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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광 히틀러와 거대한 착각


실패한 협상의 상징 1938년 ‘뮌헨 평화회담’… 상대방 선의에 의존한, 내밀 카드 없는 협상은 성공 어려워
등록 2013-04-07 17:31 수정 2020-05-03 04:27

1938년 독일 뮌헨은 실패한 협상의 상징이 다. 이 회담에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는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에게 체코슬로바키 아의 수데텐 지역을 넘겼다. 독일인 약 300만 명이 거주하는 이 지역을 히틀러는 피 한 방 울 흘리지 않고 접수했다. 체임벌린은 외교로 전쟁을 막았다고 생각했다. ‘거대한 착각’이었 다. 역사는 뮌헨이 제2차 세계대전의 길을 열 었다고 평가한다. 체임벌린의 후임자인 윈스 턴 처칠은 당시 뮌헨 회담을 “협상이 아니라, 노상강도를 당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후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대가를 얻지 못하고, 핵심 이익을 포기하면서, 일방적으 로 양보하는 것을 의미하는 무능한 외교”의 대명사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베트 남전쟁에서 이라크전쟁까지, 언제나 군사적 개입은 ‘독재자에게 놀아난 순진한 체임벌린’ 에게 침을 뱉는 것으로 정당화됐다. 한국에 서도 체임벌린의 유화정책은 ‘가짜 평화론’으 로 두들겨맞고 있다. 체임벌린은 왜 뮌헨으로 갔을까?

1938년 9월30일 독일 뮌헨에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왼쪽)가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오른쪽)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날 영국과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할양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협정에 서명했다. 한겨레 자료

1938년 9월30일 독일 뮌헨에서 네빌 체임벌린 영국 총리(왼쪽)가 아돌프 히틀러 독일 총통(오른쪽)과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이날 영국과 독일은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할양하는 내용을 뼈대로 한 협정에 서명했다. 한겨레 자료

통역도 없이 기록도 없이

뮌헨 회담 이전에 이미 체임벌린은 히틀러 를 두 번 만났다. 회담 보름 전인 9월15일 그 는 알프스의 베르히테스가덴으로 갔다. 그 해 3월에 오스트리아를 합병한 히틀러는 수 데텐 거주 독일인을 구한다는 명분을 내걸 고 체코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체임벌린이 영국의 참전을 선언하러 오는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 68살의 총리는 임박한 전쟁을 막아야겠다는 일념으로 바다를 건 너 처음으로 장거리 비행에 나섰다.

체임벌린의 목표는 숭고했다. 그러나 그는 협상의 아마추어였다. 그는 히틀러와의 개인 적인 담판을 생각했기 때문에, 외교부의 전 문적 도움을 받지 않았다. 통역도 데려가지 않아 독일 통역의 도움을 받았다. 영국 쪽에 서 기록할 사람이 없어서 회담이 끝난 뒤 대 화록조차 얻지 못했다. 대화록은 며칠 뒤 겨 우 받을 수 있었다.

체임벌린은 핵심 쟁점인 체코 문제에 관한 어떤 보고서도 들고 가지 않았다. 평화에 대 한 열망은 높았으나, 협상 준비는 너무 소홀 했다. 이에 비해 협상 상대인 히틀러는 속임 수와 심리전, 신경전에 능했다. 체임벌린은 ‘허풍이 아님을 보여줄 능력이 없다면 허풍 을 떨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지만, 히틀러 는 그렇지 않았다.

전체적인 세계정세부터 논의하자는 체임 벌린의 제안에 히틀러는 거짓말로 선수를 쳤다. ‘이 시간에 300명의 수데텐 독일인이 사살됐다’는 거짓 정보로 협상의 주도권을 잡고, 단도직입적으로 수데텐 독일인들이 살 고 있는 지역을 독일제국에 할양하는 문제 에 동의하느냐고 물었다. 구체적인 정보가 없던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기습에 말려들었 다. 결국 개인적으로 동의하지만 내각과 협 의해야 한다고 자기 패를 보여주고 말았다.

체임벌린은 히틀러의 욕심이 제한적이라 고 판단했고, 목표를 달성하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오판했다. 9월22일 본 근처의 휴양 지인 고데스베르크에서의 만남도 마찬가지 였다. 체임벌린은 체코를 양보하는 안을 갖 고 갔지만, 히틀러는 더 큰 요구사항을 들고 나왔다. 아예 새로운 경계선 설정을 요구했 다. 히틀러는 영국이 전쟁에 참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하고 밀어붙인 것이다.

