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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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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신저가 파키스탄에서 배탈이 난 이유는

1972년 미·중 상하이 공동선언 뒤의 바르샤바-루마니아-파키스탄 채널 키신저, 병을 핑계로 전용기 타고 파키스탄에서 베이징으로 가 메시지 전달해
등록 2013-05-20 15:44 수정 2020-05-03 04:27

화해는 악수에서 시작한다. 1972년 2월 중국 땅을 밟은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은 영접 나온 저우언라이 총리의 손을 잡았다. 저우언라이는 1954년을 떠올렸다.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문제를 다루기 위한 제네바회담 때다. 중국이 국제 외교무대에 공식적으로 데뷔한 회의였다. 당시 존 포스터 덜레스 미 국무장관은 저우언라이의 악수를 공개적으 로 거부했다. 모멸의 기억은 오래갔다. 저우 언라이는 닉슨의 악수를 존중의 표시로 해 석했다. 왜 그들은 손을 잡았을까?
‘반공의 아이콘’이자 ‘데탕트’의 주역
닉슨, 문제적 인물이다. 한때는 ‘반공의 아 이콘’이었다.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다양 하다. 하지만 동서 긴장 완화를 일컫는 ‘데탕 트’라는 말에서 닉슨을 뺄 수는 없다. 닉슨 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1968년, 그해 미국의 청춘들이 베트남에서 거의 1만5천 명이나 죽었다. 베트남전쟁에서의 ‘명예로운 철군’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닉슨은 새로운 외교 전략이 필요했다. 그에 게는 유능한 참모가 있었다. 바로 국가안보회 의(NSC) 보좌관이던 헨리 키신저다. 하버드 대학교에서 19세기 유럽 열강의 세력균형을 연구한 그는 미-소-중 삼각 외교의 중요성 을 파악할 수 있었다. 중국의 존재를 인정해 야 할 시점이 왔고, 소련과의 관계를 풀기 위 해서라도 ‘베이징 카드’는 쓸모가 많았다.
우선 채널을 찾았다. 오랜 적대관계를 겪 었기에 쉽지 않았다. 가장 먼저 활용한 채널 은 폴란드 바르샤바의 양국 대사관이었다. 그러나 불신이 깊었기에 ‘바르샤바 채널’은 끊기기 일쑤였다. 중국 외교관이 네덜란드의 헤이그 주재 미국 대사관으로 망명했을 때, 혹은 미국이 캄보디아 폭격을 시작했을 때 몇 달 동안 두절됐다.
탐색 과정에서 채널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루마니아 채널도 있었다. 1969년 8월 닉슨은 루마니아를 방문했다. 2차 세계대 전 이후 미국 대통령이 공산권 국가를 방문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다. 중국과 관계가 좋 았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대통령에게 중재 역할을 부탁하기 위해서다.
더 중요한 일은, 대화의 신호를 전달하는 것이다. 대화할 의사가 있어야 채널도 살아 난다. 1969년 9월 바르샤바 채널을 통해 닉 슨 대통령은 대만해협의 미군 7함대 경계활 동을 대폭 줄였다는 점을 알렸다. 그러자 중 국 쪽도 1970년 1월 바르샤바 주재 중국 대 사를 통해, 미국 고위급 대표의 중국 방문에 관심이 있다는 점을 알려왔다.
테헤란에서 보낸 메시지 ‘유레카’
대화의 신호를 보내고 싶으면, 정책의 내 용도 달라져야 한다. 1971년 3월 닉슨 행정 부는 미국인의 중국 여행 금지 조처를 해제 했다. 그해 4월, 영화처럼, 극적으로 ‘핑퐁외 교’가 이뤄졌다. 미국 탁구 대표팀의 중국 방 문은 마오쩌둥 주석의 결단이었고, 스포츠 교류를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고자 했던 닉 슨의 의지가 반영됐다. 미국의 안방에 전달 된 중국인들의 태도는 냉전의 적대감을 녹 였다. 닉슨은 중국에 대한 무역제재를 완화 하는 조치를 발표했다. 정부 관계가 없을 때, 민간 교류가 대화의 물꼬를 텄다.
