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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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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의 종’은 어떻게 울렸나

원폭 투하를 ‘신의 섭리’로 받아들인 나가이 다카시,

과학자이면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천황주의자이기도
등록 2014-12-19 15:10 수정 2020-05-03 04:27

나가사키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중국 남부지방 푸젠에서 유래했다는 나가사키 짬뽕이나 나가사키 접시우동? 혹은 포르투갈에서 유래했다는 나가사키 카스텔라? 혹은 나가사키현 사세보에 자리한 유럽을 본뜬 테마파크 하우스텐보스? 나가사키 하면 떠오르는 ‘이국’ 냄새 물씬 풍기는 이런 단어들은 길고 길었던 ‘쇄국’ 체제하에서도 ‘데지마’라 불리는 ‘섬 아닌 섬’을 통해 네덜란드나 중국 등과 꾸준히 교역을 하면서 키워왔던 나가사키의 개방적인 문화를 드러내준다. 하지만 또 다른 역사의 그림자도 있다.

분노의 히로시마, 기도의 나가사키
나가사키 항구에서 불과 17km 정도 떨어진 곳에 자리한 하시마라는 섬은 강제동원한 조선인 노동자를 노예처럼 혹사시킨 탄광 등이 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미쓰비시 조선소에서 건조 중이던 군함과 닮았다고 해서 ‘군칸지마’(군함섬)라고도 불렸고 또 섬에서 탈출하려던 조선인 노동자가 끊이지 않아 ‘감옥섬’이라고도 불렸던 곳이다. 이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헤엄쳐 바다를 건너려 했던 조선인 노동자 중 육지에 무사히 상륙했던 사람이 거의 없었다고 하니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앨커트래즈(Alcatraz)를 연상시킨다. 그런데 최근 일본 일각에서 조선인 강제동원의 역사를 삭제하고 일본 근대 산업혁명의 성공 이야기만을 부각시켜 ‘군칸지마’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시키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니 가슴이 먹먹해진다.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관련 흔적 중 히로시마와 다른 것은 가톨릭 관련 유적이다. 평화공원 근처에는 일본 최대의 가톨릭교회 우라카미 천주당이 자리하고 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피해자 묵념을 하고 있는 일본 학생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관련 흔적 중 히로시마와 다른 것은 가톨릭 관련 유적이다. 평화공원 근처에는 일본 최대의 가톨릭교회 우라카미 천주당이 자리하고 있다. 나가사키 평화공원에서 피해자 묵념을 하고 있는 일본 학생들. 한겨레 김성광 기자

또 다른 역사의 그림자도 있다. 잘 알려진 것처럼 나가사키는 1945년 8월9일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곳이다. 이러다보니, 나가사키에도 근대적 유적과 함께 원자폭탄에 얽힌 평화공원이 있고 도서관과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다. 그런데 히로시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원자폭탄에 얽힌 역사의 흔적이 나가사키에서는 쉽게 눈에 띈다. 바로 가톨릭 관련 유적들이다. 평화공원 근처에 자리한 우라카미 천주당은 신도 수 7천 명을 자랑하는 일본 최대의 가톨릭교회다. 원자폭탄으로 이 성당은 원형을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되었고 때마침 고해성사 미사 중이던 사제와 부사제를 포함한 신도들이 모두 사망했다.

‘기독교 국가’ 미국의 ‘가톨릭 도시’ 공격

히로시마에는 우라늄형 원폭 ‘소년’이, 나가사키에는 플루토늄형 ‘뚱뚱보’가 각각 투하되었고, 히로시마에서는 이후 5년 동안 약 20만 명이 사망했고 나가사키에서는 약 14만 명이 사망했다. 이 중 조선인 희생자는 약 10%로 추정된다. 그런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는 동일하게 원자폭탄의 세례를 받은 도시지만 스스로를 드러내는 방식과 방향은 다소 다르고, 또 두 도시 간에는 피폭 체험을 둘러싼 묘한 ‘경쟁 구도’가 있다. 히로시마가 스스로를 ‘인류 최초의 피폭도시’라 하면, 나가사키는 반핵에 대한 미래의 의지를 담아 ‘인류의 마지막 피폭도시’라 한다. 히로시마가 스스로를 ‘평화도시’라 하면, 나가사키는 ‘국제문화도시’라 한다. 일본에서 원자폭탄의 비극을 표현할 때, 히로시마 나가사키라고는 하지만 나가사키 히로시마라고는 하지 않는다. 물론 시간적 선후를 기준으로 나열한 것이지만, 이 순서가 때로는 피폭 체험의 위계 관계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사회학자 다카하시 신지는 나가사키를 히로시마와 대비해 ‘열등 피폭도시’라고까지 말한다.

