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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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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분열 원인 외부인가 내부인가

일본 평화운동의 ‘분가’에는 중국과 소련의 혼란에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립도 한몫해…
1963년 제9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뒤 분열돼 오늘에 이르러
등록 2014-10-18 15:31 수정 2020-05-03 04:27

“(중국의) 자오안보(趙安博)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기만이라 말한다. 흑백 줄무늬 윗도리에 포도주 색깔의 모자를 쓴 카메룬의 흑인 청년도 마찬가지로 이 금지조약을 부정하면서 ‘우후르(Uhuru), 우후르, 우후르’라며 자기 나라 말로 평화를 외친다. (그러자) 소비에트 여성 대표가 마이크 앞으로 나와 핵실험 부분 금지조약은 커다란 진보이며 흐루쇼프도 이를 위대한 한 발이라고 말했다며 연설을 펼친다. 그러자 박수갈채가 터져나왔지만, 어떤 나라(중국) 사람들은 이를 노골적으로 무시한다. 조금씩 밀려오는 석양빛 속에서 모리타키 이치로(森瀧一郞) 대표이사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가슴이 아팠다.”

“중국 대표에 등 돌린 소련의 침묵의 묵도”

1962년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어느 때보다 핵전쟁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공격 무기의 쿠바 반입을 금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미국 국무부 자료

1962년은 ‘쿠바 미사일 위기’를 겪으며 어느 때보다 핵전쟁 가능성이 높았다. 당시 공격 무기의 쿠바 반입을 금지하는 선언문에 서명하는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 미국 국무부 자료

오에 겐자부로가 (1965)에서 그린 1963년 제9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의 한 장면이다. 평론가 요시모토 다카아키(吉本隆明)는 ‘전후사상의 황폐’(1965)라는 글에서 1945년 피폭 시점에 갇혀 있는 히로시마 피폭자들로부터 인류 멸망의 상상력을 발견하고 이를 통해 ‘피폭자의 동지’가 되어야 한다는 오에의 ‘제안’을 “시간적인 이상 취미”에 사로잡혀 있는 “제3자적 입장”이라고 폄하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 보니, 1963년 반핵 세계대회에서 벌어졌던 중-소 대립과 이로 인한 평화운동 진영의 혼란을 특유(‘제3자적’이라 해도)의 문학적 상상력으로 기록한 작품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 글에서 확인되는 것은 1963년에 조인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에 격렬하게 반대하는 중국과, 이 조약을 ‘커다란 진보’라며 한껏 치켜세우는 소련, 그리고 이를 ‘창백한 얼굴’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히로시마의 피폭자를 대표하는 모리타키 이치로, 그리고 이에 공감하는 ‘일본인’ 오에 겐자부로의 모습이다. 모리타키 이치로는 히로시마 피폭으로 한쪽 눈을 실명한 윤리학자로 원수폭피해자단체협의회의 대표위원 자리에 오른 인물이다.

제9회 대회를 취재한 마이니치신문사가 발행하는 (1963년 8월20일)에도 비슷한 기사가 올라 있다. 중국 대표단 단장이던 중국불교협회 회장 자오푸추(趙朴初)가 단상에 올라 “이 조약은 오히려 핵전쟁의 위험을 증대시켜 세계인민의 이해에 반할 뿐만 아니라 미제에 봉사하는 것”이라며 약 10분 동안 개회 인사를 하자, 15명의 소련 대표단이 갑자기 기립해 연단에 등을 돌리고 피폭자 위령탑에 묵도를 바치는 모습을 그리면서 “중국 대표에 등 돌린 (소련의) 침묵의 묵도”야말로 제9회 세계대회를 상징하는 것이라 쓰고 있다.

중-소 대립은 이 대회에 참가한 세계 각국 대표단에도 영향을 미쳤다. 이 대회에는 총 7개의 국제평화단체와 19개국을 대표하는 총 67명의 해외 인사가 참여했는데, 이들도 각각 소련 지지파와 중국 지지파로 나뉘었다. 미국·유고·인도·헝가리·프랑스 대표단 등은 소련을 지지했고, 조선·인도네시아·수단·뉴질랜드·케냐 등은 중국을 지지했다. 실론(스리랑카) 대표단은 중-소 지지로 내부 분열했다.

