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학생이 상담을 청했다. 일본 도쿄에 가려 하는데 식구들이 반대한단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 때문이었다. 정답은 없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와 방사성물질에 대한 기초적 설명을 해주고 본인이 꼼꼼히 알아보고 결정하도록 권했다. 다음날 그 학생이 다시 찾아왔다. 도쿄를 피해 오사카나 후쿠오카로 가려 해도 식구들이 반대한단다. 심지어 오키나와도 안 된단다.
지난해 교환학생 선발이 있었다. 예년에 비해 ‘이례적’으로 오키나와 대학 경쟁률이 높았다. 처음에는 수업 중에 오키나와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해 강의한 덕분이라 생각해서 나름대로 뿌듯했다. 곰곰이 생각하니 오키나와가 후쿠시마에서 많이 떨어져 있는 것이 잠재적으로 영향을 끼친 듯했다. 이렇듯 사람들은 문서나 언어로 정확하게 표현되는 형식지는 아니겠지만 경험이나 학습을 통해 암묵지로 원전의 공포를 알고 있다. 2011년 일본을 찾은 외국인은 2010년보다 24.4%나 줄었다. 일본을 찾는 한국인도 대폭 줄었다.
남쪽으로 튀어라, 원전 엑소더스
후쿠시마 원전 사고의 공포는 일단 거리로 가늠된다. 사람과 상품의 이동도 이에 영향을 받는다. 눈에 보이지도 않고 냄새도 나지 않으니 방사성물질을 거리로 가늠할 수밖에 없다. 거리가 멀수록 방사선이 약해질 것이라는 믿음이다.
원전 사고가 일어난 후쿠시마(시청 기준)에서 도쿄까지는 직선거리로 240km다. 북쪽에 자리한 홋카이도 삿포로까지는 594km고 서남쪽 오사카까지는 560km, 후쿠오카까지는 1021km, 오키나와의 나하까지는 1758km다. 지진해일 원전 사고로 거처를 옮긴 사람은 모두 34만 명이다. 후쿠시마현의 인구(2월1일 현재)는 약 198만 명이다. 원전 사고 전보다 3만 명 정도 줄었다. 후쿠시마현의 인구가 200만 명 아래로 내려간 것은 33년 만의 일이다. 후쿠시마를 벗어난 사람들은 저연령층과 여성이 많다. 남성을 남겨둔 모자 중심의 ‘탈출’이다. 도쿄 인구는 여전히 약 6만 명 늘었지만 전년 인구 증가 수보다 3만 명이나 줄어들었다. 후쿠시마에 이웃한 지바현과 이바라키현은 사고 이전에는 전입 초과였으나 전출 초과로 바뀌었다. 지바현이 전출 초과가 된 것은 55년 만의 일이다. 이에 반해 오사카는 전입자가 전출자를 웃돌았다. 38년 만의 일이다. 야마구치, 규슈, 오키나와 소재 8개 현의 인구는 전출 초과에서 전입 초과로 바뀌었다. 후쿠오카 인구는 약 1만 명 늘었다. 오키나와의 인구 증가는 전년 대비 7배에 달했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인구 이동에 새로운 흐름을 만든 것이다. 동북쪽에서 서남부로 이동하는 이른바 ‘엑소더스’다. 인구 이동은 지난해 3월 사고 직후에 집중적으로 생긴 현상이다. 더구나 이 수치는 등록된 인구만이니 실제 이동 인구는 이를 훨씬 웃돌 것이다. 만일 상황이 더 악화되면 인구 이동의 흐름은 더욱 대규모화될 것이다.
