 이런 제안을 준비했을까? 미국에 조지 부시 행정부가 들어서면서, 그동안 함경북도 신포에 건설되던 경수로 공사가 중단되었다. 경수로는 1994년 빌 클린턴 행정부 시기 북-미 제네바합의의 산물이며, 북한이 영변의 5MW 원자로를 포기하는 대가로 제공하는 에너지였다. 부시 행정부가 절대 경수로는 안 된다고 했기에, 별도의 에너지 지원 구상이 필요했다. 5월 차관급 회담에서 ‘중대 제안’을 귀띔했다. 그리고 정동영 장관의 방북을 추진하면서, 김정일 위원장을 직접 만나 설명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김정일과의 만남을 성사시키기 위한 일종의 카드였다.
200만kW의 송전을 한국이 전적으로 부담하겠다는 제안을 다른 참여국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었다. 노무현 정부는 전기를 남북 경제협력의 동력으로 생각했다. 3년 정도의 공사 기간에 핵 문제도 진전시키고 남북관계도 발전시켜 본격적인 경제공동체의 기반을 마련한 다음, 전기가 통하면 피가 돌듯이, 경제협력을 질적으로 도약시키겠다는 구상이었다.
미스터 김정일과 부시 각하
물론 북한이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다. 에너지 의존은 정치적 문제이기 때문이다. 1948년 북한은 남한에 제공하던 전기를 일방적으로 끊은 적이 있다. 북한은 이런 역사를 잘 안다. 6월17일 정동영 장관이 중대 제안을 김정일 위원장에게 설명했을 때, 김 위원장은 말을 아낀 채 검토해보겠다고만 했다. 중대 제안은 성사 가능성이 낮았다. 다만 협상의 미끼로는 유효했다.
6자회담을 열려면 북한과 미국의 상호 인식을 바꿔야 했다. 양국의 불신은 깊었다. 6월10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권유로 부시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김정일을 ‘미스터’라고 호칭했다. 일주일 뒤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쪽 인사들은 “미스터라는 것이 김씨, 이씨 그런 거 아니냐?”라고 물었다. 우리는 “미국 사람들 입장에서 그게 경칭”이라고 강조했다. 6월17일 정동영 장관은 미스터의 의미를 다시 설명하며 북한도 존칭을 사용할 필요가 있다고 권했다. 그래서 김 위원장의 “내가 부시 대통령을 각하라고 부르면 되나요? 못 부를 이유가 없지요”라는 말을 유도해냈다. 6월17일 김정일 위원장은 “미국이 북한을 인정하고 존중하면”이라는 단서를 달았지만, 7월 중 6자회담 복귀 의사를 밝혔다. 북한의 태도를 돌려세우는 데 마침내 성공했다.
그리고 필자는 정동영 장관과 함께 미국으로 갔다. 워싱턴으로 가기 전에 우리는 뉴욕에 들러 헨리 키신저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영향력이 있었고, 실제로 딕 체니 부통령과 라이스 장관에게 전화해 우리를 도와주었다. 부시 행정부의 강경파들은 여전히 협상에 소극적이었지만, 한국이 만들어낸 상황을 부정하기는 어려웠다. 이 과정에서 주한 미국대사로 근무했고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이면서 미국 쪽 6자회담 대표였던 크리스토퍼 힐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외교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이었다. 대북 강경파의 숲에서 힐은 돋보이는 협상가였다.
그렇게 해서 2005년 7월26일부터 8월7일까지 4차 6자회담 1단계 회담이 열렸다. 2주간의 마라톤협상이었다. 정부는 대표단을 응원하기 위해 격려금을 전달하기로 했다. 당시 통일부 장관이 국가안전보장위원회(NSC) 상임위원장이어서 보좌관인 필자가 격려금 전달자로 정해졌다. 양복 안주머니에 금일봉을 넣고, 혹시나 소매치기를 당하면 어쩌나 안절부절못하면서 베이징행 비행기를 탔던 기억이 생생하다.
당시 최종 합의에 실패한 것은 경수로 문제였다. 북한은 핵을 포기하는 대신,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미국은 경수로의 경자도 꺼내는 것을 반대했고, 북한은 반드시 경수로 제공 문제를 합의문에 명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쟁점에 대해서는 의견이 모아졌지만, 결국 경수로 제공 문제 때문에 1단계 회담은 결렬되었다.