오에의 글이나 의 기사를 보면, 중국과 소련이라는 ‘외부’의 힘 때문에 반핵운동 진영이 혼란에 빠졌고 이 때문에 ‘내부’의 당사자인 피폭자나 ‘또 하나의 내부’인 ‘일본인’이 이 사태에 망연자실할 수밖에 없었다는 느낌이 든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지만, 동시에 중-소 대립이라는 ‘외부’의 힘이 ‘내부’의 혼란과 분열로 이어지는 데 사회당과 공산당의 대립이 한몫했음을 부정하기는 힘들다. 즉, 부분적 핵실험조약을 지지하는 사회당계와 이를 반대하는 공산당계의 대립과 갈등이다.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 둘러싸고 중-소 균열
오에 겐자부로는 평화운동이 분열을 보인 1963년 제9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풍경을 〈히로시마 노트〉에 기록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오에 겐자부로는 평화운동이 분열을 보인 1963년 제9회 원수폭 금지 세계대회 풍경을 〈히로시마 노트〉에 기록했다. 한겨레 이정용 기자

바로 1년 전인 1962년 제8회 세계대회에서는 소련의 핵무기를 ‘방어적 핵’이라며 옹호했던 공산당계와 ‘모든 핵무기’에 반대해야 한다는 사회당계 사이에 벌어졌던 격렬한 대립이 결국 난투 소동으로 발전해 중상자까지 나왔지만, 이때는 적어도 중-소 대립이 표면화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소련·중국·공산당이 사회주의 핵을 ‘방어적 핵’으로 규정하고 이를 옹호하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른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둘러싸고 중국과 소련 간에 균열이 발생했고, 사회당계는 소련 쪽 입장을 지지하고 공산당계는 중국 쪽 입장을 지지하는 새로운 대립 구도가 만들어졌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발단은 1963년 7월25일 모스크바에서 미-영-소 간에 체결된 ‘부분적 핵실험 금지에 관한 조약’(PTBT·8월5일 정식 조인, 10월 발효)이다. 이 조약은 대기권·우주공간·수중에서 핵실험을 금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1945년 인류 최초의 핵무기를 미국이 개발한 이후, 세계 각국은 핵무기 경쟁에 뛰어들었다. 이른바 인류 멸망의 메시지가 여기저기서 회자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의 많은 전문가들은 이대로 가면 20년 뒤에는 핵무장 국가가 30개국으로 늘어날 것이라는 예측을 했을 정도다. 이런 위기감을 한층 더 증폭시킨 것이 바로 1962년에 있었던 ‘쿠바 미사일 위기’였다. 1971년에 출간된 이나 당시 미 국무부 장관이던 로버트 맥나마라의 기록에 따르면, 냉전기에 핵전쟁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컸다. 그래서 ‘치킨게임’ 양상으로 치닫던 핵무기 개발 경쟁에 제한을 두기 위해 미-소 강대국이 영국과 같이 맺은 조약이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이었다.

이 조약이 발효된 같은 해 10월까지 세계 111개국이 조인했으니 핵무기의 확산에 일종의 방파제 역할을 했다는 평가도 있을 수 있다. 게다가 핵실험으로 인한 방사성물질의 방출도 억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이 조약의 한계도 명확했다. 일단 이 조약은 당시 핵전력의 축소나 철폐에 관한 내용이 전혀 담겨 있지 않았다. 게다가 지상 핵실험은 금지되었지만, 지하 핵실험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다. 핵무기를 제조하거나 배치하는 데 아무런 장애도 없었다. 사실 이 조약의 노림수는 핵무장 국가의 신규 진입을 막아 미-소의 핵독점 체제를 유지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미 핵무기 개발에 착수해 실험을 앞두고 있던 프랑스나 중국 입장에서는 이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공산당 원칙론 배후에는 친중국 노선이