그런데 후쿠시마에서 한반도까지 거리를 재보면, 독도는 762km, 포항은 1009km, 부산은 1059km, 대구는 1078km, 서울은 1188km 떨어져 있다. 후쿠시마에서 보면, 후쿠오카·포항·부산·대구·서울은 거리상으로 다름이 없다. 계절 등에 따라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도 하니 거리만으로 방사성물질의 이동 가능성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후쿠오카 지역에서 하늘로 날아간 방사성물질이 국경을 넘어 이동하지 않았다고 누구도 장담하지 못한다. 방사성물질은 국경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여권과 비자가 필요 없음은 말할 것도 없다. 후쿠오카가 위험하다면, 부산도 대구도 포항도 서울도 위험하다. 그런데 한국 정부는 후쿠시마 원전 사태를 기술적 문제로 치부한다. 그리고 방사성물질은 한반도에 영향이 없다고 단언한다. 원전 문제를 국경 안에 가둬놓은 것이다.
70% 원전 폐기 여론, 선거 결과는 달라
하지만 방사성물질에 국경이 없다고 해서 원전 관리에 국경이 없는 것은 아니다. 국제적 감시기관이 있고 국제적 여론을 무시할 수는 없겠지만, 원전 관리나 원전 폐기를 결정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본 정부이기 때문이다.
지난 2월4일 보도에 따르면, 후쿠시마에서 재해 관련사로 인정받은 사람은 모두 573명이다. 또 후쿠시마 지역의 2011년 사망률은 다른 지역보다 훨씬 높게 나타났다. 하지만 정부나 도쿄전력 쪽은 원전 관련성을 확인하려 하지 않는다. 사고 뒤에 후쿠시마 원전에서 일하던 노동자 중 현재까지 4명이 급성백혈병 등으로 사망했다. 모두 말단 하청업체에서 일하던 파견노동자다. 하지만 도쿄전력 쪽은 원전과의 관련성을 부정한다. 현재 상업용 원자로 54기 가운데 가동 중인 것은 2기에 불과하다. 후쿠시마 원전 사태의 영향이다. 하지만 일본 정부의 방침은 원전 재가동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노다 요시히코 총리는 지난해 9월 미국에서 개최된 원자력 안전에 관한 정상회의에서 ‘원전 재가동’과 ‘원전 수출’을 명언했다. 지난 3월3일 외신기자와의 회견에서도 원전 재가동에 의욕을 내비쳤다. 그렇다면 여론은 어떨까? 조사 기관과 시기에 따라 많은 차이가 있으니 한마디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원전 반대 여론이 압도적인 것만은 분명하다. 이 지난해 6월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원전의 단계적 폐기에 74%가 찬성했다. 의 지난해 8월 여론조사에서도 70% 이상이 원전 폐기에 찬성했다.
그렇다면 이런 여론이 선거를 통해 드러나는가?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2011년 4월 지방선거를 보면, 원전이 자리한 홋카이도·후쿠이·시마네·사가의 4개 지역에서 모두 원전 추진에 찬성하는 현직 후보가 당선했다. 대표적 파시스트 정치가인 도쿄지사 이시하라 신타로가 원전 사고 직후 후쿠시마를 방문해 “원전을 반대하는 정체불명의 패거리들이 후쿠시마에 몰려가서 데모 같은 것이나 하고 있지만 나는 기본적으로 원전 추진론자이다”라고 밝혔지만, 그는 4월 선거에서 압도적인 지지로 승리했다. 원전 3기가 자리한 후쿠이현 쓰루가 시장 선거에서도 ‘원전과의 공존’을 내건 현직 시장이 다시 당선되었다. 쓰루가는 각종 보조금 및 고정자산세 등 원전 관련 수입이 시 전체 세입의 30% 이상을 차지하는데다 원전 관련 기업에서 일하는 주민도 적지 않다. 쓰루가의 여론조사를 보면, ‘원전 가동을 계속하되 안전대책을 충실히’라는 답변이 70%를 넘는다. 원전 폐기는 10%에도 못 미친다. 후쿠시마 원전과 마찬가지로 도쿄에 전력을 공급하는 원전이 자리한 니가타현 가시와자키 시의원 선거에서는 원전 반대파 후보 5명이 당선됐지만, 선거 전의 7석에 비해 2석이 줄어들어 여전히 원전 추진파가 다수다. 9월25일 실시된 야마구치현 가미노세키 정장 선거에서도 원전 추진파 후보가 원전 반대파 후보에게 압승을 거두었다. 가미노세키는 1982년 원전 건설 계획이 발표된 이래 9번의 선거가 있었는데, 모두 원전 추진파 후보가 당선되었다.
