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다만 일시적으로 중단됐다. 휴전, 60년이 되었다. 전쟁은 오래된 상처로 남아 있다. 때로는 국 지전으로, 심리전으로, 혹은 이념 전쟁으로 살아난다. 우리는 아직도 전쟁이 시작된 날 을 기억할 뿐, 전쟁이 언제 어떻게 끝났는지 잘 모른다.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 의 전선이 남쪽 끝까지 왔다가, 다시 북쪽 끝 까지 갔고, 결국 38선 근처의 제자리로 돌아 오는 데 걸린 시간은 9개월이다. 그리고 1951 년 7월 휴전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은 2년이 나 계속됐다. 전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영화 처럼, 많은 생명이 사라져갔 다. 비극이 중첩되고, 증오가 재생산되는 시 간이었다. 협상은 왜 그렇게 길어졌을까?
휴전 제안이 처음 나온 때는 1950년 10월 초다.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소련 쪽이 즉각 휴전과 외국군 철수 결의안을 유 엔 총회에 제출했다. 그러다 중공군 참전으 로 전세가 역전되자, 미국에서도 국무부를 중심으로 휴전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인도 를 비롯한 중립국들도 전쟁 중단을 촉구하 고 휴전을 제안하기 시작했다.
밖 전쟁터와 다름없던 협상 회의장
힘이 우세한 쪽은 휴전을 고려하지 않는 다. 교착이 장기화하면서 유엔군이나 공산 군 쪽 모두 일방적 승리가 어렵다고 판단했 을 때, 협상이 시작될 수 있었다. 1951년 6월 23일 야코프 말리크 유엔 주재 소련 대사가 공식적으로 휴전을 제안했다. 미국도 그해 6 월29일 해리 트루먼 대통령이 국가안전보장 회의를 소집했다. 그래서 휴전 협상을 하라 는 훈령을 매슈 리지웨이 유엔군 사령관에 게 내렸다. 다음날 리지웨이는 원산항에 정 박 중인 덴마크 병원선 유틀란디아호에서 휴전을 위한 군사회담을 하자고 제안했다.
뜸 들이던 소련·중국·북한은 서로 협의 해 7월1일, 회담 장소를 개성으로 변경하면 서 협상을 수락했다. 미 합동참모본부도 동 의했다. 협상 의지를 보이기 위해 공산군 쪽 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은 실수 였다. 개성은 전쟁 전 38선 이남 지역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공산군 쪽이 통제하고 있었 다. 그해 10월 회담 장소가 판문점으로 변경 되고, 이후 판문점을 중심으로 분계선을 긋 는 과정에서 판문점 북쪽의 개성은 자연스 럽게 북한의 영토가 되었다. ‘열린 성’이라는 운명 같은 이름처럼, 먼 훗날이 되어서야 개 성은 공단의 형태로 남쪽에 개방됐다.
예비회담을 거쳐 7월10일 개성의 내봉장 에서 역사적인 휴전회담이 시작됐다. 의제 를 정하는 데만 2주일이 걸렸다. 결정된 의 제는 △의제 채택과 일정 △군사분계선 설정 △정전감시기구 △전쟁포로 처리 △외국군 철수와 평화적 해결 등 5개였다.
7월26일부터 두 번째 의제인 군사분계선 협상이 시작됐다. 협상 분위기는 살벌했다. 회담장 안은, 밖의 전쟁터와 다름없었다. 공 산군 쪽은 시선을 내리깔기 위해 유엔군 쪽 이 앉을 의자의 높이를 낮추기도 했다. 물론 유엔군 쪽의 항의로 시정됐다. 회의 도중에 욕설이 난무했고, 어떨 때는 2시간11분 동안 아무 말 없이 노려보기만 했다. 상대가 먼저 말하기 전까지 침묵을 지키기도 했고, 반대 로 1시간 이상 쉬지 않고 장광설을 늘어놓기 도 했다. 회담이 며칠씩 중단되는 경우도 적 지 않았다.