두 도시의 피폭 경험과 그 계승을 대비시킬 때, ‘분노의 히로시마’와 ‘기도의 나가사키’라는 말도 잘 쓰인다. 물론 이같은 대비가 반드시 실제 현실을 그대로 반영한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체로 히로시마가 동적이고 격정적인 반핵운동의 이미지라면 나가사키는 정적이고 은인(隱忍)의 이미지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사실 나가사키가 ‘기도’로 형용되는 데는 까닭이 있다. 앞서 말한 우라카미 천주당이 자리한 데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나가사키는 일본 가톨릭의 중심지다. 세례를 받은 가톨릭 신자가 2006년 현재 일본 전역에 약 45만 명이 있는데 이 중 나가사키에 6만5천 명(나가사키 인구의 4.4%)이나 거주하고 있다. 이곳에서 메이지유신(1868년) 앞뒤로 약 600명의 가톨릭 신자가 순교했으니 나가사키는 가톨릭 박해의 성지이고 신앙의 장소다. 게다가 원자폭탄이 떨어진 폭심지는 일본 최대의 가톨릭 성당인 우라카미 천주당에서 겨우 500m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니 가톨릭 신자의 희생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기독교 국가’ 미국이 일본의 기독교 중심지를 원자폭탄으로 공격한 셈이다.

사실 미국이 원래부터 나가사키, 그중에서도 가톨릭 신자가 밀집 거주하던 우라카미 지역을 공격 목표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원래는 나가사키에서 동쪽으로 떨어져 있는 고쿠라를 공격 목표로 삼았다가 날씨 때문에 나가사키로 목표를 수정했고, 나가사키의 옛 도심을 표적 삼아 원자폭탄을 떨어뜨렸지만 이 원자폭탄이 예정 궤도를 벗어나 당시 변두리였던 우라카미 지역에서 폭발했다. 우라카미에는 옛 도심에 거주하던 나가사키 토박이들의 차별 때문에 가톨릭교도나 피차별 부락민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으니 이들의 희생이 클 수밖에 없었다. 우연에 우연이 거듭된 결과이기는 했지만, 이 때문에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은 가톨릭과 분리할 수 없게 되었고, 따라서 ‘기도’라는 말로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형용하는 것은 역사적 경위를 생각할 때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가 많았다고 해서 피폭 경험이 바로 ‘기도’라는 말로 자동 수렴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도의 나가사키’라는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 중에 나가이 다카시(永井隆·1908~51)가 있다.

‘기도의 나가사키’를 만들어낸 것은 나가이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책의 영향이 컸다. 한국에도 1949년 번역돼 쇄를 거듭할 만큼 인기 있었던 〈나가사키의 종〉은 최근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로 재발간되었다. 한겨레 자료, 권혁태 제공

‘기도의 나가사키’를 만들어낸 것은 나가이 다카시의 〈나가사키의 종〉이라는 책의 영향이 컸다. 한국에도 1949년 번역돼 쇄를 거듭할 만큼 인기 있었던 〈나가사키의 종〉은 최근 〈그날, 나가사키에 무슨 일이 있었나〉로 재발간되었다. 한겨레 자료, 권혁태 제공

우라카미 천주당 근처에 ‘여기당’(如己堂)이라는 소박한 목조건물이 있다.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탐험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일본어로 ‘뇨코도’라 읽는 이 집은 ‘여기애인’(如己愛人)의 줄임말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라는 마태복음의 한 구절에서 따왔다. 의사이자 작가인 나가이 다카시가 1948년부터 1951년까지 약 3년 동안 병마와 싸우면서 자신의 피폭 경험을 집필한 곳이다. 나가이는 1908년 의사의 아들로 시마네현에서 태어났으니 나가사키 토박이는 아니다. 의사의 길을 걷기 위해 나가사키의과대학에 입학해 나가사키로 거처를 옮긴 것은 그가 스무 살이 되던 1928년 무렵이다. 이후 그는 공부에 매진해 1940년에는 모교 교수로 부임했고, 1944년에는 모교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취득한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만주사변과 중일전쟁 때를 제외하면 그야말로 탄탄대로의 길을 걸은 셈이다. 하지만 방사선 치료 연구에 매진하다가 1945년 6월에는 백혈병 진단을 받았고, 1945년 8월에는 원자폭탄으로 머리를 크게 다치는 등 불운이 계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환자들을 돌보는 의사의 길과 과학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고 작가로서도 많은 작품을 남겼다.