두 가지 입장 사이에서 사회당은 기관지인 (1963년 8월4일)를 통해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의 성립을 환영한다’는 성명을 발표하고 “쿠바 위기를 전환점으로 높아지던 평화 공존의 움직임을 한층 더 전진”시켰다는 평가를 내렸다. 그리고 이 조약을 핵무기 철폐를 포함한 전면적인 군축으로 가는 출발점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이 조약의 발효 이후 미국과 소련의 핵실험 횟수는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배로 늘었다. 사실상 사회당의 바람은 말 그대로 바람으로 끝났다고 볼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 일본 공산당은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미 제국주의가 핵무기 개발과 핵무장 강화를 은폐하기 위해 이용하는 수단”이라 비판하면서 전면적인 핵실험 금지와 핵무기 철폐를 주장했다. 이 자체로 보면 반핵운동의 원칙론을 일관되게 주장하는 것 같지만, 사실 원칙론의 배후에는 중-소 대립 속에 중국 공산당과 밀월관계에 있던 일본 공산당의 친중국 노선이 잠복해 있었다.

일본 공산당의 입장은, 반복해서 말하지만 ‘모든 핵무기’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본 공산당의 간부 우에다 고이치로가 ‘핵전쟁 방지와 수정주의이론’(1963)에서 “사회주의의 핵 보유는 절대로 타국을 공격·침략·핵협박하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 아니다. 오직 사회주의를 방위하고 제국주의의 핵전쟁 방화 계획을 저지하기 위한 노동자 계급의 입장에 선 인민적 정치 수단”이라고 말한 것처럼 ‘사회주의 핵=방어적 핵’이라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래서 소련의 핵실험 재개에 대해서도, ‘모든 핵에 반대한다’는 사회당계를 비판하면서 소련 핵을 옹호했었다.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한다고 해서 반대할 이유는 없었다. 실제로 일본 공산당은 중국이 핵실험에 성공한 1964년 10월16일에서 하루가 지난 17일에 발표한 ‘중국 핵실험에 관한 성명’에서 중국의 핵무장은 “중국 인민이 자국의 방위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핵전쟁을 방지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방위적 조치”라는 입장을 발표했다. 사회주의 핵은 ‘방어적 핵’이라는 기존 입장을 견지한 것이다.

물론 공산당 내에서도 반발이 있었다. 하지만 공산당 내에서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지지했던 최고 간부이자 친소파인 시가 요시오(志賀義雄), 스즈키 이치조(鈴木市藏), 소설가 나카노 시게하루(中野重治)는 당에서 제명되었고, 이들은 ‘일본의 소리’라는 조직을 만들었지만 공산당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다.

1973년 국제 정세 변화로 공산당 핵정책도 변화

부분적 핵실험금지조약을 둘러싼 혼란과 대립 속에서 진행되던 제9회 세계대회는 결국 사회당계가 대회를 보이콧하고 관계자를 철수시킴으로써 ‘반쪽’ 대회가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1955년에 결성된 원수폭금지일본협의회(원수협·겐스이쿄)는 일본 공산당의 평화단체로 ‘전락’해버렸고, 사회당계는 1965년에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원수금·겐스이킨)로 ‘분가’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두 단체는 통합을 모색하기도 했지만, 두 기관이 공동으로 세계대회를 개최한 1977~85년을 제외하면 통합과 연대의 흐름은 매우 제한적이다.

일본의 평화운동 진영을 혼란과 분열에 빠뜨린 ‘사회주의 핵=방어적 핵’이라는 일본 공산당의 핵정책에 변화가 생긴 것은 1973년이다. 미야모토 겐지(宮本顯治) 공산당 위원장은 미국이 대소·대중 봉쇄정책을 펼쳤던 시기에 이루어진 소련과 중국의 핵무장은 ‘방어적’ 성격을 지녔지만, 중국과 소련이 대립하고 소련이 체코를 침공하는 등 사회주의와 국제 정세가 변화했으니 사회주의 핵을 ‘방어적’이라고 할 수 없게 되었음을 밝혔다. 하지만 1960년대 평화운동 진영을 혼란과 분열로 이끈 공산당의 오류를 인정하지는 않았다.

권혁태 성공회대 일본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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