1951년 11월23일 양쪽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에 합의했다. 양쪽이 각각 2km씩 후퇴해 비무장지대를 만들고, 휴전 협정에 서명할 때까지 적대 행위를 계속하 고, 30일 이내에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을 경우 수정한다는 것이었다. ‘협정 서명 때까 지 전투 계속의 원칙’은 휴전 협상이 시작될 때부터 유엔군 쪽이 강조한 조항이다. 압도 적인 군사력으로 공산군을 압박하는 것이 협상에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만약 협상이 이뤄지는 동안 전투 중지에 합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소모적인 고지전은 없었을 것이다. 사망자도 많이 줄었을 것이다. 군사분계선 협상이 이뤄진 1951년 7월부터 11월까지 유엔군의 사상자 수는 6만 명에 달했고, 공산군 쪽 사상자 수도 23만 명이나 되었다.
1953년 아이젠하워 당선으로 변화 맞아유엔군 쪽은 중요한 고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한 달 안에 다른 의제를 합의하면 휴전이 성립될 수 있었다. 그러나 정전감시기구 논의 과정에서 양쪽의 입장 차이가 작지 않았다. 결정적 교착 요인은 바로 전쟁포로 처리 문제였다. 처음에 양쪽은 문제의 심각성을 몰랐다. 1949년 체결된 전쟁포로에 관한 제네바협정이라는 기준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도 회원국 가입을 신청한 상태였고, 공산군 쪽도 제네바협정 준수를 강조했다.
1951년 12월 포로 송환 협상이 시작됐을 때, 휴전 협상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1년6개월을 이 문제로 씨름할 것이라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포로 명부를 교환하면서 실망과 불신이 커졌다. 유엔군 쪽은 13만2천 명의 명단을 제시했지만, 공산군 쪽이 제시한 수는 겨우 1만1500여 명에 불과했다. 유엔군 쪽은 제네바협정을 따를 수 없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1대1 교환 원칙을 주장했다. 공산군 쪽으로부터 더 많은 포로를 받기 위해서는 납북한 민간인을 포함해야 한다는 계산도 했다. 그러나 그럴 가능성이 적었다.
그래서 유엔군 쪽은 자원 송환 원칙을 제기했다. 포로의 다양성은 한국전쟁의 특성을 반영한다. 대부분의 남한 출신 북한군 포로는 북한의 남한 점령 기간에 징집됐으나, 유엔군 쪽의 인천 상륙작전으로 38선을 넘기도 전에 다시 유엔군 쪽에 포로로 잡혔다. 포로수용소에서는 반공포로와 친공포로의 유혈충돌이 끊이지 않았다. 포로수용소 소장이 포로들의 포로가 되는 경우도 발생했다. 자원 송환 원칙은 심리전의 요소도 있었다. 송환을 원치 않는 포로가 있다는 것은 바로 상대방 체제의 약점을 드러내는 일이다.
남한 출신 반공포로를 제외하고도 송환 거부 포로가 적지 않았다. 유엔군 쪽이 제시한 송환 거부 포로는 북한군이 7900여 명, 중공군은 1만4704명이나 되었다. 중공군 송환 거부 포로 다수는 장제스의 국민당군 출신이었다. 강제 징집된 이들은 중국이 아니라 대만으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당시 회담을 주도하고 있던 중국은 송환포로 총수보다 중국군 포로의 송환 비율을 더 중시했다. 그래서 중국은 양보하지 않으려 했다. 만약 1952년 7월 유엔군 쪽이 8만3천 명의 송환포로 총수를 제시했을 때, 그것을 받아들였다면 협상은 타결되고 전쟁은 끝났을 것이다. 이후 1년 동안 얼마나 많은 청춘이 죽었는가?