권력자에게 유리한, 이중의 면책 언설

피폭자는 피폭자라는 하나의 모습으로 그려지기 십상이지만, 사실은 다양한 삶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경우도 많다. 나가이도 마찬가지다. 그는 의사이고 과학자(원자물리학)이면서 작가였지만 동시에 가톨릭 신자였다. 그는 피폭자로서 원자폭탄에 부정적이었지만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원전)을 과학자로서 적극 지지했다. 또 그는 독실한 신자답게 원폭 투하를 ‘신의 섭리’로 해석하고 희생자를 하느님의 제단에 바치는 ‘어린 양’으로, 그리고 이 의식을 ‘번제’(燔祭·홀로코스트)라 했으며, 살아남은 피폭자들에게는 원폭 투하를 ‘하느님이 내린 시련’이니 ‘하느님께 감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도=은인=자중’을 주장하는 이같은 나가이의 언설은 후일 학자들에 의해 ‘우라카미 번제설’로 명명되었다. 나가이의 주장을 한 가톨릭 신자의 개인적인 신앙고백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이유는 그가 나가사키에 적지 않은 영향력을 가진 지식인이었기 때문이다. 또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절절히 담은 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그의 ‘신앙고백’이 나가사키의 피폭 경험을 대표하는 언설로 자리잡았다는 사정도 무시할 수 없다. 이 때문에 나가이의 ‘우라카미 번제설’은 후일 많은 비판을 받게 된다. 나가사키 피폭자인 시인 야마다 칸(1930~2003)은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미국으로 향해야 할 “민중의 원한”을 ‘신의 섭리’라는 말로 달래는 미국 쪽의 데마고기에 가담하는 언설이라 비판했고, 작가 이노우에 히사시(1934~2010)도 ‘신의 섭리’는 원폭 투하의 책임 소재를 무력화하고 싶어 하는 권력자에게 유리한 언설이라 비난했다. 또 사회학자 다카하시 신지는 나가이의 ‘우라카미 번제설’은 천황의 전쟁 책임과 미국의 원폭 투하 책임을 무화하는, ‘이중의 면책’ 언설이라고 비판했다.

그의 첫 번째 작품 (1946년 집필)이 출간된 것은 1949년 1월이다. 원자폭탄 관련 서적의 출간을 엄격히 금지하던 미군정의 검열 체계가 강력히 작동되던 시기다. 미군정은 일본군에 의한 필리핀 주민 학살을 다룬 ‘마닐라의 비극’이라는 보고서와의 합본을 조건으로 출간을 허가했다. 아마 일본군의 잔혹한 학살과 원자폭탄의 비극을 상쇄시키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신의 섭리’를 내세우는 나가이의 ‘우라카미 번제설’이 원자폭탄에 대한 미국의 책임을 무화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미군정은 생각했을 가능성도 크다. 이같은 사정이 반영된 탓인지 1949년에 당시 천황 히로히토는 병석에 누워 있던 나가이를 병문안했고 나가이는 눈물을 흘리며 감격한다. 가톨릭 신앙과 신토라는 ‘종교 아닌 종교’ 이데올로기, 근대 과학과 전근대적 군주, 평화에 대한 믿음과 천황의 전쟁 책임 사이에서 그가 갈등했던 흔적은 없다. 과학자이면서 가톨릭 신자인 그는 천황주의자이기도 했다. ‘기도의 나가사키’는 적어도 나가이에게는 천황주의와 모순되는 것이 아니었던 셈이다.

천황주의자를 감추고 싶은 이들

(이승택 옮김·삼일출판사)은 1949년 8월 한국에서도 번역 출판되었고 1950년 2월까지 7쇄를 거듭했다. 일본에서 출간된 지 겨우 반년 만에 한글 번역판이 나온 셈이다. 오사카대학원 서윤아씨의 연구에 따르면, 당시 한국 신문에 “원자폭탄이 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시켰다! (…) 해방 후 최대의 베스트셀러를 보자!”라는 광고가 실렸다고 하니 한국에서도 적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킨 듯하다.

이 책은 2011년 이라는 제목으로 다시 출간되었다. 그런데 1949년 일본어 원판에 “우라카미가 잿더미가 되는 순간 비로소 하느님은 이를 받아주시고 인류의 잘못을 들어주셔 바로 천황 폐하에게 하늘의 계시를 내려 종전의 성스러운 결단을 내리도록 해주신 것입니다”로 되어 있는 나가이의 발언이 2011년 한글 번역판에는 “우라카미가 폭격에 잿더미로 변하는 순간, 마치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을 때, 그것을 받으시고 온 인류를 구원해주셨던 것처럼 하느님은 드디어 우리를 용서하시고, 종전을 허락하셨습니다”로 되어 있다. 즉, 나가이가 했던 ‘천황 폐하’라는 말이 삭제돼 있는 것이다. 나가이에게서 천황주의자의 모습을 감추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일본과는 다른 맥락에서 한국에도 있는 듯하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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