그런 과정을 거쳐서 뮌헨 협상이 열렸다. 고데스베르크 담판이 성과를 거두지 못한 상황에서 일주일 사이에 많은 변화가 일어 났다. 영국에서는 ‘비관의 폭풍’이 몰아쳤지 만, 체임벌린은 낙관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체코는 부대이동 명령을 내렸고 영 국은 해군 동원령을, 프랑스도 예비군 소집 령을 내렸다. 그러나 독일 쪽은 그 시점에 전 쟁을 시작할 형편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회 담 직전인 9월24일과 25일 베를린에서 실시 된 독일 기계화 사단의 기동훈련에 베를린 시민들은 침울하고 냉담하게 반응했다. 회담이 열리는 뮌헨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뮌헨 시민들은 평화의 사도 체임벌린을 열광적으로 환영했다.

영국이 조기에 개입했으면 유리했을까

히틀러는 총동원령 발표가 예고된 2시간 전에 영국의 체임벌린,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 프랑스의 에두아르 달라디에에게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체임벌린은 당시 하원에서 히틀러와 무솔리니에게 보내는 마지막 호소문을 읽고 있었다. 뮌헨 회담 개최를 알리는 쪽지가 연단에 선 총리에게 전해지고, 총리가 그것을 극적으로 발표했을 때 보수당 쪽에서는 “이런 고마울 데가. 신께서 총리를 통해 우릴 도우시네”라는 안도의 말이 쏟아졌다.

뮌헨의 합의는, 수데텐 지역을 독일에 할양한다는 것이었다. 4개국의 서명이 이루어진 뒤 체임벌린은 히틀러에게 양자회담을 제안했다. 그리고 영국과 독일의 관계를 개선하고 유럽 평화에 함께 기여하자는 성명서를 작성해서 히틀러의 서명을 받았다. 체임벌린은 정치적 성과가 필요했다. 그러나 히틀러에게 그런 문서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다. 체임벌린이 뮌헨 회담을 끝내고 런던의 헤스턴 비행장에 도착했을 때,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그곳에는 엄청난 군중이 운집해 있었다. 위기가 해소되었다는 안도감으로 시민들은 환호했다. 총리 관저까지 몰려온 군중에게 체임벌린은 “우리 시대에 평화가 찾아왔다고 믿습니다”라고 외쳤다.

불필요한 전쟁을 막아보겠다는 체임벌린의 희망은 순진한 것이었을까? 유화정책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히틀러의 야망을 고려할 때, 제2차 세계대전은 불가피한 전쟁이었다고 평가한다. 그래서 체임벌린이 히틀러의 의도를 오판하고, 허망한 희망에 사로잡혀 적절한 군사 개입의 기회를 놓쳤다고 비판한다. 과연 영국이 조기에 군사적으로 개입했으면 훨씬 유리했을까? 1930년대 영국의 유화정책은 국력의 상대적 하강 국면에서 벌어졌음을 기억해야 한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가 1930년대를 회고했듯이 “(영국은) 해가 이미 저물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한 채, 남은 빛이 잔광뿐임을 깨닫지 못한 채 여전히 과거의 황혼에서 살고 있었다”.

체임벌린이 1937년 5월 총리에 취임했을 때, 영국 재무부는 과도한 군비 확대가 경제·사회 구조를 약화시킬 수 있다는 점을 경고했다. 여전히 세계의 금융·상업 중심지였던 영국은 평화와 안정이 필요했다. 물가를 안정시키고 파운드화의 가치를 안정적으로 유지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힌 것은 체임벌린뿐만이 아니었다.

체임벌린은 유화정책으로 시간을 벌어보려 했다. 실제로 영국의 국방비는 1936년 히틀러의 라인란트 점령 때부터 증액되기 시작했다. 전체 정부 지출에서 국방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1930년에서 1934년까지 대략 12~14%였지만 1936년 21%, 1937년 26%, 1938년 38%, 그리고 1939년 48%까지 늘었다. 뮌헨 협상을 통해 전쟁은 1년 정도 연기됐다. 그 시간 동안 영국은 연안의 레이더망을 완성할 수 있었고, 전투기의 실전 배치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시간을 번다는 것, 그것은 상대도 마찬가지다. 영국이 국방력을 강화하는 동안 히틀러도 마찬가지로 전쟁 태세를 정비했다.