대화의 환경이 무르익었다. 닉슨과 키신저 는 이제 확실한 채널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 각했다. 둘 다 국무부를 불신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8년 동안 부통령으로 재 직했기에 외교 경험이 적지 않았다. 그의 말 처럼, 그는 외교정책을 ‘사랑’했다. 그래서 국 무부의 관료들을 거쳐야 하는 대사관 채널 이 아니라, 백악관이 직접 소통할 수 있는 비 밀 채널을 찾았다.
가장 유력하게 부상한 채널이 바로 파키 스탄이다. 1970년 10월 파키스탄 대통령 야 히아 칸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닉슨은 중국과의 관계 정상화 의사를 전달해달라고 부탁했다. 그해 11월 칸은 중국을 국빈 방문했다. 그리고 닉슨의 메시지를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전달했다. 저우언라이는 ‘정상으로부터, 정상을 통해, 정상에게’ 전달된 첫 번째 메시지라고 평가했다.
그리고 백악관-파키스탄 대통령-워싱턴 주재 파키스탄 대사를 통해 미국의 특사 방문에 관한 의견을 조율했다. 마침내 키신저는 1971년 뜬금없이 아시아 순방에 나섰고, 인도를 거쳐 파키스탄으로 갔다. 그해 7월8일 키신저는 갑작스러운 복통을 핑계로 ‘휴식’에 들어갔다. 다음날 새벽 3시30분, 그는 파키스탄 외무장관이 운전하는 작은 차를 타고 공항으로 갔다. 그곳에 베이징으로 가는 파키스탄 대통령의 전용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키신저는 저우언라이 총리와 마오쩌둥 주석을 만났다. 닉슨의 중국 방문에도 합의했다.
17시간의 체류는 양국 관계의 새로운 출발을 의미했다. 닉슨 대통령은 애타게 키신저의 방문 성과를 기다렸다. 키신저는 파키스탄에 잠시 들러, 다시 이란 테헤란으로 날아갔다. 그곳에서야 전보를 보낼 수 있었다. ‘유레카’(eureka), 단 한마디였다. 두 사람 사이에 성공했을 경우, 합의된 암호였다. 키신저의 비밀 방문은 대통령과 키신저의 수행원을 제외하고 아무도 몰랐다. 하물며 국무장관 윌리엄 로저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키신저가 미국으로 돌아와서야, 닉슨은 1972년 2월 중국 방문 계획을 발표했다. 키신저의 중국 비밀 방문 보고서에는 이런 말이 있다. “우리는 추상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이데올로기와 현실정치(real-politik)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닉슨과 키신저는 이념을 앞세우는 냉전시대의 외교와 결별했다.
키신저 방문 이후 미국과 중국은 프랑스 파리의 대사관 채널을 활용해 실무적인 문제들을 협의했다. 중국이 1971년 10월 유엔 회원국이 된 뒤에야, 미-중 두 나라는 안정적인 대화 채널을 확보했다. 초대 중국의 유엔대사인 황화와 키신저 사이의 뉴욕 채널이 그것이다.
닉슨과 키신저는 가능한 한 상대를 존중했다. 마오쩌둥을 만나러 갔을 때도 마찬가지다. 닉슨은 마오쩌둥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실제로 그는 방문 기간 중 만찬사나 건배사를 할 때, 직접 마오쩌둥의 시를 인용하기도 했다. 닉슨을 만난 마오쩌둥 역시 화답했다. “난 지난 선거에서 당신을 찍었소. 나는 우파를 좋아합니다. 좌파는 말만 하지만, 우파는 그 말을 실천하지요.” 키신저도 끼어들었다. “하버드에서 강의할 때, 학생들에게 주석님의 어록을 읽혔지요.”
‘인정한다’와 ‘확인한다’
분위기는 좋았다. 그러나 공동선언 작성을 둘러싼 신경전은 날카로웠다. 저우언라이는 베트남·대만, 그리고 한국·일본에서 미군이 철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일미군 철수를 주장하는 저우언라이의 주장에 키신저는 “만약 미국이 일본에서 철수하면 일본은 재무장할 것”이라는 논리로 맞섰다. 대부분의 쟁점은 앞선 키신저의 방문을 통해 이미 조율됐다. 가장 어려웠던 협상은 바로 ‘하나의 중국’ 원칙을 둘러싼 갈등이었다. 중국은 대만이 중국의 일부라는 점을 미국이 인정하기를 바랐다. 그리고 대만 주둔 미군의 구체적인 철수 일정을 제시할 것을 원했다.