1953년이 되면서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발생했다. 우선 미국에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행정부가 출범했다. 1952년 11월 미국 선거에서 아이젠하워는 “대통령에 당선되면 최우선 과제로 한국전쟁을 종식하겠다”고 약속했다. ‘나는 한국에 갈 것이다’란 제목으로 알려진 당시 유세 연설은, 전쟁영웅이던 아이젠하워의 이미지와 결합되면서 당선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아이젠하워의 등장으로 국내 정치적으로 너무 허약해서 휴전을 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위험부담이 커서 확전도 못한 ‘트루먼의 딜레마’를 해결할 수 있었다.
소련에서는 스탈린이 1953년 3월5일 사망했다. 스탈린 사후의 소련은 내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쟁이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북한은 휴전 협상 초기부터 휴전을 원했다. 유엔군 쪽의 폭격으로 피해가 심각했다. 1953년 초 매일 300~4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중국 또한 국내 사정으로 전쟁 중단을 고려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변수는 이승만 정부였다. 미국은 휴전 결정 과정에서 한국에 의사를 묻지 않았다. 회담 과정에서도 철저하게 따돌렸다. 이승만 정부가 휴전 자체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6월에 대부분의 쟁점이 합의되면서 휴전 협상의 타결이 임박했다. 이승만 정부는 휴전에 반대하는 대규모 관제시위를 벌였다. 유엔군 쪽 휴전대표단에서 한국 대표를 소환했다. 그리고 이승만 대통령이 유엔군 쪽의 작전지휘권에서 이탈해 독자적으로 북진을 불사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정권은 6월18일 전격적으로 반공포로를 석방했다. 친공포로들과의 충돌을 완화하기 위해 반공포로는 육지의 7개 수용소로 분산 수용됐다. 수용소의 경비를 한국이 맡았기 때문에 미군이 물리력으로 제어할 수 없었다. 포로 3만5천여 명 중 2만7천여 명이 탈출에 성공했다. 미국은 이승만의 행위를 강력하게 비판했다.
미국이 우려한 것은 사실 반공포로 석방이 아니었다. 마크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조차 반공포로의 일방적 석방을 본국에 건의하고 있었다. 한국의 작전지휘권 이탈 가능성을 심각하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미국은 그 경우를 대비해 비상계획을 수립했다. 바로 ‘에버레디 계획’이다. 유엔의 이름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승만을 대통령에서 축출할 계획이 포함돼 있었다.
이승만은 휴전 반대 시위와 반공포로 석방을, 국내 정치적 지지 기반을 다지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이끌어내는 협상 수단으로 활용했다. 미국은 ‘에버레디 계획’이라는 채찍이 아니라, 월터 로버트슨 국무부 극동 담당 차관보를 서울에 보내 협상하는 당근을 선택했다. 먼 훗날이 된 지금 반공포로 석방을 대미 자주 외교로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그 때문에 4만2천 국군포로가 귀환할 가능성도 사라졌음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1953년 7월27일 오전 10시 휴전 협정 서명 조인식이 이루어졌다. 휴전회담 수석대표들이 참여했다. 쌍방 군사지휘관들의 서명은 그 뒤에 하기로 했다. 조인식 뒤 12시간이 지나서 휴전이 발효됐다. 조인식이 열리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던 포성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멎었다. 휴전회담을 시작한 지 2년18일째 되는 날이었다.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가?휴전 협상이 남긴 유산이 적지 않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북방한계선(NLL) 문제가 대표적이다. 당시 대부분의 해·공군을 장악하고 있던 유엔군은 해상에서 군사분계선을 설정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전쟁은 물리적 피해와 가슴속의 38선을 굵게 그은 채 끝났다.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했는가? 아무도 승리하지 못했다. 다만 아무도 패배하지 않으려 했을 뿐이다. 휴전 협상이 시간을 보내며 제자리에서 돌고 돈 이유이기도 하다. 60년 전의 이념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휴전을 반대하며 북진통일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전쟁 심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비극적 역사의 현재화가, 참으로 비극적인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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