2단계 회담은 9월13일 시작되었다. 중국은 개최국으로, 중재에 능란한 솜씨를 보여주었다. 자신의 입장을 내세우지 않고, 참여국들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그야말로 차이가 나는 부분에 다리를 놓으려고 애썼다. 한-중 양국은 긴밀하게 협력했고, 한국은 러시아와 일본의 협력을 얻기 위해서도 노력했다.
마지막 순간, ‘평화 공존’의 난항
한국의 송민순 대표는 경험 많은 외교관이며 노련한 협상가였다. 크리스토퍼 힐 미국 대표와는 비슷한 시기에 폴란드 대사를 함께 한 인연이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친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곱이곱이를 넘어가는 중요한 동력이었다. 경수로 제공 문제는 북한의 평화적 이용 권리를 인정하고,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타협했다. 북한은 자존심을 지켰고, 미국은 ‘적절한 시기’를 북한의 핵 포기 이후로 해석할 수 있게 되었다. 남은 쟁점들은 9월17일 한-미 외교장관 회담에서 대부분 해소되었다. 당시 반기문 장관은 미국에서 중국의 리자오싱 외교부장과 전화로 접촉하면서, 한-미-중 삼각 대화를 전개했다. 그는 결정적 시기에 결정적 장소에서 그야말로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렇게 합의문이 도출되는 줄 알았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에 이해하기 어려운 해프닝이 벌어졌다. 워싱턴은 북한과 미국의 관계와 관련된 항목 중 ‘평화적으로 공존하며’의 영어 표현인 ‘coexist peacefully’를 수정해달라고 요구했다. 이 개념이 과거 흐루쇼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주장한 ‘평화 공존’ 개념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였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주장이었다. 당시 최종 문안의 조율이 끝난 상태였다. 사소한 문구라도 조정을 하려면 본국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우리는 애매하게 처리한 부분이 적지 않은데, 만약 북한도 다른 부분에서 문구 수정을 요구하면 어쩌나 하고 걱정했다. 마지막 난관도 송민순 대표와 힐 대표가 지혜를 짜냈다. 그렇게 수정한 것이 ‘exist peacefully together’라는 표현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북한의 태도였다. 걱정과는 달리, ‘평화적으로 공존하며’라는 한글 표현을 그대로 둔다면, 영어 표현의 수정을 개의치 않겠다고 했다. 당시 미국이 북한보다 훨씬 교조적이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9·19 공동성명이 채택되었다. 한-중 양국의 중재와 조정이 거둔 성과였다. 북핵 문제의 출구는 그렇게 마련되었다. 북한은 모든 핵무기와 핵 프로그램을 포기하고, 나머지 국가는 외교관계 개선, 한반도 평화체제, 경제와 에너지 지원을 상응 조치로 제공하기로 했다.
그러나 9·19 공동성명은 시작되지도 못하고 위기를 맞았다. 합의되는 시점에 미국 재무부는 마카오 소재 중국계 방코델타아시아(BDA) 은행을 자금세탁 우려 대상으로 지정했다. 북한의 위조지폐 제조 의혹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북한 관련 계좌는 동결되었고, 이 조치는 북한에 대한 국제적 금융제재의 시작이었다. 9·19 공동성명의 합의 정신은 실종되고 북-미 양국 관계는 얼어붙었다. 상황이 악화되면서, 결국 북한은 2006년 1차 핵실험에 나섰다. 6자회담은 2007년 북-미 양국의 2·13 합의와 6월 북한의 BDA 자금 2400만달러를 북한에 돌려준 다음에야 재개될 수 있었다. 부시 행정부의 대북 강경파들이 재무부를 통해 9·19 공동성명을 격침시켰고, 협상이 사라진 기간에 북한은 핵 억지력을 강화했다.
너무 늦지 않기를
2007년 남은 시간은 너무 짧았다. 그리고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북핵 협상의 ‘게임 체인지’가 일어났다. 그들은 협상에 침을 뱉었다. 그때부터 우리는 9·19 공동성명에서 너무 멀리 왔다. 박근혜 정부에서도 협상은 상갓집 개 신세다. 핵 보유를 향한 북한의 질주는 멈추지 않을 것이다. 대안이 있는가? 9·19 공동성명을 대체할 수 있는 해법이 있을까? 포괄협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이라는 이행의 원칙을 우회할 수 있을까? 헤겔은 말했다. 미네르바의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야 날아오른다고. 협상은 죽지 않았다. 때가 되면, 9·19 공동성명도 먼지를 털 것이다. 다만 너무 늦지 않기를.
김연철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김연철의 협상의 추억’ 연재를 마칩니다. 그간 수고해주신 필자와 사랑해주신 독자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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