공동선언은 상하이에서 발표될 예정이었다. 외교협상에서 자주 쓰는 말, 곧 ‘상하이 코뮈니케’다. 왜 이런 표현을 쓰는가? 서로 입장 차이가 클 때, 각자의 주장을 병기하는 방식이다. 당시 채택된 문서도 마찬가지다. 외교관계를 바라보는 미국 쪽 입장과 중국 쪽 입장을 각각 설명했다. 물론 합의한 내용도 있다. 양국 관계 정상화의 필요성, 군사적 갈등 완화, 그리고 다양한 분야의 교류 확대 등이다.
대만 문제와 관련해선 미국의 입장을 어떻게 표현하느냐가 쟁점이었다. 결국 “미국은 대만해협의 모든 중국인이 하나의 중국이며, 대만은 중국의 일부라는 점을 확인하고(acknowledge), 미국 정부는 이러한 지위에 도전하지 않는다”라고 적었다. 키신저는 ‘인정한다’(recognize)라는 단어를 피했다. 중국의 대만에 대한 주권 주장을 미국이 직접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피하고자 했다. 국내 정치적으로 양보의 선이 있었고, 다른 동맹국에 대해 나쁜 선례를 남기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리고 양국은 대만에서의 미군 철수가 최종 목표라는 점을 확인했다고 적었다. 저우언라이는 최종 문안이 완성된 뒤 “역시 박사가 쓸모 있네”라는 말로 키신저의 지혜를 칭찬했다.
문제는 그 이후에 발생했다. 국무부는 문안 협상에서 철저하게 배제됐다. 로저스 국무장관이 최종 문안을 닉슨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것은 이미 닉슨과 마오쩌둥의 승인이 끝난 뒤였다. 국무부는 강력하게 반발했다. 표현을 둘러싸고 조목조목 문제를 제기했다. 특히 아시아에서 미국의 방위 공약에 해당되는 국가로 한국과 일본만 거론한 것을 문제 삼았다. 대만과 필리핀을 빠뜨린 것이다. 1950년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미국의 방어선을 거론하면서, 한국을 언급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전쟁이 일어났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그리고 대만 주민 중에 독립을 주장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에 ‘모든 중국인’(all chinese)이 아니라, 정관사가 붙은 ‘중국인’(the chinese)이라고 표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외교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것
키신저가 문안을 다시 조정해야 한다고 중국 쪽 책임자 차오관화에게 말했을 때, 차오관화는 화를 냈다. 그는 “이럴 거면 공동선언을 채택하지 말고 그냥 가라”고 말했다. 그래서 닉슨 대통령이 아무런 성과도 없이 여행객처럼 중국을 방문한 것으로 하자고 했다. 진정하는 시간을 갖고, 그들은 다시 문안을 조정했다. 키신저는 할 수 없이 ‘모든 중국인’이라는 표현은 받아들였고, 다만 한국과 일본에 관해서는 군사동맹을 의미하는 단어 대신 ‘긴밀한 관계와 유대’라는 정치적 표현으로 고쳤다. 고친 문구는 다시 닉슨과 마오쩌둥의 승인을 받았다.
닉슨 대통령은 상하이를 떠나기 전날 마지막 만찬사에서 “1만6천 마일의 바다와 22년 적대의 세월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았다”고 말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불명예스럽게 대통령직에서 하야하지 않았다면, 노벨평화상이 키신저 혼자의 몫은 아니었을 것이다. 닉슨은 외교정책에서 대통령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줬다. 외교는 전적으로 대통령의 몫이다. 대통령의 철학과 의지가 부족하면, 협상 과정에서 불거지는 불신의 벽을 넘기 어렵다. 닉슨이 무대에서 사라졌을 때, 미-중 관계의 동력도 약화됐다. 1976년 4월 제럴드 포드 대통령은 더 이상 ‘데탕트’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말 것을 행정부에 지시했다. 데탕트라는 단어는 ‘힘을 통한 평화’라는 말로 교체됐다. 양국의 수교는 1979년 카터 대통령과 그의 NSC 보좌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의 노력으로 실현될 수 있었다. 대통령이 외교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미래로 갈 수 있다.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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