후쿠시마에서 도쿄전력 사원 당선
원전 사고로 예정보다 반년 늦게 실시된 후쿠시마현 선거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후쿠시마 지역 신문이 후쿠시마현 의회 의원 선거 후보자를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후보자의 90%가 원전 폐기에 찬성한다. 그러나 정작 사고가 일어난 후쿠시마현 오구마 및 후타바의 정의원 선거에서는 도쿄전력 사원인 2명의 후보자가 재선에 성공했다. 도쿄전력 노조는 지난해 기초단체의원 선거에서 모두 14명의 당선자를 냈다. 이들은 회사에서 급여를 받고 각종 복리후생 혜택을 받으며 원전 확대와 전기료 인상을 위해 힘쓴다. 한마디로, 후쿠시마 원전 사고가 일본의 정치 지형을 바꾸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왜 이런 일이 발생할까?
일본에선 2011년 3월11일 지진, 해일, 원전 사고로 이어진 일련의 사태를 ‘동일본 대진재(지진 재난)’라 한다. 이것이 공식 호칭이다. 지진이 해일을 일으키고 이것이 원전 사고로 이어져 동일본 지역에 엄청난 피해를 일으켰다는 인식이다. 따라서 원전 사고는 많은 피해 중에 하나거나 어쩔 수 없는 천재지변일 뿐이다. 후쿠시마 원전 사고는 사고 대책과 수습 과정에서 나타난 정부의 실책이나 도쿄전력의 미숙함의 문제일 뿐, 원전 자체가 가진 본질적 문제가 아니다. 그렇다면 정부의 실책을 바로잡고 원전 관리를 제대로 하면 된다. 이것이 일본 정부나 대다수 정당의 생각이다. 절대로 원전을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만으로는 원전 반대 여론을 잠재울 수 없다. 여기에서 등장하는 것이 내셔널리즘의 동원이고 강력한 리더십에 대한 욕구다. 예를 들어 도쿄 지사 이시하라 신타로는 3·11 사태를 일본인에게 내려진 ‘천벌’이라 표현했다. 그는 민주주의적 가치에 ‘오염’돼 국가를 잃어버리고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정신을 못 차리는 ‘일본병’이 이번 사태를 불러일으켰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가 꿈꾸는 것은 파시즘이다. 파시즘적 사고의 토양은 계속되는 불황 등으로 인한 일본의 ‘추락’이다.
원전 폐기와 모순되지 않는 파시즘
지금 일본 사회는 형식적으로는 원전 폐기와 원전 추진의 갈림길에 서 있다. 매일같이 원전 반대 집회가 어딘가에서 열린다. 기존의 패러다임에 혁명이 일어났다고도 한다. 원전 반대 집회에 우익이 합류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젊은 세대의 참여도 눈에 띄게 늘어났다. 집회의 형식도 개방적으로 바뀌었다. 후쿠시마가 기존의 정치 지형을 바꾸었다는 소리도 들린다. 정치 지형으로 보면, 여전히 원전 폐기의 가능성은 그리 커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원전 폐기든 원전 추진이든 후쿠시마 사태가 강력한 리더십, 극단적으로는 파시즘 정치의 방향으로 정치 지형을 바꾸는 동력으로 작동할 가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는 점도 간과해선 안 된다. 최근 젊은 층을 중심으로 폭발적 인기를 얻고 있는 오사카 시장 하시모토 도루가 원전에 반대하는 파시스트 정치가라는 점은 하나의 시사를 준다. 적어도 일본에 한해서 보자면, 민주주의적 가치가 반드시 원전 찬성의 논리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듯, 파시즘이 원전 폐기의 논리와 반드시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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