뮌헨 협정에 따라 1938년 10월9일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에 진주해오자, 거리에 몰려나온 독일계 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뮌헨 협정에 따라 1938년 10월9일 독일군이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에 진주해오자, 거리에 몰려나온 독일계 주민들이 환호하고 있다. 한겨레 자료

정보의 실패와 초대받지 못한 미국·소련

뮌헨 협상의 성패를 가른 결정적 변수는 히틀러는 카드가 많았으나 체임벌린은 내밀 카드가 없었다는 점이다. 내밀 카드도 없이 상대의 선의에 의존하는 협상은 성공하기 어렵다. 당시 영국의 입장에서 유화정책이 아닌 다른 선택은 없었을까? 뮌헨 협상에서 체임벌린이 저지른 잘못은 무엇인가?

첫째는 정보 실패다. 영국은 1930년대 초 독일의 힘을 과소평가했다. 그리고 1938년에는 독일 공군력을 과대평가했다. 히틀러를 만나 담판을 벌여야겠다는 판단에는 런던 공습에 대한 두려움이 작용했다. 뮌헨 협상이 이루어지던 시기에 런던에선 공습 대비 팸플릿이 배포되고, 900개 이상의 대피소가 급조되고, 거대한 참호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그러나 1938년 당시 나치 폭격기들은 독일에서 런던까지 직접 날아올 수 없었다. 그 정도의 비행능력을 확보하지 못했다.

런던 공습은 독일이 벨기에와 프랑스 해안을 장악한 1940년이 돼서야 가능했다. 영국은 독일 공군의 능력을 과대평가했기 때문에, 공군 위주의 국방정책으로 국내 방위에 집중했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독일의 중부 유럽 진출에 적극적으로 대처하지 못했다. 정보 실패가 전략적 오판을 낳은 것이다.

둘째, 반파시즘 연합전선을 고려하지 않았다. 체임벌린은 왜 미국에 희망을 걸지 않았을까? 물론 당시 미국의 프랭클린 루스벨트 정부는 유럽 상황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대공황의 터널을 빠져나가기 위해 고립주의를 유지했다. 유화정책이 실패로 돌아갔을 때, 미국은 뮌헨에 없었다는 점에 안도했을 뿐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의 개입을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소련의 역할을 무시했다는 점이다. 뮌헨 회담에 소련은 초대받지 못했다. 당시 체임벌린의 보수당 정부는 볼셰비즘을 나치즘만큼이나 경계했다. 그래서 소련과의 동맹이 가져올 위험은 과대평가한 반면, 그것이 가져올 이점은 과소평가했다. 소련의 전쟁수행 능력도 우습게 생각했다. 당시 소련은 이미 미국에 이은 세계 2위의 산업국가였다.

더구나 당시 스탈린은 히틀러가 아니라, 영국·프랑스와 협력할 의사를 갖고 있었다. 뮌헨 회담 직후 에드워드 핼리팩스 영국 외교장관이 막심 리트비노프 소련 외무장관에게 물었다. ‘체코가 독일과 전쟁을 하면 소련은 어떻게 할 것인가?’ 리트비노프는 체코를 지원할 것이라고 말했고, 소련의 30개 보병 사단을 서쪽 국경에 배치할 것이라고 확언했다. 실제로 그는 프랑스·체코·소련의 참모회담 개최를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영국도 프랑스도 당시 소련의 역할에 큰 비중을 두지 않았다.

동맹 전략의 실패는 곧 재앙으로 드러났다. 방황하던 스탈린을 꼬드긴 것은 히틀러였다. 결국 1939년 8월 앞문으로 돌진하기 위해 뒷문을 걸어 잠가야 하는 히틀러는 독-소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다음달인 9월3일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강자의 유화는 품위 있는 평화의 길”

체임벌린은 1940년 11월, 역사적 오명을 뒤집어쓴 채 사망했다. 그러나 사망 6개월여 전인 1940년 5월에 구성된 전시 내각을 처칠에게 맡긴 것이 바로 체임벌린이라는 사실도 잊지 말아야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에서는 ‘유화’라는 단어가 남용되고 있다. 모든 대화나 협상을 유화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식이고 무지다. 유화정책은 1930년대 영국이 직면한 특수한 상황의 산물이다. 유화정책의 강력한 비판자였던 처칠조차 “약자의 유화는 무익하고 치명적이지만, 강자의 유화는 고귀하고 품위가 있는 평화의 길”이라고 말했다. 시공을 초월해서 전쟁의 길로 달려가는 자들이 체임벌린을 제물로 삼는 역사의 폭력을 이제는 중단해야 한다.

인제대 통일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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